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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데살로니가전서 제3강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4:1-5:28)2024-02-26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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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이라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4:1-5:28

요절/ 데살로니가전서 5:16,17 


종로 2부는 이시대의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은 곳입니다. 전통적으로 국내뿐아니라 전 유비에프에 영적인 영향력을 주었고 믿음의 본을 보인 곳입니다 서울 전 지부를 개척한 모센타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 시대의 데살로니가 교인인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를 더 새롭게 하여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중국의 고전, 《시경》에 작자 미상의 시가 있습니다. 제목이 〈누군가 그리울 때〉입니다.

“칡을 캐며 임 생각하루만 못 봐도 석 달 같구나.쑥을 캐며 임 생각하루만 못 봐도 일 년 같구나.약쑥 캐며 임 생각하루만 못 봐도 삼 년 같구나.”

이 시는 ‘님’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그렸습니다. 

주님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면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주님에 대한 사무침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이 우리 삶의 중심이어야 합니다.


본문은  수미상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Inclusio라기도 하고 샌드위치 구조라기도 합니다!


본문의 핵심은 4장 16, 17절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을 중심으로 4장 3절과 5장 18절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로 싸여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이고 그에 대한 실천적인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레위기 19장에 거룩하라 하시고 그에 대한 세부적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레위기 19장 2절에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9,10절은 약자를 보호하라고 합니다. 11절에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18절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등등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 3장까지는 바울이 과거의 일을 회상하면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합니다. 그러나 4장부터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현재 힘써야 할 바가 무엇인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으니 더욱 많이 힘쓰라 합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로 만족하지 말고 계속해서 더 많이 투쟁하라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이것은 주 예수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준 명령이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입니까?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은 거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거룩이라는 단어가 830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거룩을 강조하십니다. 거룩이 무엇입니까? 거룩은 원어로는 카도쉬 곧 잘라내는 것을 말합니다. 구별된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거룩은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거룩에서 신령한 지혜가 나오고 영적인 파워가 나옵니다. 거룩한 삶을 살 때 신령한 기쁨이 있습니다. 거룩은 그 사람을 영광스럽게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을 호흡하는 감격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신자의 거룩은 “하나님으로 꽉 찬 상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 우리의 마음이 가득 채워질 때 우리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거룩을 손상시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음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하게 외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거룩을 위해서 음란을 버려야만 합니다. 거룩과 음란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음란’은 ‘포르네이아’로서 ‘포르노’의 어원입니다. 온갖 불법적인 성행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온갖 음란한 것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음란은 잠깐의 쾌락을 제공하지만 우리 영혼을 파괴시키는 무서운 암세포입니다. 그 배후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음란을 과감하게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거룩을 지킬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데살로니가서를 쓰고 있는 장소가 고린도입니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항구 도시로서 음란문화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마게도니야 지방에 위치한 데살로니가도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들어와서도 과거에 즐기던 음란을 계속해서 탐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것에 대해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7절에 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케 하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목적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반드시 음란과 싸워야만 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너무나 음란합니다. 청소년들은 너무나 일찍부터 음란한 것들 접하기 때문에 이제는 문제의식조차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의 자녀에서 빛의 아들, 낮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깨어 정신을 차리고 음란과 싸워야 합니다.   


4-6절까지 읽겠습니다.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우리들은 아내나 남편을 대할 때도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해야만 합니다. 생명의 유업을 같이할 동역자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만 합니다. 

6절에서는 분수를 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배우자의 울타리를 넘어서 다른 사람에게 육체적 욕망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형제를 해치는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온갖 매체를 통해서 불륜과 외도를 미화시킵니다. 얼마나 악하고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드릴라의 유혹에 넘어간 삼손의 비참한 모습을 보십시오. 두 눈이 뽑힌 채로 쇠사슬에 매어 맷돌을 돌리는 모습이 음란이 주는 결과입니다. 


8절은 거룩을 저버리는 것은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19절에서는 “성령을 소멸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음란을 버리고 거룩을 추구함으로 오히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야 하겠습니다(엡5:18). 


