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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6년 마태복음 22강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마태복음 14:1-21)2026-08-3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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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22강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14:1-21

요절/ 마태복음 14:20,21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오병이어 사건은 4복음서 모두 기록하고 있기에 우리는 이미 이 내용을 여러 번 배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존에 강조했던 점도 중시하면서, 또한 조금 다른 각도로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1-12절의 헤롯 왕궁에서의 잔치와, 13-21절의 예수님이 빈 들에서 베푸신 천국 잔치입니다. 사실, 오늘 전반부 내용인 세례 요한의 죽음에 관한 기사는, 앞의 4: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라는 구절, 즉 세례 요한이 잡힌 일 뒤에 이어서 기술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한참 나중에, 저자 마태는 예수님이 5천 명을 먹이신 이 사건 바로 전에 배치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저자의 의도가 있습니다. 이 두 사건을 비교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잔치에 참여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먹고 마심으로 날마다 잔치하는 삶, 하늘의 기쁨과 풍성한 생명력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절입니다.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여기서 ‘분봉왕’이란 헬라어로 "테트라르케스"(τετραάρχης)로, 왕국의 1/4을 통치하는 왕을 말합니다. BC 63년에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후, 유대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 황제의 휘하의 분봉왕들이 유대를 나누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리던 분봉왕은 헤롯 대왕의 아들 중의 하나인 헤롯 안티파스였습니다. 그는 정치적이며 교활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여우라고 하셨습니다. (눅13:32) 또한 본문에 나오듯이 그는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결혼한 부도덕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에 대해 호기심은 있었지만 믿음은 없었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이 병자를 낫게 하시며 천국 복음을 전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말합니다. 2절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그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이, 자기가 죽였던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나서 행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신하들에게 "그 자가 혹시 내가 죽였던 세례 요한, 그가 부활한 것은 아닐까?"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단정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요한을 죽이고 나서 얼마나 죄의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가를 말해줍니다. 잠언28:1은 말합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죄의식이라고 하면 레이디 '맥베스‘가 생각이 납니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맥베스'를 보면, 맥베스와 그의 아내가 던컨 왕을 죽입니다. 맥베스는 왕위를 차지했지만 백베스 부인은 심한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몽유병에 걸립니다. 잠든 상태에서도 일어나 다니며 시녀가 지켜보는 앞에서 계속 손을 씻는 동작을 합니다. 그러면서 외칩니다. "사라져라! 이 저주 받은 핏 자국아 사라져라!" "아, 아라비아의 모든 향수로 씻어도 이 냄새를 없애지 못하리라!" 죄의식 때문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의 심령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헤롯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 헤롯은 즉각적으로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하였습니다. 


저자는 3절부터 12절에서 과거에 있었던 사건, 곧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인 사건에 대해 말합니다. 3,4절입니다.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AD 37-100)의 '유대고대사'를 보면 상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원래 아라비아의 나바테아 왕국의 공주와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헤롯이 로마로 가던 중 자기 이복 형제 빌립의 집에 머물렀고 그 곳에서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는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이를 알게 된 아라비아의 공주는 아버지 아레다왕에게로 피신하였습니다. 헤롯 안디파스가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은 명백한 범죄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의 이러한 죄에 도전하였습니다.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소" 이에 헤롯은 심히 분노했습니다. "감히 왕에게 도전해?" 요한을 잡아 사해 동편에 있는 마케러스 성에 투옥시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에 당장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부 헤로디아는 어찌하든 요한을 죽이고자 독기를 품었습니다. 


6,7절입니다.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마케러스 성에서 연회가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이 초청되었습니다(막6:21). 헤롯의 허영심과 허풍 떠는 약점을 알고 있던 헤로디아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자기의 딸 살로메가 연회석 상에 나아가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게 하였습니다. 이 춤은 당시 무희들이 추는 춤으로 빙글빙글 돌며 감각적이고 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방탕한 춤이었습니다. 술에 취한 생일 축하객들이 즐거워하며 떠들어대자 헤롯은 우쭐대며 제왕의 기분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그는 분위기에 도취되어 마치 고대 페르시아 군주들이 하던 식으로 호언장담을 늘어놓았습니다. 살로메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막6:23에 보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이 약속은 모든 축하객들이 보는 앞에서 한 맹세였습니다. 이에 살로메가 자기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가서 묻습니다. 살로메는 헤로디아의 말을 듣고 헤롯에게 가서 말합니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주소서" 헤롯이 헤로디아의 계략에 걸려든 순간이었습니다. 헤롯은 살로메의 말에 술이 다 깨고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요한을 죽이자니 그의 양심이 찔렸습니다. "요한, 괜찮은 사람인데... 의인인데..." 그러나 그는 자기 체면을 구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한편 그 자리에는 많은 신하들과 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라도 “의인 요한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라고 분명히 말했더라면 사태는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침묵함으로 헤로디아의 죄에 동참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이 이토록 불의한 것은 악인이 많아서가 아니라 의인이 의를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 있던 그들은 모두 공범자인 것입니다. 특히 헤롯은 간악한 여인과 양심의 가책 중간에서 헤매는 자였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헤롯에게도 약간의 선함이 엿보이기는 합니다. 그는 죽은 자의 부활과 이적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믿음에 자신을 내어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애매한 태도, 결단 없는 믿음은 자기를 구원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의인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소반이 무엇입니까? 음식을 올려놓는 쟁반입니다. 우리가 수양회 가면 교제 시간에 사모님들이 수박을 썰어서 올려놓는 큰 쟁반입니다. 그 소반 위에 사람의 머리를 올려 놓았습니다. 틴에이저 소녀가 사람의 목을 얹은 소반을 들고 있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머리를 보고 미소를 짓는 헤로디아를 상상해 보십시오! 참으로 악의 잔인함은 끝이 없습니다. 


