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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6년 마태복음 16강 열둘을 내보내시는 예수님(마태복음 10:1-42)2026-07-20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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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16강 


열둘을 내보내시는 예수님


말씀 / 마태복음 10:1-42

요절 / 마태복음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우리는 이번 여름 수양회를 통해 ‘복음 안에서 새롭게’란 주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이 복음을 어떻게 세상으로 흘러보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보내심’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보내셨고, 모세를 보내셨고, 여호수아를 보내셨습니다.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마침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보내십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전도 여행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교회의 사역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환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보내시는 그 의미와 그들이 세상 속에서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지 배우길 기도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마태복음 9장의 마지막 장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여러 마을과 회당을 다니시면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따라 다니면서 “아, 예수님은 저렇게 전도하시는구나. 아, 저렇게 사역하시는구나” 보고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상처받고 무너진 인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짙은 피로감과 어떤 갈망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문제 의식을 갖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9:36) ‘고생하며 기진했다’는 말의 원어 뜻은 ‘가죽이 벗겨지고 찢겨 나가 길바닥에 내팽개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을 정죄하고 가르치려고만 들었지, 아무도 그들의 찢어진 가죽을 싸매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참한 현실을 보시면서 곁에 있던 제자들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추수할 곡식은 이토록 천지에 널려 있는데, 거둘 일꾼이 너무나 적구나. 너희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그들이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할 대단한 하나님의 군대를 보내주십시오.” 기도가 끝나자 기막힌 반전이 일어납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중 한 명, 한 명 그 이름을 부르시고 열 둘을 따로 세우셨습니다. 그들을 사도로 임명하시고 “이제 너희가 가라.”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 훈련된 초인적인 영웅들을 불러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고, 함께 그 문제를 위해 기도했던 제자들을 불러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 열두명의 명단이 2절부터 4절까지 나옵니다. 그 명단을 한번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어부 출신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이들은 배움이 짧고 성격이 불길 같아서 툭하면 주먹이 먼저 나가는 청년들입니다. 또 여기에 기막힌 조합이 추가됩니다. 로마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동족의 피를 빨아먹던 세리 마태가 들어왔고, 반대로 로마를 전복시키기 위해 품속에 늘 단검을 품고 다니던 극우 민족주의 열혈당원 시몬이 한 팀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극좌파 청년과 극우파 청년이 형제 장막에 같이 살게된 꼴입니다. 그뿐입니까? 늘 회의적이고 의심이 많은 도마, 그리고 돈 몇 푼에 결국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배신자 가룟 유다까지 한 팀이 되었습니다. 이건 ‘드림팀’이 아니라 ‘문제투성이 팀’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가장 실패할 확률이 높은 스타트업 멤버 리스트’와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들어갈 요회 구성이나 성경공부팀을 이렇게 짠다면 여러분은 동의하시겠습니까?


“아니, 예수님, 영적 전쟁을 하러 가신다면서요? 세상을 변화시키고 뒤집어 엎을 계획이라면서요? 그렇다면 바리새인 중에서 성경을 달달 외우는 엘리트 청년들이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레위인 청년들을 스카웃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이런 오합지졸들을 모아놓고 ‘새 이스라엘의 군대’라고 부르시는 겁니까?”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이 전쟁이 ‘사람의 능력’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평범하고, 연약하고 다양하지만, 현재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청년들 중에서 선발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부르심이 우리의 능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택하심과 더불어 권능을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저는요. 학점도 낮고요, 집안 배경도 안좋아요. 성격도 소심해요” 괜찮습니다. 우리의 빈 자리에 하나님의 권능이 임할 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사도로 세운 이 열둘을 바라보시면서 아마 구약의 장엄한 역사가 오버랩되어 보였을 것입니다. 광야 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을 출발해 가나안을 향해 행군할 때 그때의 장면. 성막을 중앙에 두고 동서남북으로 12지파가 정렬하여 행진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들은 오합지졸 노예 집단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내 군대’, ‘하나님의 큰 군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열두 제자를 통해 영적인 가나안 정복 전쟁을 시작하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행군의 규칙이 아주 묘합니다. 5절과 6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온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왜 이토록 구역을 제한하시는 걸까요? 여기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사적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먼저 이스라엘 가운데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증명되어야 합니다. 그 언약의 불씨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끝까지 이르러 번져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장에 이르면 예수님은 지경을 넓혀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명령 하십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종종 “난 글로벌 리더가 될래”, “난 위대한 선교사의 삶을 살래” 이런 거창한 비전을 품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정작 내 곁에 있는 가족, 매일 마주치는 학과 동기, 지쳐 쓰러진 직장 동료의 아픔에는 외면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의 삶의 현장, 네가 처한 그곳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먼저 가라.”


