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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3년 사도행전4강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사도행전 4:1-31)2023-03-27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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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 4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말씀 / 사도행전 4:1-31

요절 /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늘 말씀은 지난 3장의 걷지 못하던 병자를 일으킨 사건을 매듭짓는 결론 부분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강력히 증거되었습니다. 하지만 또한 종교지도자들의 핍박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공회원들에게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분명히 증거합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되심을 새롭게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1.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1절입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이들은 당시 산헤드린 공회에 소속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자기들의 허락도 없이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자기들이 십자가에 내어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메시지를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사도들을 체포하였습니다(3). 당시 유대 공회는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최고형까지 언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체포하였지만 이미 날이 저물었습니다. 당시 공회법상 해가 지면 재판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어 두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핵심멤버인 베드로와 요한이 갇힘으로 복음 역사가 첫 시련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가운데도 저자의 코멘트가 어떠합니까? 4절입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남자들의 수가 오천이나 되었으므로 여자 신도 수까지 합하면 1만 명이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비록 투옥되었지만 그들이 전한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계속하여 역사하였습니다. 말씀이 무리들의 죄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매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고 역사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운동력이 있습니다. 전해진 말씀이 살아 역사하여 사람들의 심령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은 유대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쳤습니다. 2년 동안 날마다 말씀을 가르치며 제자양성에 힘썼습니다. 그랬을 때 바울은 거의 두란노 서원에만 있었는데 그 가르친 말씀이 아시아 전 지역에 퍼졌습니다. 말씀 자체가 세력을 얻고 흥왕하여져서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자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킵니다. 그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사야 55:10,11절은 말합니다. "10.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삭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11.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조용한 것 같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씨가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절대로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10:17).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암 캐리가 살던 18세기 말, 영국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미전도 종족도 알아서 구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세계 선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윌리암 캐리는 사람이 오직 복음을 들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윌리암 캐리가 인도 선교사로 나간 이후 허드슨 테일러 및 캠브리지 세븐, 미국 최초의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 등 수 많은 선교사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구원받을 사람들이 반드시 복음을 들어야만 한다는 열정에 불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변화의 능력이 있지만 말씀 전파를 위해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전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말씀을 통해 큰 은혜를 받은 우리가 이러한 전도자가 되기 원하십니다. 이는 의무가 아니라 우리의 소원이 됨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큰 은혜를 받은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 은혜에 강권되었기 때문입니다(9:16).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전하기 원하십니다. 억지로가 아니가 자원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 우리 자신이 더욱 은혜를 받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칠 때 우리 자신이 진리로 양육을 받습니다(딤전4:6). 다른 사람을 양육하는 것 같지만 우리 자신이 먼저 성장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됩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이 정체되어 있다면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말씀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양을 얻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한 명의 양을 가르치기로 결단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보내주십니다. 내 자신이 성장하며 또 생명의 복음을 나누어주는 이 은혜와 특권을 우리가 다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2.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강하게 되어

5절입니다.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그들은 위압적인 자세로 사도들을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 사도들은 공회의 권세 앞에 오금이 떨린 만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말합니다. 9,10절입니다. "9.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의 답은 그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나은 사람은 40세가 넘은 자였습니다. 그 나이면 나면서 앉은뱅이인 사람을 걷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는 치유의 영역이 아니라 창조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없던 근육과 뼈, 신경조직을 만들어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현대 의학은 다른 쪽에 있는 뼈나 피부를 이식할 수는 있지만 없는 것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죽은 신경조직을 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몸이 즉시로 온전해졌습니다. 일어나 걷고 뛰었습니다.  이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일을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셨다고 베드로는 증언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여 살아계신 분이요 그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 분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분을 믿고 사는 크리스천입니다. 세상에 고난과 환난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아무 염려와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을 만한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의 반석이요 산성이요 요새요 환난 날에 피난처가 되십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 하늘을 만드신 분을 의지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세상 사람들은 자신 만만하게 살아도 큰 환난이 닥치면 무너집니다. 최근에 어떤 분을 섬기기 위해 서울대 암병원에 몇 번 간 일이 있었습니다. 암병동에 계신 분들 보면 자신 만만한 분들이 없습니다. 다들 진지하고 숙연합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우리의 보장이요 환난 날에 큰 도움이십니다. 우리가 범사에 이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환난과 시련에도 우리의 든든한 구주가 되시는 주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길 기도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교권 아래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집을 짓고 있었는데 예수님이라는 돌은 자기들의 요구에 맞지 않았습니다. 이러 눕히고 저리 돌려도 다른 돌들과 맞지 않았습니다. "에이, 저리 버려!"하면서 쓸모없다고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돌은 하나님이 보내신 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기준으로 그 돌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돌을 영접하고 자기들을 맞춰나가야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버린 돌을 가져다가 새로운 집의 기초석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의 터와 모퉁이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분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그분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습니다. 깨어지고 가루가 되어 흩어집니다. 그 만이 인생의 진정한 기초요 방향이 되십니다.

