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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6년 마태복음 17강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1-30)2026-07-27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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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제 17 강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 마태복음 11:1-30

요절/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2장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3장에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4장에서는 마귀에게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5~7장은 예수님이 전하신 산상수훈이고, 8,9장은 10개의 이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이나 이적들이나 모두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장에서 예수님은 혼자 하시던 천국 복음 역사를 열두 제자를 파송하심으로 그들로 동역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11장, 그리고 다음 주에 배울 12장은 이렇게 확장되는 천국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그리스도이신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인생들에게 참 쉼을 주시는 분임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전도여행을 위한 몇 가지 명령을 주시며 그들을 파송하셨습니다. 그들을 보내신 후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 자신도 가르치고 전도하시려고 여러 동네로 나아가셨습니다. 혼자서도 전도하러 나아가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핵심 사역이 천국 복음을 전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제자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동역자들과 같이 있거나 혼자 있거나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2,3절입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여기서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을 말합니다. 그는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의 죄를 책망했습니다. ”당신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것은 옳지 않소!“ 그는 이 일로 사해 동쪽에 있던 마카이루스 성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림1) 요한은 거기서 그의 제자들로부터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런 요한의 마음에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오시리라 예언된 그 메시아가 맞을까?“ 


앞의 3장에서 세례 요한이 한 말을 보면 그의 메시아관이 어떠한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그리스도는 알곡을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3:7~12) 요한은 그리스도가 오시면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도끼로 찍어내고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 넣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무섭게 심판하시는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조용하게 천국 복음을 전하기만 하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그는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런 요한에게 예수님은 이 말씀을 전하라 하십니다. 4,5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본대로 가서 알리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이는 구약성경 이사야 29:8, 61:1절에서 메시아가 오시면 하실 일에 대해 이미 예언된 내용입니다. 물론, 세례 요한이 생각한 심판하시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도 있습니다. (사66:15, 말3:1-3) 그런데 그 심판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 즉 최후에 이루어질 것들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 한쪽 면만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상에서의 메시아의 사역은 병든 자를 낫게 하고 맹인을 보게 하고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성경적인 메시아관을 요한에게 알려주시며 말씀하십니다. 6절입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세례 요한은 특히 투옥되어 죽음을 앞두고 있었기에 그 마음에 안타까움과 조급함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든지 실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럴 때일수록 더욱 자기 중심적인 기대나 선입견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메시아를 잘 이해하고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로 말미암아 무리들이 세례 요한을 경히 여기지 않도록 그의 위대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7~10절입니다.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무리들이 보기 위해 광야로 나간 사람은 시류에 따라 사는, 소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권력을 잡고 호의호식하는 부드러운 옷 입은 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보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보통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훨씬 뛰어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메시아의 선구자로 온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위대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a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구약의 그 어떤 선지자보다 큰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요한이 모세나, 엘리야, 엘리사처럼 위대한 일을 많이 해서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의 위대성은 메시아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 직전에 온 선지자로 선구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메시아를 직접 눈으로 보고 증거하였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는 메시아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요한은 구약의 문을 닫고 신약의 문을 연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보다 탁월합니다. 


그런데 신약의 성도들은 어떠합니까? 11b절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여기서 천국에 있는 자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신약의 성도들을 말합니다. 요한이 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신약의 성도만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모든 계시를 소유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모든 계시인 신구약 성경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성령을 받아 그 내면에 성령이 거하시는 자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약의 성도들은 그 누구라도 구약 시대에 살았던 요한보다 큽니다. 이는 마치 전속력으로 마차를 몰고 가는 사람보다 KTX를 타고 편안히 가는 사람이 더 빠른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구약 시대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시대가 왔습니다. 


