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마태복음 18강
이방의 희망,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12:1-21 요절: 마태복음 12:21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 8, 9장에 이어 예수님의 두 번째 이적 모음입니다. 첫 번째 이적집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데 초점이 있었다면, 본문은 이적을 통해 바리새인들의 적대감이 더욱 심화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논쟁을 진리의 말씀으로 답하시며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기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과 상한 갈대,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연약한 인생을 품으시는 예수님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 안식일의 주인 예수님
1,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 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아침을 걸렀는지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고 있었습니다. 아침 식사 다들 하고 오셨나요? 오늘날 우리는 하루 3끼를 챙겨 먹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지만, 이것은 당시 당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평일에는 하루에 두 끼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만큼은 하루 '세 끼'를 먹는 것을 거룩한 의무이자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이처럼 안식일에는 가난한 자나 종이나 나그네나 모두가 노동을 쉬고 평소보다 더 풍성하게(세 끼를) 먹으며 쉼을 누리는 날이었습니다. 대신 안식일에 불을 지피거나 음식을 만들 수 없기에 안식일 전에 미리 음식을 준비해 두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집도 없고 머물 곳도 없이 순회하던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요일에 미리 안식일 음식을 준비해 둘 여력도, 안식일에 세 끼를 챙겨 먹을 형편도 못 되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밀밭 사이를 지나시며 제자들이 허기진 배를 달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언제부터인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보고 안삭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였다고 비난하였습니다. 문제는 밀밭을 지나거나 남의 밭에서 이삭을 먹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23:25는 배고픈 나그네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허용합니다. 누가복음 6:1에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문제 삼은 것은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은 행위였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은 이를 추수와 탈곡으로 해석하여 안식일 금지 규정을 어긴 것으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제자들을 변호하십니까? 3,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사무엘상 21장에 기록 된 사건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시기하여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놉에 있는 하나님의 전에 이르렀고, 제사장 아히멜렉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굶주린 다윗 일행에게 주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이 사건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다윗을 정죄하지 않았고 하나님도 그를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삭을 먹은 일을 문제 삼는 그들에게, 오히려 더 엄격한 규정인 진설병을 다윗이 먹은 사실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이는 율법에 예외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해석하여 그 근본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2:27에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 쉬신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도 6일 동안의 수고를 멈추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참된 쉼을 누리도록 안식일을 주셨습니다(출 20:10).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안식일의 참뜻보다 형식적인 준수에 집착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더 잘 지키기 위함이라는 명분으로 수많은 세부 규정을 만들어 신앙의 기준으로 삼았고, 안식일을 쉼의 날이 아니라 짐을 지는 날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보다 자신들의 종교 체계에 묶어 두었고, 예수님 말씀처럼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여 돕지 않았습니다(마 23:4).
예수님은 이어서 또 다른 예를 드십니다. 5, 6절을 보십시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안식일법은 십계명의 제4계명에 근거한 중요한 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안식일에도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성전을 섬기는 여러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오히려 안식일이 가장 바쁜 날이었지만, 그들은 안식일법을 어겼다고 정죄받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안식일의 참된 목적에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은 "그것은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의 이야기이지, 지금 당신의 제자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반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묻기도 전에 말씀하십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참 성전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솔로몬 때 처음 지어진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의 통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를 신성시하여 금을 입히기도 하고, 성전을 모독하는 자를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전은 장차 오실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그림자에 불과하였습니다(히 8:5). 이제 하나님은 건물 성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의 행위가 안식일에 죄가 아니었다면, 참 성전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제자들의 행위도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어 호세아 6:6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같은 사건을 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무죄하다고 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유죄로 정죄했습니다. 이는 판단 기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규례를 기준으로 삼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기준으로 삼으셨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자비가 없었기에 사람을 정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많은 희생을 드리며 하나님을 섬겼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해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롬 10:2-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람을 율법으로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안식일의 소유자이시며 그 규례를 해석하고 주관하시는 최종 권위자라는 뜻입니다. 또한 안식일의 참된 자유와 평안을 드러내어 모든 사람이 누리게 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만든 복잡한 규례와 율법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참 쉼을 누리게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생활의 본질을 배웁니다. 신앙생활은 참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며 참 자유와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사랑으로 자비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우리 모두가 처음 신앙생활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자기도 모르게 종교 생활에 익숙해져 안식의 참 의미를 잃고,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모습을 회개하고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나아가 모든 죄와 율법의 멍에를 벗고 참된 쉼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맞서 성경으로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 "읽지 못하였느냐?"(3절),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5절)고 물으셨고, 호세아 6:6을 인용하여 제자들이 무죄함을 밝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누구보다 많이 공부한 바리새인들은 왜 이를 깨닫지 못했을까요? 이는 그들이 성경을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만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만 하는 성경공부는 지식을 쌓지만,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고전 8:1). 사랑 없는 지식은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 안에서 참 안식과 영생을 누리도록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성경을 공부할 때 성경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참된 기쁨과 생명을 주는 보고가 됩니다. 우리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성경을 공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이방의 희망 예수님
