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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누가복음 16강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누가복음 9:37-62)2022-06-27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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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16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본문/누가복음 9:37-62

요절/누가복음 9:48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지난 말씀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그의 고백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한 은혜의 고백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수님의 변형되신 모습을 보여주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친히 선포해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십니다. 앞으로의 약 6개월간 유대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최후의 사명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됩니다. 6개월간은 제자양성의 마지막 시기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치십니다. 이를 통해 그들을 천국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내면성과 믿음을 훈련하십니다. 특히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로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내면성을 가르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문을 여시고 말씀을 깨닫고 영접하게 도우시길 기도합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변형되사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별세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들은 그 다음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37) 예수님이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반가이 맞았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소리 지르며 간청했습니다. 38b, 39절입니다.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누가복음에는 외아들, 외딸 문제로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애달픈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은 그들의 아픔을 잘 이해하십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귀신이 아이를 사로잡으면 아이가 갑자기 부르짖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린다는 것입니다. 귀신의 세력에 잡혀 있는 아이를 제발 도와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귀신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귀신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떠돌아다니는 원혼도 아닙니다. 귀신은 타락한 천사들로 ‘evil spirit’, 곧 악령을 말합니다. 성경은 천사나 귀신에 대해 많이 언급하지는 않는데, 전승에 따르면 소위어전 7천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일곱 천사들이라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그 중에 세 천사 곧가브리엘’, ‘미가엘’, ‘라파엘을 천사장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원래루시퍼라는 천사장도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여 반역을 일으키다가 하늘에서 쫓겨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루시퍼라는 이름은 한글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고 이사야 14:12 '계명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영어 KJV 'Lucifer'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단 한번 나옵니다. 이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가 마귀입니다. 마귀는 영어로 'the devil'이며 다른 이름으로 사탄(히브리어 שָׂטָן), 큰 용, 옛 뱀으로 불립니다. (12:9) 마귀를 추종하는 타락한 천사들이 귀신 또는 악령입니다. 마귀는 하나이고 귀신은 무수하게 많습니다. 마귀는 '대적자' 또는 '비방자"로 그가 하는 일은 오직 거짓을 말하며 파괴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마귀는 선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들을 거짓으로 미혹하고 파괴하며 죽입니다. 한 사람에게 한 귀신이 들기도 하고, 막달라 마리아처럼 일곱 귀신이 들기도 합니다. 거라사인처럼 군대귀신이 들기도 합니다.

 

본문의 아이는 간질병 증상을 일으키게 하는 귀신에 들렸습니다. 귀신이 역사하면 아이가 갑자기 부르짖고 넘어져 경련을 일으키며 거품을 흘렸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는 아비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는 아이를 데리고 유명한 랍비들에게도 가보았을 것입니다. 용하다는 의사들에게도 가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데, 마침 예수님은 산에 가고 없으셨습니다. 산 아래에 있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주도록 부탁하였지만 그들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마자 찾아와 하소연을 한 것입니다.

 

40절을 보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제자들은 마땅히 귀신을 쫓아내주어야 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미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9:1) 그들은 전도여행 때에 귀신이 떠나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현 상황에서 그들에게 그러한 능력이 지속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통로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실제적으로 연결하는 통로는 믿음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그의 능력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믿음으로 받습니다. 히브리서 4:1b "그러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믿음을 결부시키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기도도 믿음으로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실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입니다. (14:23) 그 시대 종교지도자들이나 백성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실제 삶에서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패역하다는 말은 "비뚤어진", "고집스런"이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했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들이었습니다. (32:5)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 나아가 믿음을 주시도록 긍휼을 구하며 기도해야 되었는데 완고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지난 3년간 온 힘을 다하여 키운 제자들도 여전히 믿음이 없고 패역하여 귀신들린 아이 하나를 돕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보시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그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갔을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42절입니다.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여기서 "올 때에"라는 말은 '아직 그가 오고 있는 동안'이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예수님 앞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부터 귀신이 먼저 도발을 시작했습니다. 일격을 가하여 아이를 거꾸러뜨렸습니다. 그 아비는 크게 놀라서 얼굴이 파래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 깜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귀신이 아무리 강한 것 같아도 예수님 앞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귀신 들린 아이의 상태를 잠깐 생각해봅시다. 귀신들린 아이는 한 마디로 자기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그에게 무슨 말을 하던 소용이 없습니다. "얘야! 정신 차려!"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아이의 모습은 마치 죄의 종이 되어 자기 통제력을 상실한 사람의 모습과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죄의 종이 된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14),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죄와 함께 태어나는 인간은 그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합니다. (8:21) 사람들은우리 한번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자고 합니다. ‘마음을 터놓는다고요?’ 마음을 터놓으면 피차에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17:9)

