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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6년 마태복음13강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마태복음 8:18-34)2026-06-1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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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13강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말씀 / 마태복음 8:18-34

요절 / 마태복음 8: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지난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 사역을 보았습니다.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고, 백부장의 하인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먼 곳에서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도 열병에서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해 질 무렵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귀신 들린 자, 병든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마태는 이 모습을 보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증거합니다. “그는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고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고통을 짊어지고 회복시키러 오신 구원의 주님이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 놀라운 사역 이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지만 예수님은 그 자리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건너편으로 가자.”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인지, 그리고 그 길을 따르는 제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에서 만나는 풍랑과 영적 전쟁 가운데 우리가 붙들어야 할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제자로 키우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배우는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 주변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무리들이 에워쌌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저분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분이야!” “저분 곁에만 있으면 병도 낫고 문제도 해결돼!” 수많은 사람들이 연호하였습니다. “예수~”, “치료자”, “예수~”, “문제 해결자”, “예수~”, “우리의 왕”. 보통 이렇게 인기가 올라가면 어떻게 합니까? 그 자리에 더 머물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박수를 즐기고 싶습니다. 더 많은 추종자를 모으고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건너편으로 가자.” 제자들은 의아했을 것입니다. “왜 떠나십니까?” “지금이 기회 아닙니까?” 사람들은 더 많은 기적을 기대했고 제자들은 더 큰 성공을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환호보다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야 할 곳이 있었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군중보다 제자들을 바라보셨습니다. 본격적으로 제자 훈련을 하시고자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단순히 많은 사람을 모으는 것으로 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를 통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배를 타려 하자 한 사람이 다급히 나아왔습니다. “예수님, 잠깐만요.” 그는 서기관이었습니다. 당시 서기관은 성경을 필사하는 일 뿐만 아니라 성경을 연구하고 율법을 가르치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성경교사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도 서기관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열정적인 눈빛으로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어디든지 따르겠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제자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야, 훌륭하다. 이런 사람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만약 우리 교회에 국민대 교수님이나 판,검사, 공위공직자, 대기업CEO, 요즈음 뜨고 있는 삼전닉스에 다니시는 분이 등록하여 예배에 참석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동역하고 싶다고 한다면 얼마나 기뻐하며 환영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20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의 열정 뒤에 숨겨진 문제를 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영광을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성공적인 사역을 꿈꾸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의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길입니다. “네가 정말 내가 가는 길을 알고 있니? 영광만 보고 따르려는 것 아니니? 내가 가는 종착지가 십자가인데, 거기까지 함께 할 수 있겠니?” 묻고 있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감동이나 열정만으로 따라갈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가를 지불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의 동료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배척할 때, 그리고 그가 서기관 세계에서 왕따 당할 때도 예수님을 따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 속에는 복음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실 때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이라는 뜻이 아니라 다니엘서에 나타난 메시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인자는 영광의 왕이시지만 동시에 고난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제자의 길은 쉬운 길이 아니지만 가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안다면 그 길을 넉넉하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잠시 후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였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주님, 먼저 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 보면 매우 이해되는 요청입니다. 부모를 돌보는 것은 성경이 명령하는 중요한 책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부모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족을 버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선순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러 오신 분입니다.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장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긴급한 것은 영적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산 자는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건너편으로 가고자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혈연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 귀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깊은 관계를 보여주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피보다 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명입니다. 