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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누가복음 21강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누가복음 11:37-12:12)2022-08-08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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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21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

 

말씀 / 누가복음 11:37-12:12

요절 / 누가복음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우리가 신자로서 세상을 갈아갈 때 염려되는 일이 많습니다. 염려는 물론이고 때로 두려움을 갖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특히 신앙 문제로 박해를 받을 때 더욱 그러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근본적인 길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니다. 본문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 절대적인 심판의 권세자이신 하나님을 굳게 믿는 가운데 모든 두려움을 이기는 담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이 보배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6:29) 성령께서 말씀을 듣는 우리의 마음 안에 믿음을 일으켜주시길 기도합니다.

 

37-39절을 보면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점심 식사에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식탁에 앉으시기 전에 율법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절차를 생략하셨습니다. 곧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위생상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제의적(祭儀的)인 문제였습니다. 결례(潔禮)의식이었기 때문에 그냥 씻기만 하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정해진 양만큼의 물로 정해진 방법으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손을 씻은 물이 씻긴 곳으로 다시 가지 않도록 손을 쳐들어서 물이 손목 쪽으로 흘러가게 했습니다. 이 제의적(祭儀的)인 것을 모든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지켰었습니다. 그들은 식사 전 손 씻는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이를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데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규례를 무시한 것은 그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식사 전에 늘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특별히 의도를 갖고 그렇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이는 바로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그 바리새인은 아마 예수님이 율법을 폐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폐하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전통을 둔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제사장들이 직무를 행할 때 손발을 씻도록 명시되어 있지만 (30:21) 식사와 관련해서 제사장이나 일반 사람들이 손을 씻어야 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율법보다 앞세운 자기들의 전통을 다시 제 자리에 두신 것 뿐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였습니다. 반들반들 광을 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의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그 내면을 씻지 않고 그릇만 씻고 또 손만 씻는 것이 가증하게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40,41절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이는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이 그들의 속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겉에 나타나는 것만 보지만 하나님은 속도 보십니다. 도리어 속을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 중에 한 명을 택하여 왕으로 세우라고 하십니다. 이새의 아들들이 사무엘에게 나아오자 장남 엘리압이 금방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키가 크고 용모도 멋있었습니다. 사무엘이 보기에는 대장부 감이요 실로 왕으로 세움 받을만한 자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아니라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16:7)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 곧 속을 보십니다.

 

또한 사도행전 1장을 보면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 사람이 추천되었는데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고, 다른 하나는 맛디아였습니다. 요셉은 히브리식의 바사바라는 이름도 있었고, 로마식 이름인 유스도라는 이름도 있었습니다. 그는 단 하나의 이름을 가진 맛디아보다는 가문과 경력이 훨씬 나아 보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24b,25a) 사도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맛디아를 뽑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를 찾으십니다. (13:22)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내면입니다. 그런 것을 모르고 사람들에게만 그럴싸하게 보이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은 실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겉모습만 깨끗한 척 하지 말고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하십니다. 이는 자기 속의 있는 마음으로 구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그들은 탐욕과 악독으로 탈취한 것들을 회개하고 돌려주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구제'라는 말에 적합하게 자신들이 정당하게 모은 것에 대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마음의 깨끗함을 증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구제입니다. 생색내듯이 종교적인 의무감에서 행해지는 구제, 그러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인 양 말하는 것은 위선이고 외식입니다. 이상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속을 보신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외식하기 보다는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외식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요, 자기의 믿음 없음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을 보신다는 이 기본적인 지식과 믿음으로, 우리의 고귀한 내 인생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일순간이라고 귀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42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본래 구약에서는 곡식, 포도주, 기름과 같은 주요 농산물과 가축에 대한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27:30-33; 14:22-29). 물론 여기에는 땅 위에서 소출되는 모든 것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십일조를 아주 사소한 것까지 세분화하였는데, 심지어 박하와 운향 같은 것까지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는 동안 율법의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떤 규범을 필요 이상으로 확대하여 규정하는 것을 '울타리 치기'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뱀이 찾아와 하와에게 그에 대해 물었을 때 하와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고 말합니다. 먹지 말라고 하셨으니 그럼 만지지도 않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서 울타리를 친 것입니다. 아마 조금 더 나갔으면 보지도 말라고 했을 것이고, 반경 50미터 이내는 접근하지 말라는 식으로 갔을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이 울타리를 치는 것은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되지만 문제는 점점 그 울타리가 커져서 본질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했으니,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곡물과 열매의 십일조를 원하신다면 채소의 십일조도 드리면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되는 것이 되었고, 누구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규정을 세세히 지키느라고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더욱 중요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비본질이 본질을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타락한 심성은 율법에 의존하여 자기 의를 세우기 원합니다. 그래서 울타리치기를 하여 자기 의를 쌓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계명의 본질을 상실합니다. 이런 울타리치기를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일조가 필요 없다거나 그것 자체가 문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공의'(크리시스) '정의', '의로움'의 뜻으로 사회 정의와 관련된 말입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불의에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공의입니다. (82:3)

