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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6년 마태복음14강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태복음 9:1-17)2026-06-2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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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제 14 강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 마태복음 9:1-17

요절/ 마태복음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8,9장에는 10개의 이적이 나옵니다. 그중 9개가 병을 치유하는 이적이라고 지난번에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8장에서는 예수님이 나병과 중풍병, 그리고 열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도 잔잔케 하시고 귀신 들린 자들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이 정도의 이적을 보더라도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 곧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9장에서는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이 더욱 분명히 나타납니다. 한 중풍 병자를 고치시면서 그의 죄를 사해 주십니다. 9장 후반부에는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죄인을 불러 사함을 주시고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을 만나길 기도합니다. 


1,2절입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성경 말씀은 매우 압축적으로 기록된 경우가 많습니다. 방금 읽은 1,2절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고, 본 동네, 곧 가버나움에 도착하시고, 중풍 병자가 나아오고, 그 병자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일이 한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쓴 글은 다른 사람들의 환심을 얻고자 합니다. 사람들의 동의를 구합니다. 그러나 성경 기록은 ‘user friendly’하지 않습니다. 단순하면서도 직설적입니다. 신적인 권위로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겸손한 자세로 말씀을 받지 않으면 걸려 넘어집니다. 


지난 8장 후반부를 보면, 예수님은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지방 사람들은 이를 마땅히 기뻐하고 예수님께 감사해야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려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자기들의 돼지 산업에 타격이 생길까봐 예수님이 떠나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성자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오신 일생 일대의 기회를 얻었지만, 눈 앞에 있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 굴러 들어온 복을 차 버렸습니다. 