 

3.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12절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이라는 말은 사소한 도움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각한 위험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낭떠러지에 떨어지기 직전에 세움 받는 것, 아이가 놀고 있는데 위 언덕에서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이 달려오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 그런 것이 구원입니다. 늪에 빠져 들어가는 데 목까지 찬 사람을 건져내는 것, 그런 것이 구원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모든 자연인은 죄로 말미암아 생명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 없이 살다 죽어 영원한 불 심판에 떨어지게 되는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히브리서 9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절대적인 위험입니다. 인류는 첫 조상인 아담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잠깐의 인생을 살다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는 위험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인간 스스로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외부에서 오시는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거짓 구원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참된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오신 그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강력하게 이와 같이 선언합니다.

 

다시 한 번 12절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베드로의 이 말은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그 외에 다른 어떤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에게만 구원이 있다! 예수에게도 구원이 있다가 아닙니다. ''가 아니라 ''입니다. 이 한 글자 차이 때문에 지난 2천 년간 기독교인들은 수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 한 글자 때문에 순교한 신자들이 수십만 아니 수백만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이점에 좀 유연성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 이슬람에도 구원이 있고, 불교에도, 힌두교에도 구원이 있어. , 물론 기독교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유대교에도 구원이 있어. 그러니 우리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 그러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다른 종교에는 진리나 지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자나 석가모니나 마호메트와 같은 자들의 사상이나 책이나 경전들을 보면 나름대로의 진리와 많은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살면서 겪는 어려운 문제를 잘 풀어가는 지혜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가 무식하고 기독교만 지혜롭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예수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에게만 구원이 있다! 현대인들은 이런 배타적인 선언을 싫어합니다. 이런 주장을 혐오하고 분노하며 많은 비난을 합니다. 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소위 포스트모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모던이라는 말은 '근대'라는 뜻이고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은 근대 이후 시대 즉 '현대 시대'를 말합니다. 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은 상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은 내게 옳은 진리이고 당신이 믿는 것은 당신에게 옳은 진리이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판단은 상대적인 것이니 상대방이 믿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이 믿고 있는 종교에 서로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표면적으로 볼 때는 합리적인 것같이 보입니다. 또 서로 다른 종교가 서로 존중하고 서로 배움으로써 인류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자는 것은 그럴듯한 말로 들립니다. 심지어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조차도 한 가지 종교만이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아집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종교 다원주의라고 하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시대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가톨릭은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회에서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예수에게 구원이 있듯이 이슬람, 불교, 힌두교, 유대교, 및 각 나라의 민간 신앙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우리 기독 신자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저도 개인적으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입장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입장을 따라야 합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말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 표현이 얼마나 강조적인 표현이냐 하면, 부정을 부정으로 하는 식, 곧 강한 긍정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오직 한 분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는 단지 베드로가 말한 것이라고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6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길, 진리, 생명 앞에는 영어로 보면 모두 정관사(the)가 붙어 있습니다. 내가 그 유일한 길이요, 그 유일한 진리요, 그 유일한 생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 분외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갈 자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성자 하나님이 하신 이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모든 겸손과 온유로 섬겨야 하지만 구원의 진리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낳으신 어머니는 한 분이지 두 분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집에 들어가는 열쇠는 비슷하게 생긴 많은 것 중에 맞는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내 컴퓨터에 여러 개 비밀번호가 다 작동이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왜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신가요? 그 답이 12절 하반절에 나와 있습니다.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셨나요?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중요한가요? 