요한이 처형된 그 시대는 의인이 죽임을 당하고 악인은 번성하는 시대였습니다. 한 소녀의 춤의 대가로 요한이 목숨을 잃은 것은 너무 허무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다 완수한 것입니다. 사람이 오래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33세에 돌아가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다하고 가느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주신 메시야의 선구자의 사명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무고한 피를 흘린 헤롯은 얼마 후 그의 전처의 아버지인 아레다 왕과의 전투에서 패합니다. 나중에는 로마 황제의 진노를 사게 됨으로 프랑스의 리용으로 추방되어 거기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급으로 보답하시고 악을 반드시 벌하는 분이십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후반부를 봅시다. 13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여기서 예수님이 들으신 것은, 12절의 요한의 처형에 대한 소식이 아닙니다. 3~12절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2절에서 언급된 내용 즉, 예수님의 능력의 역사가 헤롯에게 알려졌고, 이에 헤롯이 예수님을 다시 살아난 요한으로 생각했다는 소식을 예수님이 들으신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벳새다 광야로(눅9:10)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으심이 다가옴을 아시고 제자 훈련에 집중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고 벳새다 빈들로 가셨지만 백성들은 여러 곳으로부터 갈릴리 해변을 따라 걸어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큰 무리를 어떻게 영접하십니까?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오자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예수님은 그들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많이 모이면 자신의 위치가 헤롯에게 보고가 된다고 돌아가라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스프링클니조마이" (σπλαγχνίζομαι) 입니다. 어원은 “내장, 창자를 말하는 '스플랑크나'에서 나온 말인데 단순히 머리로 “불쌍하다”고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강한 긍휼을 나타냅니다. 모원단장(母猿斷腸)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어미 원숭이의 창자가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중국 고사에서 유래했는데 새끼 원숭이가 붙잡혀 배에 실려가자 어미 원숭이가 강가를 따라 백여 리를 쫓아가며 울부짖었습니다. 마침내 배에 뛰어올랐지만 곧 죽었고, 배를 갈라 보니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큰 슬픔 때문에 창자가 끊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단장(斷腸)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오늘날에도 “단장의 슬픔”이라고 하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극심한 슬픔을 뜻합니다. 요회목자 공부 모임 때 한 목자님이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노래를 언급하셨습니다. 6.25 전쟁 때 북한 군에 의해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미아리 고개 너머로 끌려간 것을 노래한 슬픈 노래입니다. 여하튼 예수님의 무리들에 대한 심정이 그와 같으셨습니다. 무리들은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다가 참 목자 예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을 얻고자 몰려들었습니다. 남자만도 오천 명이 되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병을 고쳐 주시며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막 6:34). 병자들은 병에서 나음 받아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천국 복음을 들으며 기쁨과 소망이 충만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섬기시되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셨습니다. 어느덧 해는 서산에 기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15절입니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현재의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곳은 빈 들이었습니다.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가 해가 지면 어디로 갈 곳도 없고 큰 문제였습니다. 특히 그들을 먹이는 것이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들의 제안은 매우 합리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상황 판단을 잘 하는 센스 있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 하십니까? 


