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마태복음 19강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
말씀 / 마태복음 12:22-50 요절 / 마태복음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지난 말씀에서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이방의 희망이 되시는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성경에서 안식에는 몇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시간의 안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신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도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어야 했습니다. 이 안식은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었습니다. 종과 나그네와 가축까지 쉬게 하셨습니다. 죄와 저주 아래 신음하는 모든 생명에게 쉼과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안식일에 담겨 있었습니다.
둘째, 장소의 안식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해방하여 안식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참된 안식이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땅에서도 죄와 우상숭배와 불의가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좋은 장소만이 아니라 선한 왕의 통치가 필요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안식은 마침내 ‘통치’의 개념으로 확장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의 후손가운데 영원한 왕이 오셔서 죄와 사탄의 지배 아래 신음하는 백성을 구출하시고,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릴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참된 안식은 단순히 일이 없고 문제가 사라지는 상태가 아닙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실 때 생명과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나는 누구의 통치를 받고 있는가? 나는 누구의 통치를 받아야 안식을 누릴 수 있는가?”
1. 성령을 힘입어 임한 하나님의 나라(22-37절) 2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어느 날 한 사람이 다른 이들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그는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아름다운 꽃들도,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도 볼 수 없었습니다. 말도 못하니 마음속 고통을 어디에 호소할 수도 없었습니다. 도움의 손길이 없다면 한 걸음도 제대로 나아가기 어려운 무력한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 절망적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를 붙들고 있던 귀신을 몰아내셨습니다. 그러자 닫혔던 눈이 열리고 굳었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자신의 입으로 찬양하며, 받은 은혜를 사람들에게 증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증상만 잠시 완화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억누르던 마귀의 권세에서 근본적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혼과 삶 전체를 회복하시는 구주이십니다.
이 광경을 본 무리는 놀라 말했습니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다윗의 자손’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자기 백성을 공의와 정의로 다스릴 영원한 왕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눈앞에서 일어난 해방을 보며 약속의 왕이 드디어 오신 것은 아닌지 큰 기대를 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가 로마를 몰아내고 강력한 지상 왕국을 세울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나라는 군대와 영토로 세워지는 정치적 왕국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죄가 지배하던 곳에 은혜가 임하고, 거짓이 지배하던 곳에 진리가 임하며, 사탄에게 붙들린 사람이 해방되어 하나님께 돌아오는 그런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같은 사건을 보고도 전혀 다르게 반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거~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거 아니야?” 비난했습니다. 그들앞에 눈이 열리고 말하게 된 사람이 분명히 서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와 왕으로 결코 받아들이지 않고자 합니다. 예수님과 안식일 논쟁으로 마음이 상한 그들은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과 같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그들 속에 시기와 교만과 완고함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모순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25-27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는 황폐해지고, 스스로 싸우는 집은 설 수 없습니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낸다면 사탄의 나라가 어떻게 유지되겠습니까? 또한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역사만 사탄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명백한 이중 잣대입니다.
그들의 궤변을 논박한 예수님은 이제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28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먼 미래에만 오는 나라가 아니며, 죽은 뒤에만 들어가는 나라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의 권능으로 악한 권세를 몰아내고 상한 생명을 회복하신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성부 하나님과 근본 본체이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마음만 먹으시면 자신의 온 우주적인 신적 권능만으로도 사탄의 세력 따위는 단숨에 흔적도 없이 소멸시킬 수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육신(Incarnation)’의 과정 속에서 자신의 신적 특권을 자의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구약 성경이 예언한 온전한 인간으로서, 철저히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성령께 순종하심으로 모든 구속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충만히 임하였습니다. 광야로 나아가 사탄의 시험을 받을 때도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으셨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공생애 첫 선포식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시며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셨음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선언하십니다. 자신이 귀신을 몰아내고 병든 자를 일으키시며,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시는 이 모든 사역이 철저히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앞으로 겟세마네 기도의 자리에도 성령님이 함께 하사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발걸음은 성령을 의지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발걸음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복음 역사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사람을 살리는 역사는 우리의 경험이나 성경 지식, 말재주나 의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스가랴 4장 6절은 말합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생명을 살리는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기도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의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데, 왜 세상은 여전히 이토록 악이 득세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 완성이 됩니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사이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직 어둡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애굽의 노예가 되었지만 그곳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바울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지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이 처한 환경은 안식과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그 마음과 삶을 하나님이 다스리셨기 때문에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캠퍼스에 있든 직장에 있든, 형편이 좋든 어렵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든 오해를 받든, 성령의 통치를 받으면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참된 안식은 환경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다스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욕망과 두려움이 나를 다스리면 좋은 환경에서도 쉼이 없습니다. 그러나 왕이신 예수님이 다스리시면 고난 가운데서도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Now & Here
예수님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통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강한 자의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십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강한 자는 죄와 두려움, 탐욕과 거짓으로 사람을 붙들고 있는 사탄이며, 그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의 세간처럼 갇혀 있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수양과 결심만으로는 그 권세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강하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으로 강한 자를 결박하시고, 붙들려 있던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되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던 사람을 구원해 내는 것을 ‘강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탄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적 전쟁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천국 확장 역사를 위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30절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영적 전쟁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모으십니다. 우리는 구경꾼으로 머물 것이 아니라 예수님 편에 서서 한 영혼을 품고, 말씀과 기도로 돕고,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이 말씀은 연약하여 순간적으로 의심하거나 넘어지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도록 도우시며,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처럼 분명한 성령의 역사를 알면서도 악의적으로 사탄의 역사라고 뒤집고, 끝까지 성령의 깨우침을 거부한다면 스스로 회개와 용서의 통로를 막게 됩니다.
