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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4월 12일 국민대 Bible Cafe 제 6 강2017-04-13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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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봄학기 Bible Cafe 6강


네 손을 내밀라

말씀 / 누가복음 6장 6절 – 11절
요절 / 10절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는데 그 중의 한 사람도 똑같은 방법으로 고쳐주신 적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는 말씀으로만, 누구에게는 몸에 손을 대시고, 누구에게는 특별한 행동을 하게 하심으로 고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치료가 매우 인격적임을 시사합니다. 전에 군대에서는 소화제와 해열제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가 아프다고 하면 소화제를 주고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해열제를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해열제가 떨어지면 머리 아프다고 하는 사람에게 소화제를 주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대충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치료하셨습니다. 육신의 질병만이 아니라 영혼의 질병까지를 고치셨습니다. 본문에는 손 마른 사람의 손을 회복시켜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를 어떻게 고쳐주셨는가 살펴보는 가운데 나의 삶에도 예수님의 치유를 적용시켜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은 말 그대로 안식하는 날, 쉬는 날이었습니다. 율법에 보면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그 집에 있는 종이나 가축들도 다 쉬게 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문자적으로 철저히 지켰습니다. 지금도 독실한 유대교인들은 그렇게 합니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는데 6층을 눌러달라고 해서 눌러주었답니다. 한 유대인이 식사 초대를 해서 갔더니만 고기를 썰어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그리고 식사 후에는 TV리모콘을 눌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럴거면 아예 먹지도 말고 보지도 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든 평일이든 상관하지 않고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분명 병자를 오늘도 고칠 것이라고 확신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고발할 꼬투리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거기엔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동정을 받지 못할망정 예수님을 고발하는 도구로 전락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손이 말랐다는 것은 손의 신경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인터넷 기사를 보니 지하철역사에서 폭행을 당하던 한 여인을 돕던 한 남자가 괴한의 칼에 찔려 손가락 4개의 신경이 끊어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엄지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고 나머지는 손가락이 없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오른손이 말랐다는 것은 어깨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신경이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본인이 느끼기에는 이상한 엑세서리가 어깨에 매달려 덜렁덜렁 거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분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저도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대부분이 심한 자의식에 시달리고 남의 시선에 극도로 예민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분은 잠바의 주머니 혹은 바지 주머니에 항상 그 손을 끼어 넣었습니다. 처음에 그 분을 보았을 때 왜 춥지도 않은데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닐까 의아해 했습니다. 나중에야 덜렁거리는 것을 막으려고 주머니로 고정시킨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한 번은 악수를 하려다가 서로 민망해진 적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과연 이런 병자의 고통을 생각하기는 하는 걸까요? 내일 당장 죽는 병은 아니지만 정신과 영혼이 말라가고 죽어간다는 생각은 안 할까요? 우리도 그런 면에선 의식 수준이 선진화되지 않은 면이 많습니다. 지금이야 우울증이라고 하면 조금 이해받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울증이라고 하면 ‘고생을 안 해봐서 그래, 전에는 밥하고 애들 키우느라 우울증 걸릴 시간도 없었다’며 정죄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질병 이상으로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정신적 질병임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한 손이 마르면 그 손으로 인한 불편감도 크지만 마음에 드는 어둡고 슬픈 생각, 긴장감과 스트레스는 더 큰 고통입니다.