혈연은 이 땅에서 맺어진 관계이지만, 소명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목적 가운데 맡기신 부르심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 아버지 집을 떠나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내려놓고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찾아 혈육의 아버지 집을 떠나 여러 고을을 방문하시며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마침내 자기 사랑하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권세를 가지고 있었으나 스스로 십자가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만 본다면 이 얼마나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는 행동입니까? 그러나 이 일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에, 예수님은 그 어떤 희생도, 그 어떤 고난도, 그 어떤 아픔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본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또한 우리에게 큰 울림이 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론 희생이 있고, 오해가 있고, 손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사명이 있기에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밀물처럼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떠나는 것을 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때는 열심히 따릅니다. 병이 나을 때, 원하는 일이 이루어질 때, 축복을 받을 때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 부인을 말씀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말씀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떠나가는 사람들의 뒷 모습을 바라보시며 열두 제자들에게도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대학생 여러분, 그리고 3040목자님들, 예수님을 따를 때 오는 희생과 오해와 어려움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지금 우리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내가 얻을 유익입니까? 아니면 생명의 주님입니까? 생명의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손해 심정이 들지 않고 감사하며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의 올바른 자세를 가르치신 후 바다 건너편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뒤따라 올랐습니다. 처음에는 순조로웠습니다. 배는 잔잔한 갈릴리 바다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24절을 읽겠습니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여기서 ‘큰 놀’은 단순한 파도가 아닙니다. 원어로 ‘세이스모스 메가스’(Seismos Megas)인데 지진처럼 크게 흔들리는 거대한 폭풍으로서 ‘큰 떨림’을 의미합니다. 갈릴리 바다에 익숙했던 어부 출신 제자들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폭풍이었습니다. 거대한 파도가 배를 덮쳤습니다. 물이 배 안으로 밀려 들어왔습니다. 배는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 같았습니다. 평생 바다를 경험했던 어부들도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결국 외칩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런데 그 급박한 아수라장 속에서 제자들이 목격한 것은 믿기 힘든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평온하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사방을 집어삼킬 듯한 폭풍 소리도 주님의 평안을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은 온 우주를 붙들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요동치고 환경은 변해도, 하나님의 뜻과 신실하심은 결코 흔들리지 않기에 주님은 폭풍 한가운데서도 안식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탔다고 해서 풍랑이 피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함께 가는 그 순종의 길 위에도 질병의 풍랑, 관계의 풍랑, 경제적 결핍과 사역의 풍랑은 찾아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내 인생을 덮친 풍랑의 크기가 아닙니다. ‘그 배 안에 누가 계시는가’입니다.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은 바다를 꾸짖기 전에 먼저 제자들의 심령을 바라보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진짜 무서운 폭풍은 바다 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건너편에 무사히 도착하게 하겠다는 창조주의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신실하신 주님의 약속보다 눈앞에서 날뛰는 파도를 더 크게 보았습니다. 주님이 곁에 계셨음에도, 그분이 진정 누구이신지 알지 못했기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사납게 불어치던 바람과 성난 바다를 향해 꾸짖으셨습니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을 내던 광풍이 일시에 멈추었고, 배를 집어삼킬 듯 솟구치던 파도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습니다. 거칠던 갈릴리 바다는 마치 거울처럼 잔잔하고 평온해졌습니다. 지난 주 선교보고하셨던 김아브라함 선교사님과 점심 식사 교제를 하였는데, 선교사님의 전공이 해양토목공학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으셨고 육사에서 교수로 재직하신 해양토목공학의 전문가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본문의 이 부분을 질문하였습니다. “바람은 금새 그치게 할 수 있지만, 어떻게 파도를 즉시 잔잔하게 할 수가 있죠. 잔파가 남지 않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그러자 김아브라함 선교사님께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 방법은 “파도의 에너지를 완전히 제거하면 바다가 즉시 잔잔해진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의 말씀 한마디로 폭풍의 모든 에너지를 순식간에 제거하신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의 공포에 떨던 제자들은 이제 전혀 다른 종류의 두려움, 곧 거룩한 경외감에 사로잡혀 서로를 바라보며 속삭였습니다. 27절을 읽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그들은 이제야 예수님을 완전히 새롭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교훈을 주시는 좋은 선생님이나, 병을 고치는 치료자 정도가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자연 만물과 창조 세계를 말씀 한 마디로 복종시키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론 우리 인생에 풍랑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그 풍랑을 허락하신 목적이 우리를 무러뜨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욥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를 단련하여 순금 같이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풍랑의 진짜 이유는 그 폭풍을 통과해야만 예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깊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수없이 배가 파선하고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는 인생의 여러 풍랑을 겪었습니다. 그 속에서 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고 외쳤습니다. 바울에게 축복은 고난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예수님을 더 깊이 아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풍랑이 전혀 없는 안락한 상태가 아닙니다. 