세례 요한에 의해 선포된 이후 이 천국은 침노를 당하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NIV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이를 그대로 한글로 번역하면, “세례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강력하게 전진하고 있다. 강력하게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어린 양과 같이 잠잠하고 온유해야 될 것 같은데 도리어 온 힘을 다하여 애를 쓰는 자들이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이는 육체적인 힘씀이 아니라 영적인 소원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천국에 대한 강렬한 소원을 갖고 예수님께 나아올 때 천국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어부들, 세리였던 마태는 천국에 대한 강렬한 소원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맹인들이나, 백부장이나 열두 해 혈루증 앓았던 여인이 그런 소원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강렬한 소원을 가진 그들은 모두 천국을 붙들었습니다. 천국을 차지하였습니다.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은 건들기만 하면 터질듯한 포도주 부대같이 세상에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주어진 천국은 역동성으로 충만합니다. 누구든지 소원을 갖고 나아가 붙잡기만 하면 그에게 천국의 봇물이 터집니다. 천국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율법 시대는 세례 요한의 때까지입니다. 그는 오시리라 예언된 엘리야였습니다. 메시아가 오심으로 그의 사명은 끝났습니다. 그는 비록 젊은 나이에 순교하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마친 위대한 종이었습니다. 이제 요한은 가고 메시아의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율법으로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메시아를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새 시대가 왔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마땅히 이 놀라운 기쁨의 소식을 믿고 천국으로 달려가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합니까? 16~19절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당시에 아이들이 장터에서 놀이를 했습니다.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였습니다. 결혼식 놀이를 할 때 가운데 신랑 신부를 앉혀놓고 한 편 아이들이 피리를 즐겁게 부릅니다. 그러면 다른 편 아이들이 흥겹게 춤을 춥니다. 그렇게 함으로 서로 장단이 맞는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장례식 놀이를 할 때는 한쪽 편 아이들이 슬프게 웁니다. 그러면 다른 편 아이들이 가슴을 칩니다. 같이 통곡하는 제스처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게임을 정상적으로 재미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 사람들은 생뚱맞았습니다. 심보가 삐뚤어진 아이들처럼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았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았습니다. 정상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금욕적인 생활을 하니 그가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먹고 마시자 ”아, 저 자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하며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래도 비난, 저래도 비난하였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신령한 말씀을 듣고 천국으로 몰려 들어가고 있는데 그들은 ”피~“ 하면서 냉소적이었습니다. 천국 복음에 대해 냉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결국 그 행한 대로 결과가 나타납니다. 회개하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렇지 않고 복음에 대해 냉담하고 문관심한 자들은 어두운 데 쫒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천국 복음에 대해 가장 무관심한 자들은 놀랍게도 예수님이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었습니다. 20~24절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그림2)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은 모두 갈릴리 호수 가까이 북쪽에 있었습니다. 고라신은 작은 농촌 마을이었지만 예수님이 여러 기적을 행하신 곳입니다. 벳새다는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고향입니다. 예수님은 이 근처에서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 사역의 본거지였습니다. 베드로의 집이 있었고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자주 가르치셨습니다. 이 고을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많은 말씀을 들었고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알 수 있나요? 기적을 많이 본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한번 체험해 보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당장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세 고을들을 볼때 기적을 본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겸손히 회개하고 말씀을 영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세 고을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았지만 그 마음이 하늘에까지 높아졌습니다. 교만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예수님을 거절한 고을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받을 심판이 어떠 합니까? 이방 도시인 두로와 시돈보다, 또한 소돔과 고모라가 받은 심판보다 더 엄한 벌을 받게 됩니다.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예수님이 충성된 종과 악한 종에 대한 비유를 결론지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12:48b)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은혜와 진리, 기회와 사명을 받은 사람일수록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1세대는 하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반석에서 솟아나는 물을 마셨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불신하였을 때 모두 광야에서 스러졌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많이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은혜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순종과 열매를 원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심판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 감사하여 더욱 분발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25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서 ”이것“은 말씀과 이적들을 통해 증거된 천국 복음 진리를 말합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란 풍자적인 표현으로 소위 자신이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교만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숨겨집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 즉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나타내십니다. 그것이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깨닫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27절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천국 복음이 목적하는 바는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요17:3)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계시를 받아야합니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되고 천국 복음을 영접하게 됩니다. 우리는 내가 말씀공부를 했고 내가 이성으로 이해하여 결국 복음을 영접했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이 오직 예수님이 주신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는 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생들을 모두 초청하십니다. 28-30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는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을 보면 아무 고민도 없고 무거운 짐도 없을 것 같이 생각됩니다. 대기업의 임원만 되면 아주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그 누구도 나름대로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쉬게 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쉼이 무엇일까요? 사전적 정의는 이러합니다. "쉼이란 활동 후에 잠을 자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회복하는 상태." 성경에서 의미하는 쉼은 이보다 조금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평안과 안전을 누리며 영혼이 만족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28-30절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우리에게 쉼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어떻게 쉼을 주시는 것일까요? 


