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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부활절 특강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1-34)2025-04-20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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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부활절 특강 1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으리라


말씀: 고린도전서 15:1-34

요절: 고린도전서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Happy Easter! 기쁜 부활절 아침입니다. 여러분, ‘주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R.C. 스프로울은 “그리스도인에게 매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다”라고 했습니다. 지난 주 출애굽기 말씀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유월절과 무교절을 기념하고 기억하고 지키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부활절’로,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살아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모든 주일이 주님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매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해야 합니다. 주일은 십자가의 형장에서 죽임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추모하는 날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예수님을 경험하는 날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형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도 우리 가운데 항상 함께 하시기에 현재형입니다. ‘어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오늘 부활하셨고, 내일 재림하시는 것처럼 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우리는 매 주일 부활의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진 우리의 예배는 매주가 축제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우리가 부활 신앙에 깊이 뿌리 내리길 기도합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여기서 ‘알게 한다’는 것은 remind, 즉 ‘다시 기억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이미 고린도 성도들이 부활의 복음을 받았고, 그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굳게 붙들지 않았습니다. 헛되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잘 안다고 하였으나 어떤 면에서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화평의 복음을 전하였으나 ‘나는 바울파’, ‘나는 아볼로파’ 하면서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중에서도 없는 음행이 현재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부활의 복음을 굳게 붙들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2절에 보면 ‘그로 말마암아 구원을 받기’때문입니다. 부활은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이 어찌 믿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믿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활을 믿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첫번째, 성경의 근거입니다. 3,4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냥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 예언된 대로 된 것입니다. 


시편16:10절 “이는 내 영혼을 스올(무덤)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했습니다. 또한 죽은 자의 부활도 성경에 이미 예언되었습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사26:19). 누가복음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절망에 빠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셔서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눅24:25-27).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에 대해 곳곳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의 진리입니다. 성경의 목표는 부활입니다. 


두번째, 예수님의 부활에는 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5-7절에 보면 부활의 증인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게바(베드로), 열 두 제자, 오백여 형제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모든 사도등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게바는 예수님이 붙잡히시던 날 밤, 여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랬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180도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여종이 아니라 예수님을 잡아 죽인 제사장들의 위협 앞에서도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20)며 담대히 증거하였습니다. 열두 제자 중 도마는 어떻습니까?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며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사 “너의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하시며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후 예수님의 열 두제자들이 어떻게 생을 마감했습니까? 요한만 빼고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다 순교하였습니다. 만약 부활이 지어낸 이야기라면, 어느 누가 거짓을 증거하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리겠습니까? 또한 예수님은 오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바울이 이 서신을 쓸 때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약 20여년 지난 때였으므로 오백명중 대다수가 살아있었습니다. 법정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 손들어 보세요.’ 하면 적어도 300~400명이 손든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에게 보이셨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어렸을때부터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혈육이 “살아난 그 분, 바로 내 형이야. 맞아~.” 이렇게 증언한다면 믿을만 하지 않겠습니까? 


세번째, 바울 자신이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8절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유산되거나 낙태된 자를 말하는데, 그 당시 욕으로서 바울의 대적자들이 바울의 못생긴 외모를 놀리거나 모욕감을 주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추정합니다.(고후10:10) 그는 자신이 받던 이 모욕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와 결부시킵니다. 심술궂게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한량없는 은혜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시고 쓰신 그 은혜를 나타내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사도라 칭함 받을 자격도 없고 사도중에 가장 작은 자입니다. 지금까지 이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많이 수고하면 할수록 자기 몫을 주장합니다.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손해의식, 피해의식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아무리 많이 수고를 했다 해도 ‘오직 은혜’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도 장차 부활할 것이고, 부활하면 다 보상받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런 수고를 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나고서 인생관, 가치관, 소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수많은 증거를 제시하였습니다.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고린도 성도중에는 부활을 믿지 못하고 다르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2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왜 그들이 이런 주장을 할까요? 헬라 문화권인 고린도에는 죽음과 사후에 관한 여러 종류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특히 헬라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영혼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은 육체로부터의 해방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플라톤(Plato)은 “영혼은 육체에 완전히 고정되어 용접되어 있다. 그런데 죽게 되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고 했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 쾌락주의자)는 “죽음으로 한 인간의 존재는 완전히 끝난다.”고 보았습니다. 신비 종교는 “신과 연합하여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얻고, 죽음 후에도 영혼의 지속적인 삶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헬라인은 이원론을 믿었는데, “물질은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 따라서 죽은 악한 몸은 다시 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몸의 부활도 없고, 죽은 후에는 오직 영혼만이 존재한다.” 한편 고린도 교회의 신비주의자는 “영적 부활은 이미 일어났고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천사와 같이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을 보면,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믿는 자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다며 바울이 그들의 주장은 악성 종양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정하지만 성도의 미래의 부활과 몸의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이처럼 여러가지 헷갈리는 설들로 인해서 교회가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리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아무도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다 쓸데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이 헛것이며 우리는 다 거짓말쟁이가 될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교회에서 ‘예수 부활하셨다’고 가르치니까, 부활절을 기념하니까 ‘그냥 믿는체 하자’, ‘그냥 믿어주자’ 이러면 어떻게 됩니까? 굳이 이렇게 좋은 날씨에 여기 앉아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인생 살아도 왜 이렇게 재미없이 삽니까? 이런 날 야외 소풍도 가고, 학생들 시험이 내일이니 공부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거기에다 헌금까지 들고 와서 바칠 필요가 있을까요? 또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저건 하지마라’ 교회의 가르침이나 목자의 지시를 따라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금 메시지를 전하는 저나 듣고 있는 여러분이나 만약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이보다도 더 멍청한, 바보 멍충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다 함께 20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아멘. ‘그러나 이제, But now.’ 저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그러나’ 중에서 본문에 나오는 ‘그러나’가 가장 위대한 ‘그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날씨 좋은 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예배 보러 온 여러분, 세상에서 피와 땀을 흘려가며 번 돈을 하나님께 헌금하는 여러분, 어찌하든지 거룩하게 살아볼려고 몸부림치는 여러분, ‘그러나’를 통해 여러분이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복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인류는 다 죽음 앞에 패배자였습니다. 그 어떤 영웅호걸도 죽음 앞에서는 다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도, 징기스칸도, 불로초를 구하던 진시황도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다 사망에게 패배했습니다. 삼성의 창업주 고 이병철회장이 폐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죽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나 억울하고 분했습니다. 의사에게 자기 재산 절반이라도 줄터이니 제발 조금이라도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망은 인류의 조상 아담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범죄함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그 후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 죽음의 고리를 끊고자 하는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아무도 죽음의 고리를 끊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첫 번째 승리자, 첫 번째 주자가 되셨습니다. 그 뒤로 수많은 부활의 열매, 부활의 승리자가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사람은 반드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22절을 읽겠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여기서 삶은 영원한 삶, 영원한 생명, 영생을 말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안에는 영생, 즉 부활 생명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내 것이 됩니다. 요일5:11-13절은 말합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즈음 의료 기술이 많이 발달하고 좋은 약들이 많이 나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자신과 먼 이야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때만 해도 홍역이나 폐렴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나의 바로 윗 누나도 홍역을 앓다가 어린 나이에 죽었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현재 의학의 발달로 많이 줄었습니다. 반면 우울증, 공황장애, 두려움, 걱정 근심 염려로 자살 충동을 겪고 있는 사람이 폭증했습니다. 거대한 죽음의 세력이 노인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에게까지 뒤덮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아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됩니다. 그러면 삶을 얻게 됩니다. 밝고 희망찬 삶, 기쁘고 즐거운 삶, 행복하고 영원한 삶,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 도전하는 7전 8기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역동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다 함께 저를 따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사 우리에게 영생과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23-26절은 부활의 차례에 대해 나옵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예수님이 맨 처음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예수님께 속한 우리도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됩니다. 그때 모든 악한 통치자와 권세자들을 다 멸하실 것입니다. 맨 마지막에는 사망이 멸망받게 됩니다. 계시록 20장에 보면, 사망을 불 못에 집어 던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날에 만유가 회복되어 하나님은 만유의 주로서 경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무너진 창조질서가 회복될 것입니다.