그리고 전해야 할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단 한 줄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의 메시지이며, 예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전하는 사람만 바뀔 뿐입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에서 우리는 복음에 대해 배우면서 알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행.불행이 이생흥이나 이생망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성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성이 회복될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보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내 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 행복합니다. 죄의 다스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대신에 평안이, 미움 대신에 사랑이, 절망 대신에 소망이, 욕심 대신에 감사가 시작됩니다. 또한 복음은 말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시각화되어 전해져야 합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라! 이 놀라운 이적들을 행할 때, 제자들이 명심해야 할 절대적인 규칙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세상은 모든 것을 '거래'로 생각합니다. “내가 너에게 이만큼 해줬으니, 너도 나에게 이만큼 갚아야 해.” ‘Take and Give’의 공식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식은 '은혜', 즉 거저 주셨습니다. 공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제자들이 권능을 얻은 것도 아무런 대가 없이 거저 받은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물을 유통하는 것도 ‘Give and Give’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더해 주님은 더 파격적인 방향을 주십니다. 9,10절입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정유석 목자님, 만약 단기 선교를 가게 되었는데, ’지갑도 챙기지 말고, 여벌 옷도, 신발도, 심지어 호신용 지팡이조차 가져가지 마라”고 제가 지침을 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건 비상식적이고 위험한 명령이야”라며 거부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뭘까요? 이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행군할 때, 매일 아침 내리는 만나를 먹으며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만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하셨던 광야 훈련의 재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돈을 의지하게 됩니다. 여유 자원이 있으면 하나님보다 내 주머니를 신뢰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눈에 보이는 안전망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의 일하심만을 신뢰하도록 하십니다. ‘절대 믿음의 야성’을 심어주고자 하십니다.


자,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제자들이 길을 떠나려 합니다. 그런데 배웅하시는 예수님의 입에서 심상치 않은 말씀이 나옵니다. 격려와 축복 대신 제자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경고가 흘러나옵니다. 16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너희는 양인데, 이리 가운데 보낸다’ 이 말을 들을 때 제자들이 어떤 생각을 할까요? “예수님, 진짜 너무하십니다. 이리 떼가 가득한 들판으로 우리를 보내시려거든, 적어도 양이 아니라 사자나 독수리의 모습으로 보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맹수들의 이빨을 부러뜨릴 날카로운 칼을 주시든지, 몸을 보호할 갑옷이라도 입혀주셔야죠. 왜 이렇게 연약한 ‘양’의 모습으로 맹수들 속에 집어넣으십니까?”


그러나 이 말씀 속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영적 신비가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 세상과 똑같은 무기를 쓰지 않으십니다. 세상은 더 강한 힘, 더 날카로운 이빨, 더 잔인한 폭력으로 승리를 쟁취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가장 연약한 ‘하나님의 어린 양’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갈보리 언덕에서 이리 떼 같은 로마 군병들과 바리새인들의 폭력 앞에 묵묵히 찢기시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오히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이 가셨던 그 ‘양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우리는 총칼로 세상을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힘의 논리로 사람을 제압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무기는 철저히 사랑과 용서, 그리고 희생입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대책 없이 앉아서 당하기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를 주문하십니다. 첫째는 뱀 같은 지혜입니다. 뱀은 영리하게 적의 공격을 피할 줄 압니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죽을 줄 뻔히 알면서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박해가 오면 지혜롭게 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대적이 올 때 상황을 예리하게 분별하는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비둘기 같은 순결입니다. 지혜롭게 처신하려다 보면 세상과 타협하게 되고, 뱀처럼 간교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적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구약의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애굽으로 갈 때,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죽이려 한 적이 있습니다. 모세의 아들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 영적 순결을 잃었기 때문입니다(출 4:24-26). 또한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시작하기 전 가장 먼저 한 일은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리고성을 정복했을 때 ‘아간’이라는 인물은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비싼 옷과 은을 몰래 숨겼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은 아주 조그만 아이성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했고, 공동체 전체의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교회는 순결을 지킬 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의 경고는 점점 더 구체적이고 험악해집니다. 마치 거대한 태풍이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17,18절을 읽겠습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실제로 초대교회 제자들은 이 말씀대로 공회와 회당에 끌려가 채찍질을 당했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도 형태는 다르지만 동일한 박해가 일어납니다. 신앙 때문에 손해를 보고, 정직하게 살다가 불이익을 당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세상의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실패의 자리가 아닙니다.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마저 복음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법정에 설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를 쥐어짜며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 순간 우리의 입술을 주장하시고 가장 강력한 하늘의 언어를 담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아픈 고난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옵니다. 21절입니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가장 나를 지지하고 위로해 주어야 할 가족이 나의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칼끝을 겨눌 때, 그 아픔은 뼈를 깎는 듯합니다. “너는 왜 그렇게 예수에 미쳤냐! 적당히 믿어라” 하시는 부모님의 꾸중 속에 담긴 서운함과 단절감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잘못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면 어둠이 요동치듯, 영적인 생명이 들어간 곳에는 필연적으로 진통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고통의 터널을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구원이 있을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이쯤 되면 제자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건 전도 여행이 아니라 자살특공대잖아!” 속으로 비명이 나올 법합니다.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어깨를 토닥이시며, 그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예수님은 제자들 마음속에 가득 찬 두려움의 대상을 재정립해 주십니다. 28절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우리는 세상의 평가를 두려워합니다. 취업 전선에서 탈락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당하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나를 향한 세상의 비난과 냉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위협은 고작 해봐야 이 짧은 육체의 삶을 흔드는 것뿐 아니겠느냐? 영원한 생명을 쥐고 계신 창조주 하나님, 심판장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아라. 진짜 두려워해야 할 분 앞에서 행하는 ‘코람데오’로 살아가면 세상이 주는 두려움은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다.”