 9,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바울은 형제 사랑에 대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더 쓸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미 그들이 잘 실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족하지 말고 더욱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11,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당시 어떤 성도들은 극단적인 재림론에 빠져서 일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곧 주님이 재림하실텐데 직장생활을 왜 합니까?” 그렇게 하고는 배가 고프면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로 인해 덕이 되지 못하고 형제들에게 짐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삶이 아닙니다. 


13,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당시 성도들은 곧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기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자 실망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되는 자들은 너무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바울은 죽은 자를 자는 자라고 말합니다. 주안에 죽은 자들은 죽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나무의 잎사귀가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해서 마치 죽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죽은 것이 아니라 속에서 생명이 호흡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봄이 되면 새싹이 나고 다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신자들도 죽은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 생명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안심해도 됩니다. 주님의 재림하실 때에 우리는 신령한 육체를 덧입고 다시 태어나서 부활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다가 한 숨 푹 자고 주님이 재림하시면 깨어나서 주의 재림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재림 전에 죽는다고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예수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를 울리면서 강림하실 것입니다. “빵빠라 빵” 이 소리는 승리의 나팔 소리입니다. 우리 주님은 영광스런 승리자로 오셔서 우리를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그 영광의 대열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실 때는 비천한 말구유에 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때는 우리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서 지극히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심판자의 모습으로 영광과 존귀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수많은 천군 천사들을 대동하고 온 천지가 떠나갈 것 같은 나팔소리와 함께 오실 것입니다. 바로 그때 누가 가장 먼저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서 주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엘리야, 다니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등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육신을 덧입고 부활하여 영광 가운데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수많은 성도들도 다 공중으로 들어올려져서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 후에 살아 있는 자들이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져서 공중에서 주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토록 주와 함께 영광 가운데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 신자들에게 큰 위로와 참 소망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순례에 큰 힘을 주게 됩니다(18). 

5:1,2절에서는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바울은 재림의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쓸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2절을 말씀처럼 평안하고 안전하다 할 때 갑자기 오십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둑이 시간을 알려주고 오지 않습니다. 다들 긴장을 풀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나서 재물을 강탈해 갑니다. 주님도 사람들이 다 죄의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정신을 차려야만 합니다. 베드로후서 3:10-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거룩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돈과 명예, 인기와 쾌락에 목숨을 걸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면 다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날에는 오직 거룩과 경건으로 믿음의 중심을 지킨 자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지키기 위하여 영적인 무장을 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7,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사도 바울은 빛의 아들, 낮의 아들로 살기 해서 두 가지 무장을 언급합니다. 호심경과 투구입니다. 호심경은 우리의 마음을 보호해 주는 장비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여야 합니다. 

또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써야만 합니다. 투구는 머리를 보호해 주는 장비입니다. 사탄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헛 생각을 하도록 유도합니다. 이처럼 구원의 진리를 투구처럼 머리에 쓸 때 사탄의 송사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복음은 확실한 구원의 보장이 됩니다.

 

거룩한 삶은 성도 간에 덕을 세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함께 부르심을 받은 영적 동지들입니다. 때문에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피차 격려하며 힘을 주어야 합니다. 서로 단점을 지적하며 시기하기보다 서로의 장점을 발견해서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12,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여기서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은 모임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귀히 여기라”는 것은 “respect”로서 “존경하라”는 뜻입니다. 앞장서서 모임을 인도하는 목자님들을 존경하고 잘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질서가 바로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끝까지 감당하였을 때 하나님이 친히 다윗의 삶을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형제들 중에는 게으른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선배목자님들이 나의 허물과 약점을 감당해 주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음이 약한 자, 힘이 없는 자들을 격려하고 붙들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성장하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오래 참아 주어야만 합니다.