여하튼 이에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본 동네에 이르셨습니다. 가버나움에 도착하시자 마자 누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얼마 전에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주셨기 때문에 큰 소문이 났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그가 침상에 누운 채 데리고 나아왔습니다. 이 사건은 마가복음 2장과 누가복음 5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 왔을 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수부대 출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2차원에서 안 되면 3차원의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드라마틱한 방법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런 기사를 빼고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이는 마가와 누가는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강조한 반면에 마태는 오직 예수님의 죄 사함의 권세에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이 조금씩 다른 것은 성경의 진실성을 말해줍니다. 같은 사건을 본 사람들이 인상 깊게 받은 내용이 각각 다른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보셨습니까?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믿음"에서 ‘그들’에는 중풍병자도 포함됩니다. 그가 믿음으로 동의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께 나아 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은 그분 자체를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믿음은 상대방과의 관계성에서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6절도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무어라고 하십니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작은 자"는 NIV 영어성경에 보면 'son'으로 되어 있습니다. 원어는 "테크논"(τέκνον) 인데, 꼭 자기 아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손윗 사람이 아래 사람을 다정하게 부를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다정하게 영접하여 주셨습니다. 또한 "안심하라" 하신 것을 볼 때 중풍병자의 마음에 불안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떤 점에서 불안하였을까요? 당시 중풍병과 같은 장애는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제자들이 길가에서 구걸하는 맹인을 보고 에수님께 묻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요9:2)  그런 분위기 가운데 중풍병자는 많은 사람들 앞에 침상에 누운 모습 그대로 나왔을 때 자의식과 정죄감으로 불안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안심하라" 하시며 그의 불안을 제거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이 떨어지는 순간 그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를 괴롭혔던 두려움과 정죄감이 사라졌습니다. 마음에 큰 평화가 임했습니다. 이는 그에게 임한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는 당초에 중풍병에서 낫고자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먼저 죄 사함을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는,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큰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당하던지 일단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주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고 간구하십시오. 믿음으로 그분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우리가 생각하는 바보다 더욱 큰 은혜를 주십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 새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죄 사함을 받는 방법은 짐승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속하고자 할 때 소나 양을 드렸습니다. 제사장이 짐승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짐승에게 안수를 하고는 자기가 죽여야 되었습니다. (레1:5) 죽인 후 제단에 바쳐 불에 태우는 일 등을 제사장이 하였습니다. 그러한 짐승 제사를 드리고 나서야 제사장은 죄 사함을 선포했습니다. 그러한 죄 사함도 일시적이었기에 죄를 범할 때마다 다시 제사를 드려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짐승 제사를 드림으로 죄 사함을 받는 시대는 갔습니다. 짐승 제사보다 탁월한 제사를 단번에 드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는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이 죄 사함은 완벽하고 영원합니다. 다시 드릴 제사가 없습니다. 우리의 주님을 믿는 믿음 하나를 보시고 죄 사함 주시고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죄 사함의 은혜가 주어졌는데 이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절입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한다고 보았습니다. 신성을 모독한다는 것은 영어로 blasphemy (헬라어로 blasphēmia)인데, 그 뜻은 하나님을 모욕한다, 또는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높인다는 것을 말합니다.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인간인 예수가 죄 사함을 선포하니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신성 모독이라고 비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서기관들의 마음도 꿰뚫어 보셨습니다. 4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왜 서기관들의 생각이 악한 것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신령한 메시지를 전하시고 병자들을 낫게 하시는 전대미문의 이적들을 행하시는 것을 듣고 보았습니다. 이런 그들은 마땅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무조건 불신하며 트집을 잡아 넘어뜨리고자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서기관들이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십니다. 5절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리라" 라고 말하는 것이 쉽습니다. 이는 누구나 말로는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은 그 병을 고치는 능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결과가 금방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는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병 고치는 것은 당시의 사도들이나 오늘날 뛰어난 현대 의학으로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죄를 용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죄를 사하는 것이나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는 것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요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결과가 눈에 명확히 보이는 병 나음을 통하여 자신이 죄 사함의 권능이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6절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예수님이 명령하시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7절입니다.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중풍병자가 즉시 일어났습니다. 자기 매트리스를 접어 어깨에 메었습니다. 걸으며 뛰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상의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죄 문제는 인간의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세상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단 한가지 문제인데 그것은 죄 문제입니다. 죄는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부패된 마음에 역사하여 여러 가지 악한 일을 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이러한 죄의 영향과 충동을 받아 온갖 악을 행하는 일로 가득 차 팥죽 끓듯이 부글부글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못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상 수많은 철학자들, 사상가들이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지 못하였습니다. 죄의 해결은 단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그 대가를 치러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해결 받기 위해 자기가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둘째는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사죄권은 하나님에게만 있고 사죄는 하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상에서 사죄권을 행사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그의 속죄의 은혜를 믿을 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즉시 사해주십니다. 예수님이 죄를 사해주시는 권능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사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은 단지 이론적인 것이 아닙니다. 중풍병자가 병에서 나음 받아 일어나듯이 죄 사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AI 시대가 되면서 취업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닙니다. 제가 아는 영국의 옥스포드를 졸업한 한 청년도 수 년간 취업을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 회사에서는 당장 회사에 이익을 줄 수 있는 경력직을 신입사원을 구합니다. 월급은 신입 기준으로 주고 경력있는 사람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는 청년들에게 무슨 경력이 있겠습니까? 이런 시대에 청년들은 안정된 직장을 얻는 것이 급선무같이 보입니다. 그 절박함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 청년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 가장 중대한 문제는 여전히 죄 문제를 해결받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 죄 문제를 해결받는 길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사죄의 권능자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주님께 나아오는 자를 이 땅에서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 예수님께 나아가 죄 사함 받기를 기도합니다. 죄의 세력 가운데 죽어가는 캠퍼스 양떼들을 이번 여름 수양회에 초청하여 사죄의 권능자 예수님께 인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9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당시 세리가 얼마나 악명 높은 죄인으로 취급받았는지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세리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보통 이런 사람을 제자로 삼지는 않습니다. 제자 그룹의 평판도 문제가 되고 제자 그룹 내에 갈등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내면을 보셨습니다. 인생의 방향을 잃고 세리로 살아가는 그의 고뇌와 좌절감을 보셨습니다. 그가 방향만 잘 잡으면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그의 잠재력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그를 불쌍히 여기사 부르신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마태는 예수님의 이런 부르심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다음 장 10장을 보면, 예수님이 12사도를 세우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마태는 그 이름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어떤 특징이 보이시나요? 마태는 12 사도 중 자기 이름 앞에만, 보통 사람 같으면 일부러라도 숨기고 싶은 자기의 전직, 곧 세리였음을 밝힙니다. 이는 그가 일생동안 예수님께서 세리였던 자기를 부르신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도 과거 핍박자요 훼방자였던 자기를 부르신 예수님의 은혜를 일생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교만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떤 가운데 구원을 받았는지를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부르심을 기억하고 겸손을 유지하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요 복을 받는 길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여 일어나 따랐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따른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돈 잘 버는 세리 직업을 버리고 이제 풀타임으로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이는 억지로 결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쁨으로 잔치를 벌입니다. 10절입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여기서 죄인들은 공인된 죄인들로 창기, 포주, 건달, 잡범 출신의 사람들입니다. 그야말로 그 시대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요 바리새인들이 결단코 상종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과 같이 앉아 계십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잔치에서 예수님이 웃지 않으셨다면 말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인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잔치를 즐기셨습니다. 이 잔치는 마태의 송별회였습니다. 그는 동료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간 부족한 저를 도와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제가 섭섭하게 한 일이 있으면 다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로 새 인생을 살고자 하니 성원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런 죄인들의 모임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보고 기겁을 합니다. 11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님이 그런 죄인들과 식사를 하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고 이단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들으시고 말씀하십니다. 12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예수님은 세상에 건강한 자와 병든 자가 있다고 하십니다. 그 의미는 실제로 건강한 자가 있다고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한 자는 자신이 병이 들었는데도 스스로 생각하기를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병든 자는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께 나아와 치유함을 받고자 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성경은 선언합니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 (롬3:10) 성경은 인간의 죄인됨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모든 자연인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라서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설사 하나님을 알아도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 수도 없고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은 상태, 그것이 인간이 죄에 처한 모습입니다. 이런 실존을 인정하고 겸손히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들이 병든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영적 눈을 뜨게 하는 신적인 빛을 비추어주십니다. (고후4:6) 하나님을 사랑하는 새 마음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 자기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나아오는 자들을 치료하시는 영적 의사로 오셨습니다. 


