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여름수양회 5강 예수님의 부활 말씀 / 요20:1~29 요절 / 요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수양회 준비 기간 한 청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 말씀은 나랑은 관련이 없는 거 같아요’ 청년들 입장에서 부활은 내 삶과 무관한 먼 미래의 이야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십자가와 함께 복음의 중요한 한 축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은 먼 미래의 이야기를 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내 삶의 한계와 절망 앞에서 이제는 끝이라고 믿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시는 지극히 현실적인 복음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깊은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마리아,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제자들, 의심 가득한 도마, 이들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완전히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믿었을 때 죄 사함을 받은 것처럼, 부활의 복음을 믿을 때 부활의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되어 현실의 한계와 절망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시간 ‘부활의 복음’의 의미를 알고 나에게 주시는 복음으로 심령 깊이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제 1 장. 마리아야 1절을 보십시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해가 뜨기 전 아직 어두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각 무덤에 가는 것은 남자에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마리아가 무덤에 도착했을 때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습니다. 장정 여럿이 힘겹게 옮겼던 그 큰 돌이 옆으로 옮겨지고 무덤 입구는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예수님의 시신이 옮겨졌다는 말에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집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무덤을 향해 달렸습니다. 처음에는 둘이 함께 달렸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랐습니다. 요한이 무덤에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시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시신이 없었습니다. 대신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가 놓여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시신을 옮겼다고 했는데, 그러면 세마포를 벗겨 놓고 피범벅이 된 시신만 옮겼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덤 안의 모습은 누군가 시신을 옮겼다기보다는 스스로 일어나서 자리를 정리하고 몸만 빠져나간 모습에 가까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 왔습니다. 그는 요한과 달리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도 시신이 없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또 하나 발견한 것은 머리를 쌌던 수건이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베드로가 무덤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보고 요한도 뒤따라 들어갔습니다. 빈 무덤을 살펴 본 그의 소감이 어떠합니까?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한은 빈 무덤과 그 내부의 모습이 가리키는 진실, 곧 예수님의 부활 가능성을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만 그 믿음은 완전한 부활신앙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9절 말씀에서 아직은 성경에 기초한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음을 부연 설명합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리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성경에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빈 무덤을 통해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고, 나중에 성경 말씀을 통해 그 믿음이 온전해졌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0,11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두 제자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리아는 여전히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잃은 슬픔이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울면서 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방금 전까지 없었던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하나는 예수님의 시체 뉘었던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마리아는 천사를 보고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습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겼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마리아는 여전히 예수님의 시신을 누군가 옮겼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하고 구부렸던 몸을 뒤로 돌이켜 보았습니다. 무덤 밖에는 예수님이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이번에도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마리아는 천사도 못 알아보고, 예수님도 못 알아봤습니다. 충격과 슬픔이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장례식 내내 멍한 상태로 있습니다. 누가 말을 걸어도 못 알아 듣습니다. 눈앞에 있는 사람도 못 알아 봅니다. 방금 들은 말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마치 꿈 속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애도에 의한 인지적 마비"라고 합니다. 너무 큰 고통이 몰려오면 뇌가 일종의 보호기제를 작동시킵니다.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빈 무덤을 보고도 주님이 살아나셨구나가 아니라 주님을 또 빼앗겼구나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데다가 이제는 시신마저 잃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로 인해 충격을 받고 깊은 슬픔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죽음, 철썩 같이 믿었던 사람의 배신, 예기치 않은 사업의 실패, 암과 같은 질병,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의 실직 등으로 인생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충격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큰 충격과 슬픔은 사람의 시야를 좁아지게 만듭니다. 