1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여기서 강조된 단어는 "너희가"입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이 각자 먹을 것을 책임지도록 제안했습니다. 그 당시 정황상 그밖에 다른 방법이 없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알아서 자기 양식 문제를 해결하고, 먹을 것을 얻지 못하면 그 사람이 굶든,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든 자기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방향을 잡으면 아주 심플합니다. 전체 역사를 섬기다 보면 책임 목자가 아주 유용하게 쓰는 말이 있습니다. "요회 별로 하겠습니다" 캠퍼스 기도모임이든, 전도든, 주일 서빙이든 "요회 별로 하겠습니다"하면 책임자는 아주 마음이 편합니다. 요회 목자님들이 알아서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바로 그런 것을 원했습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어른들인데 자기들이 알아서 해야죠”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그들이 아니라)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라'는 말씀도 나중에 주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주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의 뜻이 무엇일까요? 물론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무리를 먹일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은 이 상황에서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 무리를 먹이시고자 이미 방향을 잡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책임감을 갖도록 도전하신 것입니다. 당시 백성들에게는 참 목자가 없었습니다. 헤롯을 비롯한 높은 사람들은 왕궁에 모여 파티나 즐겼지 백성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무리들이 죽든 살든 자기들만 잘 살면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무리들은 예수님이 참 목자가 되심을 발견했습니다. 그 목자의 도움을 받고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이들을 보내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제자들은 마땅히 그들에 대한 목자들로서의 강한 책임감을 가져야 되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누가 누겠느냐?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도 이 시대의 영혼의 목자로서의 책임감을 가져야 함을 배웁니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세상이 불행한 것은 악인이 악을 행해서가 아닙니다. 의인이 의를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영적 무지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으로 달려가는 기차에 타고 그 안에서 먹고 마시고 카드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세상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먼저 받은 자들로, 복음을 아는 자들로서 어찌하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불신 가족이나 이웃으로부터 "왜 그때 나를 때려서라도 회개하도록 돕지 않았느냐"는 절규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한 사람의 마음도 돌이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찌하든지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책임감으로 한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가을학기가 다음 주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캠퍼스 양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이들을 돕겠는가 하는 책임감을 갖고 목자의 직분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하튼 그들은 순종하여 찾아보았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습니다. 그것도 그들의 것이 아니라 어느 꼬마 아이의 것이었습니다(요6:9). 너무나 작은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십니까? 18절입니다.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예수님은 "겨우 그거야? 좀 더 찾아봐!"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져온 이 오병이어로 무리들을 먹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결국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사실, 오병이어가 없어도 주님은 무리를 먹일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를 갖고 오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귀한 역사에 우리가 동참하는 은혜를 주고자 하심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작은 믿음과 진심을 하나님의 역사에 써주고자 하심입니다. 이 은혜를 받는 우리가 할 일은 내가 갖고 있는 것, 나의 오병이어를 주님께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오병이어가 있습니다. 오병이어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가난합니다. 그저 몇 천원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가져오라" “저는 직장이 바빠 주님께 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토요일이나 주일 밤에나 조금 시간이 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저는 몸이 약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앉아서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십니다. 주님께 우리의 최선을 가져갈 때 그것은 더 이상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그것은 풍성하게 변화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는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말하지 맙시다. “주님! 제게는 오병이어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합시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께 가져 나갑시다. 주님께서 그것들을 축복하시고 귀히 쓰실 것입니다. 


19절입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예수님은 무리를 잔디 위에 앉히셨습니다. 오병이어를 갖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여기서 축사한다는 것은 식사 전에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적은 양의 음식이라도 이를 공급해주신 하나님께, 또 제자들의 헌신에 감사하셨습니다.


20,21절입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감사 기도를 드리고 떡을 떼시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떡을 떼자마자 다시 그 손에 떡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떡은 계속하여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바로 뒤에 굴이 있었는데, 거기에 엄청나게 많은 떡을 줄에 매어서 저장해두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손으로 줄을 당기면 계속하여 떡이 예수님의 손으로 끌려 나왔다.“ 재미있는 해석입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나온 떡으로 남자만 해도 오천 명,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2만 명은 되었을 큰 무리가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집으로 돌아갈 기운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풍족히 먹었습니다. 남은 조각을 거두어 보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우리는 이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배웁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백성을 먹이시고 배부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앞부분에 나오는 헤롯의 잔치는 왕궁에서 열린 화려하고 풍성한 잔치였습니다. 산해진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잔치에서는 욕망과 허영과 권력 때문에 결국 세례 요한의 목이 잘렸습니다. 겉으로는 풍성했지만 실제로는 죽음의 잔치, 피의 잔치였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잔치는 빈 들에서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다 먹고 배불렀습니다. 남은 조각도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의 잔치는 생명이 충만하고 풍성한 잔치였습니다. 예수님의 빈 들에서의 이 잔치는 이 땅에서 우리 신자들이 누리는 영적인 잔치입니다. 또 이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누리게 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의 예표입니다. 


19절을 다시 한번 보면 예수님이 "떡을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26:26의 최후의 만찬에서 나오는 표현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마26:26) 저자 마태는 빈 들에서 무리를 먹이심으로 그들의 육체적 생명을 살리신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영의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라고 증거합니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내 몸을 먹으라"는 예수님의 성만찬에서의 이 말씀은 십자가에서 실제 사건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십니다. 


헤롯의 잔치와 광야의 잔치, 우리는 어떤 잔치에 참여해야 할까요? 어떤 양식을 먹어야 할까요?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세상의 잔치에서 먹으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화려하게 보이는 것들을 먹고 마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은 절대로 우리를 만족하게 하지 못합니다. 다시 배고프게 하며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먹이겠다 내게 와서 나를 먹으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음식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늘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늘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떡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을 먹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을 풍성히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늘 새기며 그의 사랑 안에 거하기를 기도합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소망하며 이 땅에서도 늘 예수님으로 인해 행복한 잔치를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먹이십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오병이어를 주님께 믿음으로 들고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의 떡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는 삶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심으로 이 땅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또한 영원한 잔치를 소망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