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마태복음 12강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8:1-17 요절/ 마태복음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지난 5~7장은 예수님이 전하신 아름다운 산상수훈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8장과 9장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이 나옵니다. 10개의 이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 9개가 치유에 관한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4:23,24에서 이미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셨다는 기록이 있지만, 구체적인 치유 기록으로는 오늘 말씀이 처음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영육간에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전하신 후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2절입니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절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당시 나병은 불치병이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병으로 여겼습니다. '벤허' 영화를 보면 나환자들이 어느 동굴 속에 모여 살고 있습니다. 벤허는 자기 어머니와 누이를 찾기 위해 그 동굴 속을 두루 다닙니다. 나환자들은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그런 곳에서 지냈습니다.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서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아람 사람 나아만 장군이 나병에서 나은 것 같이 자기도 나을 수 있겠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낫고자 하는 강렬한 소원을 갖고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왔습니다. 절하며 간구했습니다.
2b입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랍비'(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나환자는 예수님을 '주'(Lord), 곧 자기의 주인이요, 자신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권능자로 불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는 그의 믿음의 고백임과 동시에 간절한 요청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병이라고 알려진 그런 병을 앓고 있는 자기를 예수님이 기꺼이 고쳐주시고자 하실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킬 수도 있는 분별없는 행동을 했다! 율법을 어겼다!” 하시며 책망하시지 않을까 염려도 되었습니다. 그는 다만 "주여, 원하시면.." 하며 긍휼을 구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3절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와 접촉한 자는 그와 동일하게 부정한 자로 취급되었습니다. (레11:40, 민5:2) 제사장도 회복증명서를 받기 위해 나온 나환자들을 눈으로 보기만 하였지 그 몸에 손을 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율법을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냥 말로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라고 하셔도 되었지만 그 나환자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원합니다. 서로의 휴먼 터치를 필요로 합니다. 이 나환자는 오랫동안 홀로 지내며 사람의 손길을 그리워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의 손길은 참으로 그의 모든 외로움과 슬픔을 날려버리는 사랑의 손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I am willing).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그를 무시하고 그냥 자기의 길을 갈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그의 말을 그대로 받으셔서, 그가 묻던 식으로 답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오! 아무렴, 내가 원하고 말고.. 네가 낫기를 나는 원한다!") 예수님의 이 한 말씀으로 그의 마음에 있는 모든 정죄의식이 다 사라졌습니다.
저는 본문에서 "내가 원하노니.. I am willing.." 이라는 말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심히 부담스럽고 죄악된 우리를 예수님이 받아주실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냥 무시해도 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 은혜를 구하였을 때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하며 받아주셨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를 영접하여 섬겨주셔서 우리가 이제 조금 사람답게 되었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하사 우리를 받아주신 이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언제나 감사하며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깨끗함을 받으라" (Be clean!) 그러자 즉시 그의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회복되었습니다. 눈썹이 다시 났습니다. 피부는 어린아이같이 깨끗해졌습니다. 불치의 나병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나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병을 낫게 해주신 것으로 끝나지 않으십니다. 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제사장에게 그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레위기 14장에 보면 이런 경우 드려야 할 예물은 새 두 마리,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입니다. 이러한 것을 드리며 제사장으로부터 나병에서 치유되었다는 증명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유대 공동체에 들어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상의 사건에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 예수님의 나병 치유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나병이 낫는다는 것은 다 망가진 피부와 연골과 신경조직, 힘줄이 다시 재생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의학으로도 한번 파괴된 신경은 회복시킬 수 없습니다. 누가 말 한마디로 나병에서 온전히 낫게 할 수 있습니까? 오직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십니다.
마태복음은 AD 60년 정도에 기록된 문서입니다. 저자 마태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보고 들은 바를 약 30년 후에 직접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30년 전에 있었던 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마태가 직접 본 나병 치유 사건이 기록되어 지금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던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할 때, 예수님이 나병 환자를 고쳐주신 이 사건 하나만으로도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많은 지식이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믿고자 하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의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둘째, 8, 9장에 기록된 9가지의 치유 사역의 첫째가 나병환자 치유입니다. 나환자는 하나님께 나아오기 가장 어려운 사람입니다. 낫기가 가장 어려운 병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첫번 째로 치유되어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는 그 누구에게도 희망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께 나아오면 치유함을 받고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 아래서 행하신 두 번째 이적은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5, 6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예수님은 갈릴리 전도의 근거지였던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한 백부장이 나아왔습니다. 당시 백부장은 실전 경험이 많은 자로 자기 수하에 100명의 부하를 거느린 로마 장교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힘을 숭상한 제국이었습니다. 겸손, 온유 같은 것은 노예들의 미덕이라 하여 멸시하였습니다. 당시 백부장은 식민지 백성에게 임의동행명령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자기 하인에게 가도록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합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예수님을 주(Lord)라고 고백합니다. 당시 군인들의 주는 로마 황제였습니다. (Caesar is the Lord.) 그러나 그는 “Jesus is the Lord,”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요 자기 하인을 고쳐줄 수 있는 권능자로 믿고 고백한 것입니다.