우리 중에 한 손 마른 분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한 손 마른 것과 같은 내면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분들은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별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 부끄럽고 감추고 싶고 남 앞에 드러내기 싫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상반신보다 하반신이 유난히 작다는 것 때문에 자기는 늘 펭귄처럼 뒤뚱뒤뚱 거리며 걷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문제는 하반신이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래서 나는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기가 걷는 것을 보며 키득거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낮에 잘 걸어 다니지도 못하고 잘 보이지 않는 밤에만 걸어 다녔다고 합니다. 한 분은 부모님이 50이 넘어서 자신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학교에 오시면 할아버지가 대신 오셨냐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부모가 창피해서 남 앞에서 부모님 얘기도 안 하고 인사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어떤 분은 장애자인 부모님, 혹은 가난한 가정 살림으로 인해 친구들을 집에 한 번도 오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농어촌 전형으로 입학한 것이 부끄러워 친구들에게 그렇게 입학한 사실을 마치 출생의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머리가 지나치게 곱슬머리인 것이 싫어 그 머리를 펴느라 시간을 많이 할애했고 비라도 오는 날이면 머리가 더 말려 버릴까봐 밖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좀 올라간 눈꼬리와 턱과 입술이 좀 튀어나왔다는 생각에 자의식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마다 눈을 크게 뜨려고 했고 입술을 꼬옥 다물고 아래턱을 당겼습니다. 지금은 주님 안에서 자유로워졌지만 이전에는 길거리에 지나가는 여자들이 웃으면 나의 외모를 보고 놀리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뭐 그런 것 가지고 그러느냐고 하지만 당사자가 마음에 느끼는 고통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쌍꺼풀 수술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살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그 문제 자체는 별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손 마른 것 자체가 별 거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갖고 살아가는 그 당사자에게는 별 거 아닌 것이 지구 전체를 떠받는 것과 같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당장 내일 죽는 병만이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나와 함께 있어서 내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위축시키고 어둡게 하는 그 문제가 영적으로는 더 중한 병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런 점을 공감해야 했으나 그들에겐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8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병자에 대한 배려 없이 자신을 공격하고자 하는 그들의 악함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물러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행태에 도전하십니다.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시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면 이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이목이 쏠리고 있으니 있다가 화장실로 오면 고쳐주겠다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냥 고쳐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악함을 고치시고 손 마른 자의 내면까지 치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는 것은 그 문제에서 도망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꾸 숨기려고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고 있습니다. 자 이게 현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내 문제가 아무리 크다고 자꾸 자기 동굴로 들어가 숨어버리면 문제만 더 악화됩니다. 어렵지만 한 가운데 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고 말하십니다. 9절입니다. 안식일이라도 이런 사람을 고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요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한다는데 이를 반대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그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손을 내밀라” 지금까지 꼭꼭 묻어두었던 그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신경이 말랐는데 어떻게 손을 내밉니까? 그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향해 원망의 말을 뱉을 수도 있었습니다. “누구 놀리시는 거예요? 손이 말라 내 밀 수 없는 것 안 보이세요? 누구 물 먹이시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그것을 모르고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기서 믿음과 의지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내밀 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낫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내밀고자 하는 마음을 먹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앞에 계신 분은 허튼 소리를 하는 분이 아닙니다. 창피를 주려는 분도 아니고, 못할 일을 하라고 하는 괴팍한 분도 아닙니다. 아마 손을 내밀기 전에 한 가운데 섰을 때부터 이미 치료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예수님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가운데 섰고 내밀고자 했습니다. 성경은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인격적으로 치료하셨습니다. 이런 행위를 통해 생물학적인 치료만 해주신 것이 아니라 그 마음과 영혼의 마른 문제까지도 치료하신 것입니다. 두려움, 수치심, 자의식, 패배주의, 운명주의 등 손의 마름과 함께 했던 그의 영혼을 얽어매는 죄 요소들까지 치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되 인격적으로 그의 영혼의 병까지 치료하시는 진정한 치료자가 되십니다. 이 사건은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구원이란 나중에 죽어서 천국을 가는 것만이 구원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치료의 감격을 누리는 것이 구원입니다. 손 마른 자에게 있어서 손 마른 문제는 평생 지고 가야할 고통의 짐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예수님은 해결해주셨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던 그 손이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빛나고 가장 존재감을 나타내주는 부위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그 손을 볼 때마다 구원의 감격을 누릴 것이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충만한 삶을 살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한 손 마른 것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까? 너무 오래 돼서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문제는 아닙니까? 예수님이 그 문제를 들고 한 가운데 서서 내게 내밀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람마다 한 가운데 서서 내미는 때는 다 다릅니다. 우격다짐으로 내밀라고 강요한다고 되지 않는 것을 저도 압니다. 다만 예수님이 오른손 마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구원하셨고 그 분이 우리가 믿는 분이요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일을 하길 원하시는 구원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여러분에게도 인격적으로 찾아오셔서 “네 손을 내밀라” 말씀하시는 그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