13절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이는 호세아서 6:6절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호세아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제사도 잘 드리고 절기도 지켰습니다. 그러나 실제 삶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그러했습니다. 거짓말과 속임수로 사회적 불의가 만연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제사만 잘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교의식보다 하나님과의 진실된 사랑의 관계성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앞의 8장에서도 예수님이 어떤 메시야이신가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대망하는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시는 메시야이십니다. 이 메시야 예수님의 마음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십니다. 때로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반역한 죄인들을 그냥 버려두셔도 되셨을텐데, 그냥 죄의 대가를 치르도록 영원한 형벌에 두셔도 되셨을텐데, 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애를 태우셨을까? 왜 심지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하셨을까?“ 왜? 이는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 가운데 심판받아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우리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단지 동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불쌍히 여겨 인생들의 슬픔과 고통에 동참하시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미국 선교사님들 중에 1912년에 광주에 오신 서서평 선교사님 (Elisabeth Johanna Shepping, 1880–1934) 이 계십니다. 당시 조선은 일제강점기 초기였고, 가난한 여성, 과부, 고아, 나환자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분은 한국 백성을 심히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는 가난한 조선인의 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고,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13명의 고아를 입양하여 직접 키웠습니다. 과부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어머니가 되어 주었습니다. 나병 환자들을 찾아가 돌보고 섬겼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긍휼을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가 54세에 소천했는데, 그녀의 장례식은 매우 이례적이었습니다. 수많은 입양하여 키운 고아들과 과부들, 가난한 여성들과 병자들과 걸인들이 장례 행렬을 따라가며 통곡했습니다. 수천 명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따라 나와 '어머니, 어머니'를 부르며 통곡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단순히 "선교사"가 아니라 "우리 어머니"로 여겼습니다. 그녀가 남긴 유산은 동전 7전, 강냉이 가루 2홉, 담요 반 장이었습니다. 그녀의 묘비와 삶을 가장 잘 요약하는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Not Success, But Service" 그녀의 생애는 한 마디로 예수님의 긍휼을 실천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도움이 필요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긍휼입니다. 자비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기뻐하십니다. 긍휼의 마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긍휼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이번 Helen Park 선교사님의 장례를 섬기면서 이분이 얼마나 양들에 대해, 또 그의 자녀들에 대해 긍휼의 마음으로 섬겼는가를 깊이 배웠습니다. 아무 요구 없이 사랑하는 마음, 변함없는 그 마음, 아낌없이 자신을 드린 그 긍휼의 마음이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닙니다. 긍휼입니다. 우리가 긍휼의 사람, 긍휼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4절입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래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당시 요한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러한 금식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를 의아히 여겼습니다. "우리와 바래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5) 예수님은 제자들이 지금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신 혼인 잔치에 있는 것과 같기에 그들이 금식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앞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들을 떠날 때 그들은 금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전통에 기초한 낡은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 생명력이 충만한 복음을 영접하기 어려운 것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16,17) 낡은 부대는 발효력이 강한 새 술을 담지 못합니다. 생명력이 넘치는 예수님의 복음은 낡아지지 않은 새로운 심령, 새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의미하는 새 마음은 긍휼의 마음입니다. 긍휼을 잃어버린 마음이 낡은 가죽부대입니다. 우리는 비록 육신은 낡아지지만 마음은 늘 새로워져야 겠습니다. 늘 죄 사함의 권세자 예수님께 나아가 우리의 딱딱한 마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죄 문제를 들고 주님께 나아가 사함을 받고 날로 더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이 긍휼의 마음으로 죄 가운데 죽어가는 이 시대 양들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