당시 종은 사고 팔수 있는 걸어다니는 물건과 같았습니다. 종이 병들면 주인은 그냥 내다 버리고는 하였습니다. 사무엘상 30장을 보면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아말렉 사람들을 추격하던 중, 사흘간 먹지 못한 한 애굽 소년을 발견합니다. 그는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는데 그가 병들자 사람들이 그를 버리고 간 것이었습니다. 종이 중풍병에 걸리면 효용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돌봐주느라 수고만 될 뿐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백부장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불쌍히 여겼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백부장이 하인의 고통을 같이 느끼고 있음을 봅니다. 그는 자기 하인을 그저 일만 하는 종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고 어찌하든지 낫게 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기뻐하셨습니다. 그의 집으로 가서 고쳐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백부장은 무슨 말을 합니까? 8, 9절입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의 집이면 그래도 허름하지 않은 괜찮은 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마치 로마 황제가 온다면 자기 집이 너무 누추해서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런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말씀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저 한 마디만 하시면 그가 나을 테니 굳이 오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중풍병도 그에게 순종하여 나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놀라운 이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하여 하늘로서 오는 다른 이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이방인지만 놀라운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백부장이 예수님의 권세를 이해하게 된 데에는 그의 군인으로서의 경험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로마 황제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또한 자기 밑에 군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역 만리 로마에서 황제의 명령이 전달되어 오면 즉시로 복종하였습니다. 전투에 출동하라고 하면 출동하였습니다. 로마로 오라고 하면 명을 받아 즉시로 갔습니다. 자기도 수하에 군사들이 있어 그들에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왔습니다. 절대 복종하였습니다.
오랜 전에 북한의 김신조 일당이 경기도 일대의 높은 산들을 타고 청와대 근처까지 왔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 지역을 맡고 있던 7사단의 한 대대장이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간첩들이 타고 들어올 수있는 지역의 나무를 다 베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즉시로 산 능선을 따라 나무를 다 베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연대장은 그렇게 하면 우리 군인들이 은폐할 숲이 없기에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다시 나무를 심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다시 즉시로 순종하여 나무를 심었습니다. 군인들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합니다. 베라고 하면 베고 심으라고 하면 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백부장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질병도 다스리시는 절대 권세자이시다. 다만 명령만 하시면 그 병이 순종하여 하인에게서 나갈 것이다”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현상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로 확대하였습니다. 그의 통찰력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0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예수님은 백부장의 대답을 듣고 놀라셨습니다. 예수님도 놀라시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 예수님도 놀라십니다. 예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백부장의 믿음에 크게 놀라신 것입니다. 이 놀라심은 사실 기뻐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을 놀라게 한 믿음의 예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말합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며 즉시 중지하도록 하였습니다. (창22:10,11)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을 놀라게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본문의 백부장도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믿음에 있어서 이 백부장을 신약의 아브라함이라고도 부릅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이러한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보지 못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십니다. 11, 12절입니다.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특권 의식이 강하였습니다. 믿음의 3대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들의 후손이라는 것만으로 자기들은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반면에 이방인들은 모두 지옥의 불쏘시개감이 될 거라고 멸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주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이 멸시하는 이방인들이 도리어 조상들과 함께 천국에 앉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본 자손들, 곧 유대인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바깥 어두운 데란 영적인 절망과 죽음이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지옥에 던져져 슬픔과 원통함과 심한 고통으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유대인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심으로 그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갖기를 바라셨습니다.