첫째, 예수님은 "나에게 와서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쉼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을 배우는 것일까요? 이는 예수님의 내면성, 그의 성품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특히 어떤 성품입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의 성품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될 때 마음에 참 쉼을 누립니다. 사람은 몸이 쉰다고 쉼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쉼이 있어야 합니다. 온유함과 겸손의 반대는 혈기와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혈기가 많아 늘 화가 난 사람의 마음에는 쉼이 없습니다. 때마다 몰아치는 분노가 그의 내면을 뒤집어 놓습니다. 교만한 마음에는 비판과 짜증이 가득합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배울 때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집니다. 참 쉼은 활동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수록, 우리의 내면이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더욱 큰 쉼을 누리게 됩니다. 


둘째,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맬 때 쉼이 있습니다. 사실 멍에는 좋은 도구입니다. 가장 힘을 적게 들여 땅을 갈 수 있는 유용한 농기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시며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농사할 때 소 두 마리를 멍에를 매어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멍에는 이와 같이 예수님과 내가 같이 매는 멍에입니다. (그림3) 예수님과 내가 같이 멍에를 매면 누가 힘을 더 많이 쓰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이시죠. 내가 멍에는 같이 매는데 거의 99%는 예수님이 일하십니다. 나는 그저 같이 매는 폼만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멍에는 가볍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같이 멍에를 매면서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천국 복음 역사입니다. 그 일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가장 의미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살면서 피곤해하는 이유는 단순히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닙니다. 의미 없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은 아무리 해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늘의 기쁨이 넘칩니다. 


지난 여름수양회에서 메시지를 전한 최주혜 목자는 WMC 댄싱을 섬겼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공자도 아니고 공부 압박이 심해 사망년이라고 하는 간호학과 3학년인데 어찌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였습니다.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어렵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멍에를 매고 믿음으로 섬겼을 때 많은 단원들을 도우며 성공적으로 섬길 수 있었습니다. 광주에까지 가서 섬기고 밤늦게 돌아와서도 학업의 십자가를 감당하였습니다. 영혼의 기쁨이 충만하니 몸의 피곤함을 능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몸이 쉬어야만 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할 때 바쁜 가운데서도 쉼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은 시장하시고 목마르셨지만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돕는 기쁨에 충만하실 때 참 쉼을 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4b) 예수님을 배우는 것도 도 닦듯이 가만히 묵상하면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일하는 가운데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천국 복음 역사를 섬길 때 우리의 영혼이 너무나 기쁘고 행복합니다. 예수님을 배우게 됩니다. 마음에 쉼을 누리게 됩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죽음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기에 우리에게 참 쉼을 주실수 있으십니다. 사람을 정말로 피곤하게 하고 쉼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의 뿌리는 죽음입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성취해도 결국은 다 사라질 것,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은 사람에게 깊은 허무와 절망을 줍니다. 무의미와 공허함이 사람의 영혼을 짓누릅니다. 마음과 영혼이 심히 피곤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를 믿는 자에게 부활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삽니다. 참된 쉼, 영원한 쉼을 누리면서! 이를 믿을 때 인생의 무의미가 주는 모든 피곤이 사라집니다. 하늘에서 오는 평안과 쉼이 넘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들에게 참 쉼을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매고 천국 복음 역사를 섬기는 가운데 날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깊이 배우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영생을 얻은 자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참 쉼을 모르고 죄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 시대 양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