현실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 고통만 보입니다. 천사를 봐도 심지어 예수님을 봐도 마리아는 오직 내 주님을 잃어버렸다 한 가지에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마리아를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까? 16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마리아가 깊은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예수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직접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마리아가 제 정신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랍오니” 하고 불렀습니다. 나의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랍비가 그냥 선생님이라면 랍오니는 깊은 애정이 담긴 나의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요10:3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마리아는 깊은 슬픔 가운데서도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고 반응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 음성은 창조주로서의 주권적인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이름을 부르시며, 자신의 주권을 나타내셨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1). 예수님의 마리아야는 “내가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 너는 여전히 내 것이다” 하는 주권자의 선언입니다. 또한 이 음성은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요5:25절은 말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마리아는 깊은 슬픔으로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이 사망 권세에 갇혀 누워있던 마리아를 다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회복시키신 후 새로운 방향을 주십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라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마리아가 할 일은 부활의 증인이 되어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 증거했습니다. 더 이상 마리아에게 슬픔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이 마리아 안에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며, 우리의 생명입니다. 제 2 장. 성령을 받으라 19절을 보겠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저녁 시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모인 곳의 문들을 닫고 숨어 있었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려움이 생길 때의 대표적인 증상이 숨는 것입니다. 현실을 도피합니다. 소극적이 됩니다. 또 나타나는 증상이 문을 잠그는 것입니다. 들어오는 사람도 막고, 나가지도 않습니다. 대인 관계를 끊고, 스스로를 고립시킵니다. 이런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심리학자들은 주로 사람의 심리적 변화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가진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내적인 불안감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위험을 실제 위험보다 과대평가하는 생각의 왜곡 현상 때문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불안, 과대평가 모두 다 또 하나의 증상일 뿐,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은 두려움의 뿌리를 죽음과 죄에서 찾습니다. 히2:15절은 말합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사람의 모든 두려움 뒤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사람이 절대로 죽지 않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전혀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곧 하나님과의 단절 상태를 말합니다. 제자들은 잡혀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예수님을 배반한 죄책감에서 벗어날 힘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그들을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까? 19b절입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들을 찾아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람어로는 샬롬 입니다. 일상에서 하는 인사말입니다. 우리 말로는 ‘안녕하세요’, 영어로는 ‘hi’입니다. 일상에서 흔히 하는 인사말이지만 누가 어떤 상황에서 하는가에 따라 의미는 크게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사흘 전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평소처럼 제자들 앞에 나타나 샬롬 하고 인사하신 것입니다. 인사하신 후 예수님은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며칠 전의 그 예수님이 맞았습니다. 이를 확인하는 순간 제자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솟아 났습니다. 두려움이 씻은 듯이 사라졉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하나의 선물을 주십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숨을 내쉬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창2:7절 하나님이 첫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시는 모습을 떠 올리게 됩니다. 첫 창조 때,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사망을 이기는 부활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단순히 코로 숨쉬는 육적 생명이 아닙니다. 사망도 이기는 부활의 새 생명입니다. 요11:25,26절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에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모든 믿는 자에게 성령으로 부활의 새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주십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이 말씀은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영접하는 자에게 죄 사함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들으면 우스개 소리 같지만 코로나가 한창일 때 어떤 나라에서는 마스크를 주느냐 주지 않느냐에 따라 사람의 생사가 결정되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그런 복음을 맡은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과 동일한 복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는 이 복음을 힘써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제 3 장.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24절을 보십시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마침 도마가 없었습니다. 