 

성경적으로 볼 때 십일조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3:8) 십일조를 드림으로 드리는 물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십일조는 이웃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었습니다. 특히 구약에 보면 십일조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생활을 지원하였습니다. 또한 성전 전반에 필요한 물질로 사용되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 생활을 성실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 결과 성전을 돌보는 레위인들이 유리방황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십일조는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셨다는 고백이 어디 구약 백성들만의 것입니까? 구약 시대에는 성전을 운영하고 레위인들의 생활비를 지원했다면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전임으로 섬기는 사역자들을 지원하고 전도와 선교를 위한 필요한 물질을 충당하는 것입니다.

 

45-54절에서 예수님은 율법 교사들에게 세 가지 면에서 화를 선포하십니다. 이는 먼저 그들이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그들은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문율법과 별도로 전해졌다는 구전율법도 지켰습니다. 율법 교사들은 그것을 613개 조항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백성들을 옥죄고 종교지도자들은 그들 위에 군림하였습니다. 자기들은 빠져나갈 구멍을 다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런 그들은 백성들로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 있는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지식의 창고를 열지 않았습니다. 자기들도 배우지 않고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미쉬나 규칙을 만들어 짐 지움으로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신앙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막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그들을 책망하신 점은 외식을 회개하지 않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무덤을 만들면서 마치 자기들이 선지자들의 정신을 기리는 척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3:29-31에 이 부분이 조금 더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자기들은 조상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은 무지하여 선지자들을 죽였는데 자기들 같으면 그렇게 안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생각 자체가 그들이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23:31) 그들은 마땅히 이렇게 말해야 되었습니다. "주님, 우리도 조상들과 똑 같은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선지자를 죽이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해주소서." 자기는 조상들과 다르다는 의로운 마음을 버리고 죄인된 마음을 가져야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기보다 지금 그들에게 오신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되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도리어 예수님께 거세게 달려들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은 조상들의 죄를 동일하게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볼 때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하는 자세를 점검해 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심한 책망을 받는 종교지도자들을 보면 "저 외식하는 자들, 교만하여 지식만 뽐내는 자들" 이라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로운 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나에게 주시는 것으로 받아 회개하는 것이 선지자를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12:1-7절에서 예수님은 마땅히 두려워할 자가 누구인지 가르쳐주십니다.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거세게 달려들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종교지도자들의 권한은 막강하였습니다. 그들은 실로 입법, 행정, 사법 모든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교권주의자들과 정면충돌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배경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4,5절입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이 말씀은 얼핏 보면 지옥에 던져 넣을 수 있는 하나님께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잘못 행동했다가는 지옥에 던져질 수 있으니 그런 벌을 받지 않으려면 세상의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에 기초하여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독재자가 아니십니다. 해적선의 선장과 같이 무엇이든지 변덕스럽게 임의로 행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분, 우리가 정말 영원히 행복하기 원하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 하나하나가 우리를 옥죄는 말씀이 아니라 모두 다 사랑으로 주신 계명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4절에서 이 말씀을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신다고 하십니다.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참새 한 마리도 아끼는 분이 우리를 아끼지 않으시겠냐고 하십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실 정도로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 분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5절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하나님은 절대권세자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십니다. 그 분은 인생들을 천국에 들어가게 하실 수도 있고 지옥에 들어가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하실 수 있는 심판권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지난 11장의 주기도문에서 배운 바와 같이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친구로 영접하십니다. 참새보다 더욱 귀한 자녀인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시되 머리털을 세는 섬세함으로 일거수일투족을 지키십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가 두려워해야합니다. 여기서 두려워한다는 것은 공포심을 갖고 얼어붙는 것이 아닙니다. 무한한 존경으로 경외심을 갖고 그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순복하는 것, 그것이 여기서 의미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절대 권세자 하나님을 경외할 때 세상의 그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내가 이미 최고 권세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었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주신 분이 그 분이신대 누가 빼앗아가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8:31b-34a 에서 말씀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사람들은 우리의 몸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끝이 아니며, 몸의 죽음이 인간에게 가장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육신 안에 거하며 사는 이 세상의 삶은 장차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삶에 비하면 지극히 초라하고 짧은 것입니다. 반면 영혼의 죽음은 영원한 멸망과 고통을 수반합니다. 세상의 모든 두려움은 절대 권세를 갖으신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온전히 극복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는 양면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자녀들이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아버지 품에 안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질 때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믿음이 바로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입니다. (22:12) 우리도 이러한 신앙에서 날마다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두려워하여 외식하지 않고 우리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생활하기를 기도합니다.