13절입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이를 볼 때 믿음이야말로 주님의 능력을 받는 통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수지의 물을 받을 때 호스의 굵기가 크면 많이 받고 작으면 적게 받습니다. 믿음도 그러합니다. 믿음이 크면 많이 받고 믿음의 적으면 적게 받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고난 앞에 엎드러집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그런 어려움을 통해 선을 이루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인내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가 믿은 대로 하나님이 선한 뜻을 이루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성공이냐 실패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실패를 통해서라도 믿음을 배우면 성공인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고난과 시련의 때에 하나님을 더욱 믿습니다. 감사해합니다. 대장간에서 쇠가 달구어져 더욱 단단하게 되듯이 더욱 믿음이 단단한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우리가 시련을 잘 이기는 가운데 단단한 믿음의 사람들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베드로의 원래 고향은 벳세다였는데 그가 나중에 가버나움으로 이사하면서 어부 생활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가서 보시니 그의 장모가 열병이 걸려 누워있었습니다. 의사인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중한 열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눅 4:38) 어떤 사람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그물도 버리고 집을 나가서 장모님이 홧병에 걸렸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갈릴리 호수 지역은 온도가 높고 요단 계곡에 습지가 많았기 때문에 말라리아성 고열이 아닌가로 추측합니다.
어쨌든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으로 몸이 뜨거웠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녀를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만지셨습니다. 그러자 곧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그녀는 곧 일어나서 예수님을 수종들었습니다. 여기서 수종들었다는 것은 음식으로 섬겼다는 뜻입니다. 그녀의 병 나음이 즉각적이고 완전한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3가지 (나병, 중풍병, 열병)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나왔는데 그 모든 치유의 공통점은 즉시, 완전히 나은 것입니다.
16절입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날이 저물자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여기서 귀신 들린 자는 영적 또는 정신적인 병에 걸린 사람들을 말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매우 힘든 세상을 살면서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미신과 우상숭배로 정신적인 병을 앓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다 영접해 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들도 다 고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상한 의사처럼 도우시고 낫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루 종일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산에 오르사 산상 수훈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사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또 가버나움으로 오셔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집에 심방하셔서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날이 저물어 쉬셔야 했지만 몰려든 많은 무리들을 일일이 섬기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병자들의 아픔을 깊이 동정하시고 치료하시는 예수님을 볼 때 저자 마태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17절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당시 사람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고대했습니다. 자기들을 로마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하고 과거의 다윗 왕국과 같은 강대국을 만들어줄 메시야를 대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는 그런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인생들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는 메시야이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병자들을 치료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메시야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여기서 “담당하시고”라는 말은 원어적으로 "대신 취하다" "고통을 참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의 질병과 고난을 대신 짊어지신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 53:4a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 (KJV 'griefs' '비탄', '마음의 근심이나 고통')와 슬픔을 대신 지셨습니다. 그래서 비탄의 사람, 슬픔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때로 양들의 인생 문제를 들어줍니다. 그들의 아픈 상처들을 들으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듣고 나면 심신이 지칩니다. 마치 양들의 아픔과 상처가 나에게 전해진 것 같은 피곤함을 느낍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들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보시고 이 세상의 삶은 잠깐이니 그저 하늘나라의 소망을 두고 참고 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건강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져 주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영육간에 건강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연약함과 병의 근본 원인은 죄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슬픔과 상처가 치유함을 받습니다. 연약함과 질병이 치유됩니다. 이 땅에서 강건함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이러한 은혜를 덧입기 위해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본문의 나병 환자나 백부장의 종이나 말씀으로 치료해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영접할 때 성령께서 치료의 광선을 우리 내면에 쏘아 치료해주십니다. 그럴 때 점점 내면이 강건해집니다. 내면이 강건해질 때 육체도 강건해집니다.
그러면, 이러한 예수님의 은혜를 덧입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로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양들의 연약함과 병을 대신 짊어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하고 기술적으로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실제 삶에는 내적인 아픔과 상처가 많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점점 개인주의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관계성을 맺기 힘들어하고 점점 스마트폰 속으로만 들어갑니다. 이런 시대에 감기, 독감으로 끙끙대며 앓아눕기도 하지만, 영적인 병으로 슬프고 아픈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기심으로 인해 외롭고, 인생의 무의미로 인해 낙심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과 같이 양들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는 목자들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모님의 일과를 보면 아침 일찍부터 양들을 위해 기도하며 말씀을 가르칩니다. 양들을 심방합니다. 그 분이 하는 일은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을 돕는 일입니다. 이런 그는 밤에 집에 돌아가면 쓰러져 잠이 듭니다. 왜 그렇게 사는가 스스로 묻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그렇게 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쉽고 편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지금도 연약함과 질병으로 고통하는 이 시대의 청년들의 소리를 들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우리도 양들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는 사랑의 목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육적, 영적 질병을 담당하시는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날마다 강건하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이 주님을 믿고 날마다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로 영육간에 강건해지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연약함과 질병 가운데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목자의 삶을 살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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