도마가 돌아왔을 때 제자들로부터 놀라운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아침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더니, 지금은 열 명의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믿을 만도 합니다. 그러나 도마는 완강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그 일이 있은 후로 8일이 지났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시 찾아 오셔서 “샬롬” 인사하셨습니다. 특별히 도마를 주목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는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임을 확인한 도마는 감동적인 고백을 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방금 전까지는 다른 제자들의 주님, 그들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의 감동적인 신앙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예수님도 감동적인 화답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의 증거를 듣고도 믿지 않은 그의 불신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어떤 믿음을 기대하셨을까요? 29b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 말씀은 도마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동시에 앞으로 부활의 복음을 듣게 될 제 2, 제 3의 도마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사람들은 철저한 경험주의, 실증주의 가치관 속에서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믿지 않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해 봐야 합니다.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 보고, 똥인지 된징인지 직접 내 손으로 찍어 먹어 봐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역사적 실존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전과 후를 기점으로 BC 시대와 AD 시대가 구분될 정도로 인류 역사가 이미 인정한 예수님이지만, 내가 직접 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제지들이 부활 신앙을 갖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 땅에 계시면서 사람들을 만나 샬롬 인사하시고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내밀어 손을 넣어 보라고 권유하실 수 없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더 더욱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성경이 있고, 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앞에 직접 나타나시는 대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우리는 정말 복된 자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지만 그 손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 한 분도 빠지지 않고 다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예수님이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 각 사람의 주요 하나님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성경 속에만 있는 하나님, 아브라함, 다윗과 같은 믿음이 훌륭한 특정인들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하나님, 목자님의 하나님이 아닌, 바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그 분은 2000년전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 바로 옆에 계십니다.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 동행하십니다. 매일 아침 부활하신 예수님은 샬롬 하고 나에게 인사하십니다. 깊은 슬픔 속에 빠진 나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여호수아야”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나에게 평강을 주시고 성령으로 동행해 주십니다. 이 예수님을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으로 만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만 하시면 됩니다. 그것은 믿는 것입니다. 의심과 불신을 내려 놓고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10년 전 20년 전 한 번 고백한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지금 이 시간, 아니 매순간 필요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영접하는 매 순간 예수님은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안에 있는 슬픔과 두려움, 의심과 불신, 허무와 무기력, 정욕과 이기심, 모든 죄와 사망의 세력을 이기는 부활의 생명으로 가득 채우십니다. 내 삶의 성화의 전 과정을 견인해 주십니다. 연약한 우리가 마지막 천성에 들어갈 때까지 끝까지 책임지고 섬세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롬8:11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하시는 일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어제 성화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성화를 이룰 힘이 없습니다. 죄로 죽은 몸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죽은 몸이란 죄로 인해서 100% 오염된 전적으로 부패한 몸이요, 도저히 고쳐 쓸 수 없는 무기력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 죽은 몸에게 일말의 기대를 해 봅니다. 언젠가는 정신을 차리고 죄를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시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전 백패입니다. 이미 죽은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이 몸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성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없으면 성화와 영적 성장은 한계에 부딪칩니다. 무덤가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며 슬피 우는 마리아처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문 밖 현실의 세계가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과 스스로를 단절시킨 제자들과 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도마를 찾아 오셔서 부활의 몸을 보여주시고 부활의 믿음을 심으셨던 예수님께서 지금 이 시간 교원 연수원으로 찾아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 시간 부활하셔서 바로 내 옆에 계신 예수님께 믿음의 고백을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 제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지금 이 시간도 살아계셔서 바로 제 곁에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당신은 진정한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게도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과거 허무와 무기력, 정욕과 자의식으로 깊이 병든 자였습니다. 