9, 10절을 보십시오.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그곳에는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6:6에 따르면 그의 마른 손은 오른손이었습니다. 외경인 히브리인의 복음은 그가 석공이었으며, "내 손으로 밥벌이를 하니 나를 고쳐 주소서."라고 간구했다고 전합니다. 그는 분명 도움이 절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기보다 예수님을 고발할 미끼로 삼았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그를 고치시면 율법을 어긴 것으로 정죄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물었지만,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유대 전통은 생명이 위급한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을 고칠 수 없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1, 12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람은 양 한 마리만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양은 그의 전 재산과도 같았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안식일이라도 곧바로 꺼냈습니다. 그렇다면 동물보다 훨씬 귀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더욱 마땅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데만 집중했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의 참뜻이 생명을 살리고 선을 행하는 데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안식일은 일상의 일을 쉬는 날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일를 행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눈앞의 한 손 마른 사람을 구덩이에 빠진 하나뿐인 양처럼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다음날까지 기다리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이었지만 그는 믿음으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마른 손이 다른 손과 같이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이는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던 것처럼(창 1:3),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역사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를 보고 자신의 악한 의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기는커녕 더욱 완악해졌고, 예수님께서 생명을 살리신 것과 반대로 사람을 죽일 모의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그들을 피하여 물러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은 그들을 모두 받아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조용히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고 큰소리를 내지도 않으셨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18-21절을 보십시오. "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택한 종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분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방에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심판'(미슈팥)은 하나님의 공의와 뜻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며, 그 목적은 만민을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다투지도 아니하시고 들레지도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도 다투거나 큰소리를 내지 않으시고 조용히 메시아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은 묵묵히 하나님의 뜻만 이루셨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종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삶과 섬김으로 하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넷째,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갈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약한 갈대와는 조금 다릅니다. 갈릴리 호수 주변의 갈대는 대나무처럼 곧고 단단하여 지팡이나 자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꺾이거나 부러지면 더 이상 쓸모가 없고, 날카롭게 부러진 부분은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상한 갈대'는 바로 죄와 상처로 인해 마음과 영혼이 깊이 상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본문에 나오는 한 손 마른 사람도 상한 갈대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꺼져 가는 심지'는 믿음이 약해지고 낙심하여 소망이 희미해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심지에 기름은 남아 있지만 불은 거의 꺼져 연기만 나는 상태입니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믿음,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낙심의 상태를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본래 모습이 바로 상한 갈대이며 꺼져 가는 심지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취업과 진로에 대한 부담, 끝없는 경쟁과 비교, 인간관계의 상처, 실패와 좌절 속에서 마음이 꺾일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뜨거운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기도의 불이 약해지고, 말씀의 감격이 사라지고, 사명에 대한 열정도 식어 갈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괜찮은 것처럼 살아가지만 속으로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며, 믿음의 불도 희미해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상한 갈대를 버리고, 꺼져 가는 심지를 꺼 버립니다. 세상은 경쟁에서 뒤처지고 실패한 사람을 쉽게 포기하고,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공감하시고(히 4:15), 끝까지 품어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위로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참 성전이신 메시아로서 상한 갈대를 회복시키시고 꺼져 가는 심지에 다시 불을 붙이실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38년 된 병자, 세리 마태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셨고, 마침내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우리 자신이 어떠한가가 아니라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상한 갈대를 회복시키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다시 타오르게 하시는 긍휼과 회복의 메시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방인의 희망이시며 우리 모두의 희망이 되십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성전보다 크신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투거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며 죄와 상처로 무너진 인생을 끝까지 품고 회복시키십니다. 이 예수님은 이방인의 희망이시며 우리 모두의 희망이 되십니다. 먼저 우리가 이 예수님을 깊이 알고 그 사랑과 안식 안에 거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그 은혜가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령을 통해 가족과 이웃, 양들에게 흘러가 많은 영혼을 살리는 복된 인생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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