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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6년 마태복음11강 지혜로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마태복음 7:13-29)2026-06-01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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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11강

 

지혜로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

 

말씀/ 마태복음 7:13-29

요절/ 마태복음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오래 간 만에 마태복음 말씀으로 돌아왔습니다. 앞의 내용을 잠시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앞서 예수님은 산상수훈 말씀에서 천국 백성의 높고 거룩한 의의 기준을 제사하셨습니다. 마음 속의 미움과 음욕이 곧 살인과 간음이라고 하시며, 마음으로도 죄를 짓지 말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이 말씀 앞에, 우리는 솔직히 무겁고 낙담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짐을 지우려고 이 말씀을 주신 게 아닙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되니,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천국 백성으로 살아갈 힘과 지혜와 생명을 공급 받으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산상수훈 말씀은 우리를 절망시키는 무거운 율법이 아닙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부어주시는 하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딜지언정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산상수훈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산상 수훈의 결론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문, 두 가지 나무, 그리고 두 가지 집의 대조를 통해 참과 거짓을 비교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비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의 중요성에 일관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 삶에서 실천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말씀을 실천하는 데에는 자기 부인의 투쟁과 일시적인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지혜롭게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떠한 사람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인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13, 1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문 (gate) 이란 무엇입니까? 문은 집이나 어떤 길로 들어서는 통로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주로 사는 아파트의 문은 크기가 별 차이가 없습니다. 50평 아파트나 20평 아파트나 들어가는 문의 크기는 비슷합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큰 집과 작은 집은 대문 크기에 비례하였습니다. 커다란 문은 큰 집을 의미하였습니다. 그 큰 문을 통해 들어가면 그 안에 넓은 집이 있고 온갖 좋은 것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허리를 굽히고 작은 문을 통해 들어가면 작은 쪽방이나 사랑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큰 문을 통해 들어가기는 쉽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걸머지고 들어가도 됩니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갈 수 있습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넓은 길이 펼쳐집니다. 길이 평탄합니다. 곳곳에 인생을 엔조이할 수 있는 장소도 많습니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화려한 드레스나 고급 모피를 입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물건을 거의 가지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간 후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협착하고 꼬불꼬불한 길입니다. 잘못 발을 디뎠다가는 옆의 고랑으로 굴러 떨어지기 십상인 길입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 에 보면 순례자가 천국 문에 들어가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련을 겪습니다. 핍박과 유혹을 받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옆으로 미끄러지는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원수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는 좁은 문, 좁은 길을 가기 위해 참으로 온갖 고생을 다 합니다.