혹시 우리 중에 “나는 이미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닐까?”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아파하며 주님께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성령의 깨우치심에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누구든지 진실하게 회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성령께서 말씀으로 마음을 두드리실 때 완고하게 버티지 않고 겸손히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33-37절을 읽겠습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예수님은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들이 한 말의 근원이 무언인지를 알려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모독과 정죄는 우연한 말실수가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에 쌓아 온 교만과 시기와 미움이 입술의 열매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평소에 우리의 마음에 무엇을 쌓는가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웁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쌓고, 기도를 쌓고, 하나님의 사랑을 쌓고, 성령님을 쌓을 때 그에게서는 선한 것들이 나오게 됩니다. 반면에 평소에 시기심과 욕심과 헛생각과 음란한 생각을 쌓고 이런 것들에 시간을 드리면 그 내면에 그런 것이 쌓여 사탄의 밥이 됩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전혀 분별하지 못하였습니다. 도리어 대적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은 심판 날에 하나님의 준엄한 심문을 받게 됩니다.
2. 하나님 나라의 가장 큰 표적, 요나의 표적(38-45절)
38절을 보십시오. 서기관과 바리새인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또다른 표적을 구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눈앞에서 귀신이 나가고 병자가 고침을 받는 수많은 하나님 나라의 표적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또 다시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불신앙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교한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왜 예수님은 수많은 구약의 사건들 중 하필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셨겠습니까? 요나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피하려다 풍랑을 만나 바다에 던져졌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큰 물고기 배 속에서 밤낮 사흘을 지내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왔습니다. 이처럼 인자이신 예수님도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계시다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요나의 표적’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위대하고 궁극적인 표적입니다.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죄와 사망, 사탄의 집요한 다스림에서 우리를 건져내기 위해서는, 세상의 그 어떤 눈부신 물리적 이적보다도 인류가 지은 ‘죄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과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십자가에서 온몸으로 받으심으로 죄의 값을 완벽하게 치르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성령의 권능으로 사망의 무덤을 깨뜨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예수님이 온 우주의 구원자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왕이심을 우주적으로 선포하는 가장 크고 명확하며 확실한 표적입니다.
심판 때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를 정죄할 것입니다. 그들은 요나가 전한 회개의 말씀을 듣고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남방 여왕도 이 세대를 정죄할 것입니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먼 길을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나보다 크시고 솔로몬보다 크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고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시는데도 그들이 회개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방사람들에게 정죄받을 때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이어서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빈집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귀신이 나간 후 집이 비고 청소되고 정돈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자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훨씬 심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는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위선을 꼬집는 동시에, 오늘날 청년들의 삶에도 중요한 영적 원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적 행위와 도덕적 수양으로 겉모습을 깨끗이 청소하고 정돈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비어 있는 그들의 마음에 자기 의와 영적 교만, 정죄와 위선이라는 더 악한 것이 들어차고 말았습니다. 참된 신앙은 나쁜 습관을 고치거나 결심을 통해 삶을 깨끗이 정돈하는 '마음 비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비워낸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야 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임재를 구하고, 내 삶의 주권을 부활하신 주님께 온전히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죄의 유혹을 이기는 진짜 변화가 시작됩니다.
3.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46-50절)
예수님이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실 때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 서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제자들을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령 안에서 새롭게 맺어진 영적 가족관계가 탄생하였음을 선포하십니다. 그 가족의 기준은 출신 지역이나 나이, 성별이나 사회적 조건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됩니다. 혈연의 가족도 소중하지만 예수님의 피와 성령으로 맺어진 가족은 하나님 나라에까지 영원히 이어집니다.
가족은 서로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부족한 것을 채워 주고, 낙심할 때 붙들어 주며, 잘못했을 때 진리 안에서 권면하고 용서합니다. 의견이 다르고 갈등이 생길 수 있지만 쉽게 정죄하거나 관계를 끊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오래 참으시고 품으신 것처럼 서로를 품습니다. 특히 공동체 안에 처음 온 청년, 실패하여 위축된 사람, 말없이 아픔을 견디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보여 주는 살아 있는 표적이 됩니다.
결론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비난, 성령 훼방, 불신앙적 표적 요구등 거센 저항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하나님 나라가 위기에 처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당하게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느니라” 이 선언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죄로 인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통치가 구약의 수많은 예언과 그림자를 거쳐, 마침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로서 완벽하게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탄의 권세를 결박하셨고, 부활을 통해 요나의 표적을 완성하셨으며,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를 구축하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대학생 여러분, 종로 2부 동역자 여러분, 우리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가 활발하게 생명 역사를 이루도록 우리가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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