폭풍 한가운데서도 문제보다 크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바다의 사건은 또한 우리에게 한 가지 비밀을 더 속삭여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늘 혼돈과 저주, 그리고 죽음의 공포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깊고 어두운 바다조차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삼킬 수 없었습니다. 마치 요나가 바다에 던져져 밤낮 사흘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으나 죽음의 권세에 갇히지 않고 살아난 것처럼, 사망은 결코 생명의 주님을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연합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은 제자들에게 있어, 이 땅의 고난과 육체의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잠시 자는 ‘잠’에 불과합니다. 폭풍이 아무리 거세어도, 우리는 결국 주님이 약속하신 저 건너편 본향에 안전하게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선교사 목자 수양회에서 멕시코 이디모데선교사님의 선교보고가 참으로 은혜로웠습니다. 선교사님은 1992년부터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개척 역사를 섬기시면서 하나님의 축복속에서 사역이 확장되었고, 선교센터도 구입하였고, 양말 공장도 잘 운영되어 사업도 번창하였습니다. 그런데 2015년 광풍이 몰아닥쳤습니다. 멕시코 정부 7개 부처가 합동 조사한다며 운영하는 공장에 들이닥쳤습니다. 멕시코의 양말계의 황제라고 스스로 말하고 다니던 정부의 한 차관이 선교사님의 공장을 아주 없애버릴 음모가운데서 이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언론에는 매일 가짜 뉴스들이 올라왔습니다. 공장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네, 한국 기술자가 여자 종업원을 추행하여 아이를 낳게 했네, 어린 아이들에게 족쇄를 채워 일을 시키는 이상한 사진까지 올려서 음해 하였습니다. 평소 소심한 성격이셨던 이디모데 선교사님은 자기 이름이 국제적인 신문에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서 자기를 위대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임을 알고서 감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무릎꿇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멕시코에 왔을 때 저는 봉제 미싱 한 대 밖에 없없었습니다.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주님이 주셨고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이것을 모두 가져가시더라도 주님은 이제까지 저와 함께 해 주신 것처럼 저를 계속 지켜주실 것이기에 저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다만 그것을 감당할 만한 믿음을 주십시오.” 그리고 자기를 음해한 그 정부 관계자가 하나님을 알게되고 회개하고 국가와 국민을 섬기는 종으로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태가 바뀌어서 200여명의 직원들이 나서서 가두 시위를 벌이며 정부와 언론이 거짓말을 한다고 기자회견을 하면서 진실이 밝히짐으로서, 이제 여론은 정부를 비난하는 쪽으로 쏠렸습니다. 선교사님은 하나님의 승리를 믿었기에 조용히 있엇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나중에 이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는 이디모데 선교사님을 향하여 “당신은 참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일을 당하면 자살하기도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선교사님은 수양회 선교보고하면서 힘주어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 주님은 크시고 강한 분이십니다. 모든 세상 권세 위에 계십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은 그 권능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풍랑을 거치면서 얻게 되는 가장 큰 하나님의 축복은 바로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체험하고 아는 것입니다. 


거친 폭풍을 뚫고 배가 마침내 육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곳은 건너편 가다라 지방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바다의 폭풍보다 더 참혹한 영혼의 폭풍 속에 살아가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옷을 벗은 채 무덤 사이를 떠돌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사납고 위험하여 세상 사람들은 일찌감치 그들을 포기했고,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 버림받은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 곳에 오셨습니다. 군중의 환호를 버리셨고, 제자들의 불신앙을 견디셨으며, 그 무서운 갈릴리의 광풍을 뚫고 이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 세상은 효율성을 따지며 쓸모없다고 버린 인생이었지만, 예수님에게는 이 두 영혼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상한 갈대도 꺽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보자 그 분이 누구신지 귀신 같이 알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귀신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 앞에 벌벌 떨었습니다.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길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라’ 이 명령 한 마디에 귀신들이 떠나갔습니다. 그 비참했던 인생들은 순식간에 온전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연 세계뿐만 아니라 영적 세계까지 호령하시는 만왕의 왕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이 눈물겨운 구원의 역사 뒤에 씁쓸한 장면이 이어집니다. 그곳 마을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두 사람이 회복된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돼지 떼가 몰사하여 입은 재정적 손실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제발 우리 동네에서 떠나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들은 눈앞에 구원자를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였고, 재물에 눈이 멀어 생명의 주인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여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완고함을 드러냄으로 본문은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오늘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내 삶의 안락함을 희생해서라도 기꺼이 따라야 할 영원한 생명의 주인입니다. 바람과 바다를 잠재우시는 창조주이시며, 영적 어둠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탄의 결박에 묶여 죽어가는 비참한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광풍이라도 뚫고서라도 찾아오시는 사랑의 구원자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따르면서 만나는 인생의 풍랑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내 삶을 뒤흔드는 폭풍의 크기가 아니라, 내가 지금 누구와 함께 배를 타고 있느냐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거친 파도 속에서 비로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아, 내 주님이 바로 이런 분이셨구나!” 풍랑 속에서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 그것이 제자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임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그분을 깊이 알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얻고, 그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며, 마침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영광스러운 사명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는 눈앞에 펼쳐지는 파도 너머에 계신 주님을 신뢰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제자의 복된 걸음을 끝까지 걸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