 

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세상은 철저하게 “give and take”식의 논리가 지배합니다. “내가 받은 만큼 갚아 준다” 그런 정신으로 삽니다. 그래서 세상이 삭막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달라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항상 선을 따라야 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까지도 용서하며 기도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이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의 사랑, 인내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이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16-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의 인생길이 만만치 않습니다. 힘들고, 화나고, 실망스럽고, 기분 상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때마다 감정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뭐라고 권면합니까? “항상 기뻐하라” Rejoice always! 기쁜 체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안 기쁜데. 짜증나고 화가 나는데. 우리가 현실만을 바라보면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롬8:28).

 

또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pray continually” 상황이 좋을 때 뿐 아니라, 안 좋을 때 더 열심히 기도해야만 합니다. 기도는 노동이지만 기도할 때 더 깊은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힘을 덧입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어떤 상황에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감사할 일이 있어야 감사하죠?” 그러나 감사는 저절로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찾아보면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 내가 세 끼 밥을 먹고, 두 발 뻗고 숨을 쉬고 잠을 자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위해 실패도 사용하십니다. 때로는 악도 이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크신 뜻 가운데 내 인생에 작품을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생활에 필요한 모든 연료는 성령께서 공급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20절에서는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언은 계시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또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을 멸시하지 말고 경외심을 가지고 영접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신명기 28장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경외하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서 축복의 단비를 풍성하게 내려 주십니다(신28:12).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멸시하고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비 대신 티끌과 모레를 내리셔서 파멸케 하신다고 경고하셨습니다(신28:24).

 

오늘날 유럽 교회들이 힘을 잃고 쇠락해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멸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에 대한 경외심과 절대성을 회복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21,22절을 봅시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여기서 헤아린다는 것은 좋은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2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바울의 마지막 기도이자 권면입니다.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철저히 거룩하게 해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다 거룩한 자들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온전히 거룩하게 되어야만 합니까? 우리가 주님의 정결한 신부로 준비되어 있으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끝까지 거룩을 지킨 순결한 신부로 주님을 맞이할 때 주님의 품에 안기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되고 힘든 나그네 인생에서 믿음으로 살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줍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24절을 봅시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우리는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연약해서 죄에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미쁘시고 신실하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끝까지 책임지고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25절에서 바울은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바울은 믿음의 백전노장이지만 겸손하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뿐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을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30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태도 마가도 누가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고 그 약속의 말씀을 복음서에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돌아오십니다. 이 소망을 간절히 사모하고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참으로 거룩한 삶을 사신 분이 많이 계십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분이 손양원 목사님이십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40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옥살이를 했고, 1943년에 출소했으나 그 후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해 5개월 만에 다시 감옥에 갔습니다. 손 목사님이 감옥살이를 할 때 불렀다는 ‘주님 고대가’에는 주님이 오시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애절하게 드러납니다.


1.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2. 


3.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4. 


5. 신부 되는 교회가 흰옷을 입고

기름 준비 다 해 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6. 



 손 목사님은 애양원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두 아들의 순교 소식을 접하고도 모든 예배를 정상으로 인도한 후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뜻이 계셔서 제 두 아들을 불러 가신 것으로 믿고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 두 아들을 죽인 사람, 그의 생명을 보존해주십시오. 제가 전도하겠습니다. 그가 그대로 지옥에 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저에게 그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10가지 감사제목을 발표하였습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장례예배는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장례식 후에 감사헌금 1만 원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렸습니다. 당시 손 목사님의 한 달 사례비는 80원이었습니다. 1만원은 목사님의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손 목사님은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자로 삼아 손재선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고, 나중에 목회자로 키워내는 사랑의 기적을 이룹니다. 

이런 감동적인 삶의 모습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에 별로 관심이 없을까요? 혹시 주님이 주신 선물로 인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요? 너무나 안일하고도 평안한 삶 때문인가요? 신부된 우리가 저희 신랑되신 주님이 영광가운데 오시는 것을 사모하여야 되지 않을까요? 저희 모두가 주님오시는 것을 갈망하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 곧 작은 예수님, 작은 손양원들로 살 수 있길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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