 

5:8-12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0절입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 말로 인자를 거역한 자는 용서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즉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그 죄가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무엇일까요? 성령을 모독하는 죄에 대해서는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2:31, 3:29, 12:10) 영어로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인데 모두 현재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을 모독한 적이 있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한 마디로 성령이 하시는 역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성령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죄가 무엇인지, 의를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16:8) 성령은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께 나아와 그리스도로 믿게 합니다. (16:14) 죄사함을 받게 하고 구원을 얻게 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거절하면 당연히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그리스도를 믿지도 못합니다. 성령 모독의 죄는 특별한 죄의 항목이 아닙니다. 죄를 책망하고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런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성령의 권능으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셨을 때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서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이 진리를 증거하시는 데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를 책망하셨을 때 거세게 항의하며 달려들었습니다. 이런 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죄의 책망, 진리의 빛을 거절하는 자는 결코 죄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스스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회개하면 그는 그 순간에 성령의 책망을 받아들임으로, 곧 성령을 훼방하지 않고 회개함으로써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저주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또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러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령의 책망 앞에 회개하고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에 비해 가룟 유다는 가책을 받았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을 거부하며 자기 길을 갔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항상 성령을 거슬러 회개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무슨 죄를 지어도 용서함이 있지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심을 증거하는 성령님을 끝까지 거부하며 모독하는 자는 용서함을 받지 못합니다.

 

제가 영국에 선교사로 있을 때 한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 소원이 많은 전형적인 영국 여대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성령을 모독하였기에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해요. 저는 지옥에 가는 것을 알고 있어요." 저는 그녀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첫째는 그녀가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죄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자기가 지옥에 간다는 말을 저렇게 쉽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교만과 무지를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당시 성령을 모독하며 회개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나중 소식을 모르겠지만 아마 어느 시점에 성령의 책망을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았으리라 믿습니다. 회개를 거부하는 그 순간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성령의 책망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나라를 허락하십니다. 이미 자녀된 우리는 지옥 심판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절대 권세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복하는 가운데 두려움 없이 이미 받은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