 

본문의 귀신들린 아이에게 아무리 '똑 바로 걸어라', '제자리에 앉아라', '침 흘리지 말아라'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교육은 필요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먼저 이 아이의 경우에는 귀신 들린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부패한 심성을 가진 사람의 문제는 교육으로만 해결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그 마음이 변화되고 죄에서 풀려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 인생들을 죄에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8:36)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의 심령에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그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주십니다. 죄에서 풀려나게 하십니다. 새 심령을 주십니다. 그 마음에 할례를 행하사 소원을 바꿔주시며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30:6)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신 이 사건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 인생들을 죄와 마귀의 세력으로 부터 자유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며 누리는 기쁨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로, 진리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날마다 더 주님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기쁨입니다. 과거에는 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할 수 있는 자유, 이제는 사랑할 수 있는 자유, 낮아져 섬길 수 있는 자유, 희생할 수 있는 자유를 더 많이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를 아비에게 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받을 수난에 대해 다시 예고하셨습니다. (44) 그러나 4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다는 말씀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고 하십니다. 숨긴 바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직 분명히 계시되지 않아 제자들이 무지한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어제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방금도 귀신들린 아이를 말씀 한 마디로 낫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영광스럽고 능력 많으신 예수님이 죽으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실상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고, 그리고도 그 후 오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예수님이 인생들의 구주가 되신다는 이 복음은 사람의 힘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이해하고 믿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에 대해 재차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46절입니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NIV에는 'argument', KJV에는 'reason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논리적으로 따지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에 예수님은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가르치셨고(9:23), 조금 전에는 자신의 수난을 재차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크냐 하는 문제는 결국 예수님이 이제 곧 세우실 왕국에서 누가 높은 요직을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지위나 명예에 대한 욕망이 가득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변론을 아시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47,48절을 보십시오.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48) "내 이름으로 영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는 제자들의 명예나 지위가 예수님께 완전히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지위나 명예는 오직 예수님께 속하는 것이요 오직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만 예수님께 쓰임 받는 것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 자신이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흉악한 죄에서 일방적인 은혜를 받아 예수님을 알게 되어 죄 사함 받았는데, 그리고 더 나아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되었는데 어디 자기 자랑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 아니겠습니까?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라고 합니다. (고후10:17) 이 말씀을 공동 번역은 조금 더 명확히 번역합니다.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주님만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시카고에 있는 한 선교사님이 8월에 있는 이취임식 프로그램을 짜고 있습니다. 순서 초안을 보니 제가 이임사를 발표한 후에 어떤 분이 시를 낭독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시가 무슨 시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이임자인 저의 공로를 조금이라도 언급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끔찍한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 순서를 당장 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혹시라도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 명예를 얻고자 한다면 얼굴에 검댕이가 붙은 상태로 거리에 나가 자기를 드러내는 것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즉시 회개하고 우리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도록 은혜를 구해야겠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만 높임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세례요한과 같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3:30) 하는 소원이 우리 마음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어린아이는 첫째는, 문자 그대로 EBF 아이들 같이 나이가 적은 아이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캠퍼스 선교로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청년 대학생들을 귀히 여깁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도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 아이들도 다 미래의 청년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한 영혼을 귀히 여기는 마음 자세는 모든 크리스천 윤리와 사명보다 우선합니다. 또한 둘째로, 어린아이는 나이는 들었지만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공동체에서 긴밀히 동역하다보면 서로의 연약한 점들이 많이 보입니다. 상대방이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어린아이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보기에는 내 자신도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밖을 보게끔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보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더 큰 허물을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허물만 보고 지적하며 판단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일시적으로 자기가 높아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연약한 동역자들의 약점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품지 못하고 판단하는 것은 바로 그 자체가 자기 무지를 나타내는 것이요 자기가 영적으로 낮은 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약점을 볼 때 나에게도 동일한 약점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의 많은 허물을 감당해주고 있는 동역자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나의 속마음까지 속속들이 다 아시지만 지금도 무한한 사랑과 인내로 나를 감당해주시는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서로를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있는 장점을 보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동등한 인권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귀한 영혼이라는 인식하에 한 생명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큰 자입니다. 그가 나보다 훌륭하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낮아져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큰 사람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높이지 않고 예수님만을 자랑하며 예수님만을 높이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49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그는 사도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이 지나친 나머지 배타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도로서 세움 받은 것은 귀한 일입니다.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안 됩니다. 세움 받을수록 더욱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을 배우고자 해야 합니다. 타이틀만 쥐고 있으면 권위적이 됩니다. 세움 받은 것이 도리어 자기에게 화가 됩니다. 또한 제자들의 생각은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이었습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으니 감사해야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룹 중심이었습니다. 우리도 자기 요회, 자기 지부 중심성이 너무 강하면 좋지 않습니다. 큰 지부는 작은 지부를 도와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필요하면 사람도 보내고 물질지원도 해야 합니다. 자기 지부만 챙기는 것은 예수님보다 자기를 챙기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만이, 또는 자기 지부만이, 자기 단체만이, 하나님 역사의 디딤돌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편협한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포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51절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여기서 '승천'(아날렘프세오스) '들려 올라감'이란 뜻입니다. (24:51)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죽음'(31) 대신 '승천'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천이라는 영광을 지향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차가매'(쉼플레로오')라는 말은 본래 '완성하다', '성취하다'는 뜻으로 예수께서 승천을 성취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이런 일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정되어 있음과 예수님께서 이미 그것을 알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의 최종 종착지인 예루살렘에로의 대전환입니다. 이것이 굳은 결심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음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제자들을 사마리아로 앞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던 사라미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야고보와 요한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멸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우쭐대는 마음이 대단합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하늘에서 불을 내릴 수 있는 자들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그들을 감당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참으로 어린아이를 감당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엘리야 방식 즉 '보복의 방식'을 요구하였지만, 예수님은 '사랑의 방식'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세상의 방식에 영향을 받고 따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철저히 예수님의 방식을 따르길 기도합니다.