구원의 문제는 사람이 결정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결정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중보자, 유일한 속죄제물이 되십니다. 딤전2:5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단 한 분의 중보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다른 아들이 없으십니다. 하나 밖에 없는 그 아들을 세상에 제공하셨습니다.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십니다. 요한복음에만 50번 이상 나옵니다.(3:34, 4:34, 5:24, 5:30, 8:23)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 하늘로부터 이 땅에 보냄 받으신 분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 사실이냐면, 사람은 사람에게서 난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노예가 노예 자신을 자유케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형수가 스스로 살게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대가를 치르고 그를 자유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이런 한계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다른 종교가 구원에 있어서 실패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고 사람에게서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분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 오직 한 구원자를 보내셨습니다. 오직 한분이십니다. 그 분이 예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아무나 보내신다고 구속주가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시는 분은 모든 인간의 죄를 속량할 수 있는 가치가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사람의 죄가 얼마나 중합니까? 얼마나 심각합니까? 사람은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합니다(49:7,8). 온 천하를 주어도 한 사람을 대속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한 사람의 생명이 그 만큼 귀합니다. 이렇게 귀한 생명 한 사람만이 아니고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할 만한 그런 가치가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가 피 흘리심으로, 그의 생명의 값으로 이 땅의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치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 곧 예수님이 유일한 구세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는 약 18억 명에 달하는 무슬림이 있고, 힌두교인은 11억 명, 불교인이 5억 명이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이들이 구원 문제에 관해서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성경을 통해 선언하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물론이고, 공자와 맹자를 따르는 자들 약 2억 명, 민간 신앙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도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따르는 신념이나 사상, 의식이나 모든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데 전혀 무익합니다. 완전히 무능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 신, 창조주 하나님이 내신 생명의 길, 구원의 길입니다. 이 사실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해도 우리는 어쩔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겸손과 온유로 섬기되 이 진리에 있어서는 타협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습니다.

 

구원은 장차 우리가 죽으면 하늘나라에 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구원은 이 땅에서 받는 것이요,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순간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5:24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는 은행계좌에 입금이 되었다는 문자가 오면 내 통장에 들어온 것을 압니다. 은행에 가서 통장에 찍어보지 않아도 됩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이미 구원이 내게 주어졌습니다.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확정되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는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이 없는 신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나에게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내적 확신을 주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사망의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은혜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순간부터 우리는 구원 받은 삶, 구원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자유로운 삶입니다. 하늘의 기쁨이 넘칩니다. 소망이 넘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어 우리 심령에 사랑이 넘칩니다. 뜨겁게 서로 사랑합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 신자는 다시는 죽음을 맛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새 생명, 그 영원한 생명은 다시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가는 생명입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은 것은 우리의 의나 공로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셨기에 우리는 예수님께 가서 듣고 믿게 된 것입니다. 다만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죄인이기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늘 기억하기를 기도합니다. 일생 감사하며 유일한 구원의 길 예수님을 증거하기를 기도합니다.

 

23-31절을 보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에게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교회는 이 문제 앞에 합심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29) 그들은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 주님, 이 핍박이 없어지게 하옵소서." "핍박이 지날 때까지 저희를 숨겨 주소서"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들의 위협함을 살피시고 그들이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빌기를 다하자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해졌습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성령충만이 능력의 비결입니다. 

 

결론적으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립니다. 구원의 은혜 주신 것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이 은혜에 빚진 자로서, 캠퍼스의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구주 예수님을 힘써 증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