이상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좁은 문은 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당연히 넓은 문으로 들어가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넓은 문은 넓은 길로 인도하지만 그 결국은 멸망이요, 반면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면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문과 길은 과정을 의미합니다.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통로입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입니다. 우리는 멸망 받는 지옥 대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천국으로 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속지 말아야 합니다. 좁은 문이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좁은 문’ ‘좁은 길’, 즉 상대적으로 소수만 간다고 해서 다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은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은 자기들이야말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오직 144,000 명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하나님의교회’나 ‘신천지교회’ 신자들도 자기들이 좁은 길로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좁은 문”, “좁은 길”은 무엇을 말합니까? 마가복음 8:35절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은 주와 복음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배우며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삶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진리를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세상에서 인기가 없습니다. 왕따를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길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가 넓은 길로 가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그리로 갑니다. 그러나 좁은 길로 가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힘써야 합니다. 한번 결심을 하고 좁은 문에 들어갔다고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협착한 좁은 길을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하여 가야합니다. 그런데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항상 힘든 것만은 아닙니다. 좁은 길을 가면서 우리는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참쉼과 자유와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좁은 길을 믿음으로 끝까지 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2.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15절을 보십시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후에 제일 먼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을 물리치지 않고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란 하나님으로 부터 영적 권위와 메시지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으로 자기를 하나님의 종으로 치장하여 미혹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생명을 얻게 하는 좁은 문, 좁은 길을 인정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멸망으로 향하는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평안하다, 평안하다”라고 말합니다. 요즘 우리에게 익숙한 버전으로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합니다. 그 길을 계속하여 걸어가라고 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절대로 양을 늑탈하는 이리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양의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겉모습은 온유하고 겸손하게 보이나 그 속에는 자기들만을 위한 야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의 대적자들이요 오직 자기 탐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데 급급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거짓 선지자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포도나무에 포도가 달리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달립니다. 이는 자연의 법칙입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거짓 선지자들은 온갖 아름다운 말로 가르치지만 그들의 삶의 열매를 보면 그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어떻게 됩니까? 찍혀 불에 던져집니다. 그러면 여기서 열매는 무엇을 말합니까? 이는 "실생활" 을 가리킵니다. 사람의 참 모습은 그들의 화려한 언어나 신앙 경력으로 알 수 없습니다. 오직 그의 열매 곧 진실한 내면을 반영하는 실제적인 삶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가르침은 그 사람의 거짓됨을 드러냅니다. 열매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의 예를 드십니다. 21-22 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예수님을 "주" 라고 고백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그러한 고백은 믿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롬 10:9-10).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고백이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이 없이 입술로만 "주여 주여" 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 날, 곧 최후의 심판의 날에 많은 자들이 예수님께 말할 것입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22절에는 "주의 이름으로" 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는 그들이 아주 확신 있게 주님의 종으로 행세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종이라는 신분을 내세우며 말씀을 전하고 심지어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그들이 주님의 진실한 종이요 참 선지자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이방인을 쓰셔서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나타내시기도 하십니다. 또한 그들의 어떠한 마술적이고 감정적인 작용으로 신비한 능력이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병든 자들을 다만 불쌍히 여기사 일방적으로 치유의 은혜를 베푸실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천국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23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불법이란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곧 말은 그럴싸하게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율법의 대강령은 사랑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의 동기와 목적이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의 야심을 위하여 양들을 이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었고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교리적인 지식을 아는 것을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지식적으로 많이 안다고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교리를 아는 것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신학교를 졸업하였어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는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교리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과 사귐이 있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많은 성경 지식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고, 종교적인 열심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사귐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기도 생활을 통해서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더욱 가까이 하며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참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겉모습은 경건하게 아주 헌신된 제자처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진실한 사랑의 관계성이 없으면 우리도 언제든지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업적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심판의 날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가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리로 올라와서 너에게 예비된 상을 받으라” 하는 말씀을 다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예수님은 이제 산상 수훈의 결론을 내려주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여기서 “나의 이 말”은 좁게는 5장부터의 산상수훈 말씀을 가리키며, 넓게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산상 수훈 말씀을 주신 것은 단지 듣기 좋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메시지를 시로 적어 집이나 센터에 걸어 놓으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산상수훈이 아무리 아름다운 메시지라 할지라도 듣고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사람처럼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러면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사람이 왜 지혜롭습니까? 이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비와 창수와 바람이 그 집을 사정없이 때립니다. 그 집은 무너지지 않는데 이는 집의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입니다. 반면에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어떠한 자와 같습니까? 그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 그 집은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게 됩니다. 집이 무너지는 것은 벽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내장재를 고급으로 쓰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기초가 약해서입니다. 기초를 잘 놓는 것은 건축의 기본입니다. 집을 짓는 사람은 누구나 공학적인 계산을 하여 기초공사를 먼저 든든히 합니다. 그래야 그 집이 오래가고 강풍이 불어도 끄떡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기초공사를 잘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기초를 놓는 것입니까? 이는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이론적인 신앙이 아니라 실제적인 믿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실천하는 가운데 주님의 말씀이 참됨을 깊이 체험합니다. 그는 세상의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믿음의 비밀을 날마다 깨닫습니다.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이러한 실제 삶에서의 체험적인 믿음은 인생의 위기의 때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믿음으로 승리하며 더 큰 믿음의 증거를 얻습니다. 그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머리로만 알고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결정적인 문제 앞에서 믿음으로 행하지 못합니다. 불신에 빠져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도 못합니다. 더욱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실천이 동반되지 않는 말로만의 믿음은 헛된 믿음이요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한 믿음은 유사시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이 말씀을 볼 때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것인가를 보게 됩니다. 그는 사상누각, 곧 앞으로 무너질 집을 열심히 쌓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들과 같이 되지 않고 말씀에 구체적으로 순종하므로 인생의 기둥에 철근을 하나씩 하나씩 박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지막 때에 모든 두려움을 이기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체험에 기초한 믿음이 없으면 마치 아기를 낳을 때가 되었는데도 낳을 힘이 없는 자 같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잘 들을 뿐만 아니라 실제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믿음의 사람들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역사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 지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때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별로 눈에 보이는 역사가 없는 캠퍼스의 현실 앞에 낙담이 됩니다. 그래서 비밀스런 계시를 말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는 등 많은 권능을 행하는 일들에 마음이 끌립니다. 우리도 그러한 화끈한 일들을 하여 사람들을 많이 모으고 뭔가 신바람 나는 역사를 이루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늘 말씀 공부하고 소감 쓰고 1:1 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들에게 주신 최고, 최선의 삶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더디게 보인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개인적인 믿음의 체험을 하며 성장하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 복음역사가 쉽지 않지만 이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더 빼어난 말씀의 종들이요 일당백을 할 수 있는 영적 용사로 키우시고자 하시는 뜻이 있음을 믿습니다. 결국 물질주의, 쾌락주의의 밤이 깊어갈수록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수 있는 성경 선생을 필요로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서 있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말씀 후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며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였습니다. 바람 후에 지진이 있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지진 후에는 불이 있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셨습니다.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세미한 소리는 작고 고요한 소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의 역사나 땅을 갈라지게 하고 악인들을 삼켜버리는 지진의 역사나 악을 다 불태워버리는 불의 역사를 기대합니다. 그러한 크고 가시적인 역사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생각하기 쉽고, 세미한 음성 가운데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무시하기 쉽습니다.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이러한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 가운데 임하심으로 그가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 음성을 마음을 다해 순종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음성에 순종하였을 때 그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요, 말씀의 종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 같은 위대한 종들을 세우는 제자 양성 역사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삶은 인생의 기초를 든든히 놓는 것입니다. 이는 인생들에게 주신 가장 축복된 삶의 방향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실제적인 삶에서 순종할 때 믿음을 체험합니다. 그 체험이 쌓일 때 우리는 믿음의 거목으로 성장합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자신을 구원하고 이 시대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자 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