 

57-62절은 주님을 따르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말씀합니다. 첫째 유형은 허영심으로 따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57절입니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 사람은 서기관이었습니다. (8:19) 당시 서기관은 학식과 재력이 있고 권력을 가진 유대사회의 최고 상위계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가 한 말만 보면 이 사람은 훌륭한 제자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는 말을 잘 생각해보면, 그가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갖겠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열두 제자들처럼 많은 무리들의 추앙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수행하며 같이 다니는 열두 제자들과 같이 이너써클 멤버가 되기 원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58)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권력이나 부, 명예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도리어 여우나 새와 같은 짐승들에게도 허락된 최소한의 삶의 터전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허영심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했던 이 서기관은 아마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결심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둘째는 결단력이 약한 유형입니다. 59절입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에 대해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치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지 말고 따르라는 것처럼 인륜을 거스르시는 듯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나라나 특히 유대에서 장례식은 모든 일에 우선합니다. 아무리 중요한 만남이라고 할지라도 아버지의 장례식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사람의 부친이 오늘 세상을 떠났는데 그를 제자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당일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 사람의 부친이 오늘 돌아가셨으면 그가 지금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나와 있었겠습니까? 황급한 일을 당하여 장례준비에 정신이 없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부친을 먼저 장사하게 해 달라는 의미는 지금 부친이 별세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를 섬기다가 돌아가시면 그 후에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몇 년 후가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런 그에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그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60)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내게 하라, 곧 세상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전심전력하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우선순위가 분명하지 않는 유형입니다. 61절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이에 대해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한다는 말을 통해 그 마음이 가족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 있음을 아셨습니다. 이런 그에게 우선 순위를 분명하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더욱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아직 연약한 제자들을 여러모로 가르치셨습니다. 믿음 없음과 완악함을 회개토록 하시고 편협한 마음을 극복하도록 하셨습니다. 혈기를 회개하도록 하셨습니다. 허영심에 기초하여 주님을 따르지 말고 분명한 결단을 하고 주님을 따르도록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연약한 한 사람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연약한 양들과 또한 연약한 동역자들을 영접하고 섬기는 사랑의 목자들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