29절 말씀부터는 부활의 실제성을 말해줍니다. 당시 일부 신자들 중에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친구나 친척들을 위하여 대신 세례를 받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 옳다, 그르다를 말할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행동의 이면에는 부활을 믿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 아니냐는 반문인 것입니다. 또 부활이 없다면, 바울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면서 살겠느냐(30)?며 되묻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는 복음을 위해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31).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맹수 같은 반대자와 싸웠습니다. 반대자는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내가 왜 굳이 이런 무모한 일을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처럼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했을 것입니다(32).”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죽을 각오를 하고서 주와 복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부활이 있기 때문이고, 그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속지 말라고 합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쾌락주의자, 물질주의자, 육신주의자. 이들은 악한 동무들입니다. 언뜻 보면 이들이 화끈하고 멋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에게 있는 열정을 어디엔가 쏟고 싶은데 쏟을데가 없어서 썩어질 것을 위해 쏟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죄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장차 무서운 심판과 영원한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악한 동무들의 배후에 사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속지 맙시다. 3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하나님이 약속한대로 장차 심판이 있고 부활이 있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깨어 의를 행합시다. ‘의를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고자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웁시다. 요일3:2,3절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우리가 주의 날까지 결혼을 앞둔 신부처럼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데 정진하기를 기도합니다. 


요즈음 제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묵상할 때, 요12:24 말씀이 제 생각 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은 저의 평생 요절 말씀인데, 근래 주님이 가신 길과 나의 삶을 돌아보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힘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시로 쓴 것이 있는데 한번 낭독해 보겠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아아브라함)


내 평생의 요절인 / 요한복음 12장 24절을 곱씹고 곱씹으며 / 지난 사십 년 세월 / 저는 열매를 맺고자 하였습니다.

나를 죽여 / 생명을 낳고 생명을 얻고 / 생명의 번성으로 / 세상을 충만케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니 / 보이는 열매 미미하고 / 석양빛 백미러에 / 초라한 내 모습만이 보입니다.

잠에서 깨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 지난 사십 년 세월 / 내가 죽었던 게 아니라 / 예수가 죽었던 것입니다.

그 생명의 씨가 / 날마다 죽어가는 내 육체 속, 내 영혼 깊은 곳에 깃들여 / 날마다 부활의 새 아침을 갈망하며 / 나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지난날 나와 함께 했던 / 그 사랑, 그 생명을 감사하며 / 어제보다 부드러워진 공기를 느끼며 / 오늘 아침 출근길을 재촉합니다.


요즈음 프로야구가 개막되어 프로야구 보는 재미로 산다는 분이 있습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는 날, 특히 9회말 투아웃에서 역전해서 이기는 날은 너무나 기쁠 것입니다. 그 기쁨을 간직하고자 프로야구 하이라이트를 몇 번이고 재생하여 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이 사망에게 승리한 날입니다. 그동안 인간에게 왕 노릇하던 죽음이 패배한 날입니다. 그 어떤 날보다도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이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아직도 아담 안에 머물러 있는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부활의 믿음 안에서 생명과 풍성함과 넉넉히 이기는 삶을 누리길 바라며 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