대학 1학년 여름 수양회를 통해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거듭난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은혜에 기초해서 졸업 후 풀타임으로 지원했습니다. 7년간 하나님의 역사를 동역하고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그러나 3년이 못되어 한 사건으로 인해 귀국했습니다. 그것은 한 중국 형제 목자가 우리 모임을 중국 공안에 고발한 것입니다. 그는 함께 장막생활 하던 자기 양을 훈계하다가 한 대 맞았습니다. 때마침 우리 모임이 매주 성만찬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 아들을 데려가기 위해 장막을 찾아 왔던 중국인 목사님이 그 형제 목자에게 불신의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 형제 목자는 홧김에 중국 공안을 찾아 가서 우리 모임이 이단이고, 제가 교주라고 고발했습니다. 결국 공안에 적발되어 저는 선교사 생활을 정리하고 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몸은 돌아왔지만, 그 형제가 남긴 이단과 교주라는 말은 독한 가시처럼 제 마음에 남아 제 신앙과 우리 모임에 대한 깊은 고뇌의 시간을 보내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간 제 신앙을 철저하게 성경 말씀 위에 세우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어느 날 성경 66권이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인데, 부분 부분 발췌해서 읽을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가 알고 싶은 소원이 생겼습니다. 성경 통독을 반복하던 중 하나님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이 십자가 안에 다 담겨 있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깊이 영접했을 때 한 올 한 올 제 마음을 옭아 매고 있던 각종 율법의 사슬이 온전히 끊어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부활의 복음을 알고자 하는 소원을 주셨습니다. 저는 부활 신앙은 죽음의 고비에 있거나 믿음이 훌륭한 분들이 갖는 신앙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초해서 볼 때 그것은 오해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미 성령으로 나와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사도행전 1장 말씀을 기초로 전적으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을 익히고자 방향 잡았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았습니다. 내 본성이 펄펄 살아 있어 내가 원하는 것을 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한 자책감이 생길 뻔했지만 십자가의 완전한 대속의 은혜를 의지하여 계속해서 다시금 일어나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실패로 아~ 나는 결국 안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계속 실패하는 이유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믿음 문제였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부활을 정말 믿는다면 바로 옆에 계신 그 분을 내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믿음의 손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실상 저는 머리로만 예수님의 부활을 알 뿐이었습니다. 그 후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임재와 동행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믿음의 손으로 느낄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잠자리에 누워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하는데 갑자기 본문의 한 장면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아직 어두운 새벽 시간 마리아가 찾았던 컴컴한 무덤가가 갑자기 찬란한 광채와 함께 환하게 빛나는 환상이 제 마음 깊이 밀려 들어왔습니다. 마리아는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사실 그 새벽은 이미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신 승리의 새벽이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이미 예수님의 부활의 광채가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지만 그 사실을 모르거나 믿음의 부족으로, 여전히 마리아처럼 슬픔 속에, 제자들처럼 두려움 가운데, 도마처럼 의심과 고집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모습이 마음 깊이 와 닿았습니다. 무덤가를 가득 채웠던 예수님의 찬란한 부활의 광채가 제 마음을 비추었을 때 부활의 믿음이 한 단계 성장했습니다. 저와 함께 하고 계신 예수님이 믿음의 눈으로 보이고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제 안에 이전보다 더 힘있게 역사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육신의 소원보다 성령 곧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르고 순종할 힘이 생겼습니다. 중국에서의 사건 이후 사람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이 제 안에 크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감당할 내적 힘을 공급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마음 한 구석으로 밀어 놓았던 기도제목을 하나씩 꺼내어 사망 권세도 파하신 예수님 앞에 들고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제게는 실제 삶에서 부활의 복음을 더 깊이 체험하고 이를 통해 복음이 점점 더 희미해져가는 이 시대에 부활의 증인으로 살고자 하는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제가 십자가 복음 뿐 아니라 부활의 복음도 확신있게 증거할 수 있도록 부활의 믿음이 더욱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빈 무덤과 마리아와 제자들, 그리고 도마의 증언을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복음 곧 기쁜 소식인 이유는 그 분이 2000년 전 부활하신 후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매일 부닺치는 한계와 절망에서 일어나 도전하고 승리할 수 있는 부활의 생명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복음, 공짜입니다. 복음, 매우 좋은 것입니다. 공짜이면서 매우 좋은 것은 무조건 받아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고 믿어지지 않으면 이해되게 해 달라고, 믿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수양회를 마친 후 우리는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많은 한계와 절망적인 상황에 다시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죄의 유혹과 육신의 연약함에 넘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주신 말씀이 수양회 이후에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수양회 기간 이론적으로 배운 복음을 실제 삶에서 더 깊이 체험하고 더 나아가 복음이 희귀해지는 이 시대에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복된 자들이 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요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