구약 성경 여호수아서를 보면, 가나안 정복 전쟁의 첫 관문인 여리고에 도달했을 때 여호수아 앞에 한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칼을 빼 들고 마주 선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엎드려 그의 신을 벗으며 깨달았습니다. “아, 이 전쟁은 나의 군사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구나. 하늘의 군대 대장이 직접 싸우시는 전쟁이구나!” 그 거대하고 두려우신 하나님의 주권과 임재를 경험하고 나자, 여호수아의 눈에 가나안의 장대한 아낙 자손들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먹이(밥)’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할 엄위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기 시작할 때, 나를 짓누르던 세상의 위협들은 아주 작고 초라해 보이기 시작합니다. 거기에다 두려우신 공의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29-31절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여러분은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여기 계신 분들의 머리털 개수까지 다 세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밤마다 흘리는 눈물의 의미도 아시고, 미래를 향한 불안감의 깊이도 아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셔서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계시는데, 도대체 세상의 그 무엇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허락없이, 이 세상의 어떤 이리도 우리의 손끝 하나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장 당혹스러운 말씀으로 치달아 갑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예수님이 검을 주러 오셨다니요? 평강의 왕이 아니십니까? 여기서 ‘검’은 파괴와 폭력의 칼이 아니라, ‘수술용 메스’와 같습니다. 곪아 터진 부위를 도려내기 위해서는 칼을 대야 합니다. 참된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가짜 평화를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았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이 없었습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 흘러가니 갈등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진짜 평화가 아니라 영적 공동묘지의 ‘적막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들어가면, 그 즉시 칼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내 안의 더러운 정욕과 싸우는 내적 전쟁이 시작됩니다. 세상의 부조리한 가치관과 충돌하는 외적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 갈등은 내가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군사로 징집되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신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극단적인 헌신과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37,38절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부모를 미워하고 가족을 팽개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전쟁터에 나간 군인이 “집에 두고 온 코코(반려묘) 밥 줘야 하는데~” 하며 뒤를 돌아본다면 그 전쟁을 제대로 치를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이스라엘이 광야를 행군할 때 진 중앙에 성막을 두었듯이, 우리의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가장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이는 교회의 중심이 인간적인 관계나 세상의 야망이 아니라, 오직 예수로 충만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내 몫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주님이 걸어가신 그 좁은 길을 뒤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39절에서 역설의 법칙을 선포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순신 장군도 전쟁터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이는 복음 신앙의 가장 위대한 비밀입니다. 세상을 향해 내 한 목숨 살려고 아등바등하고 영적 전쟁터에서 도망간다면 그 인생은 결국 허무함과 영적인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위해 내 젊음과 시간, 물질과 생명을 기꺼이 던지는 청년들은 이 땅이 줄 수 없는 영원하고 찬란한 하늘의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세우시고 영적인 가나안 전쟁을 치루기 위해 보내시면서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이제 치열하고 비장했던 전쟁의 서사가 끝나고, 본문 마지막은 아주 따뜻하고 소박한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42절을 읽겠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날 우리가 세상 속에서 복음의 군사로 살아갈 때, 모든 사람이 우리를 거절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실한 삶을 보고,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기꺼이 마음의 문을 여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쳐 쓰러져 있을 때, 가만히 다가와 따뜻한 격려의 말 한마디와 냉수 한 그릇을 건네는 동역자들을 만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나의 군사들을 영접하고 그들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자들의 그 작은 사랑을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선지자의 상, 의인의 상을 줄 것이다.”


우리는 가나안 정복 전쟁의 역사 속에서 기생 라합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성을 정복하러 들어갔을 때, 온 성 사람들이 공포에 떨며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기생 라합만은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영접하고 숨겨주었습니다. 그녀가 베푼 대접은 어찌 보면 작은 행동이었지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온 우주의 주권자로 인정하는 위대한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그 결과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 라합과 그녀의 가족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 여인의 신분으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상상할 수 없는 큰 상을 받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그리고 동역자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리 가운데 보내진 양처럼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가지고서 주님의 군사로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영적 전쟁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이 우리 앞을 막을 것입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대장 예수님, 지혜의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에 능히 승리합니다. 아니, 이미 승리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서 세상 속에 나아가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실제적으로 돕고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군사요 목자로서 살아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