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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016년 요한계시록 특공대 20강 (계시록 20장) 2017-03-1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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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20강

20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천년왕국(1-6), 둘째는 최후의 심판(7-15)입니다. 이제 20장으로 심판의 대단원이 마무리됩니다.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면 한 해를 생각하며 계획을 세웁니다. 건강에 문제가 있는 분은 5년이나 10년을 두고 플랜을 세우기도 합니다. 본문은 우리의 계획과 비전과 마음이 어디에까지 다다라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1절. 요한이 보니 한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쥐고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말합니다. 무저갱은 9장에서 황충이 나온 곳입니다. 그때도 다섯 번째 나팔을 불던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내려와 열었다고 했는데 지금도 같은 상황입니다.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은 마치 감옥 열쇠를 가지고 있는 간수처럼 그에게 결박할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쇠사슬도 가지고 왔습니다. 2절을 보면 그는 드디어 용을 잡았습니다. 두 짐승을 뒤에서 조종하며 예수님의 탄생과 교회의 성장을 끊임없이 방해하던 용이 드디어 체포당하였습니다. 신출귀몰했던 멕시코 마약왕 엘 구즈만이 잡히고 보니 아주 힘을 못 쓰는 사람이 된 것처럼 지금까지 세상을 호령하던 그가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요한은 그의 이름을 다시 거론하며 그가 어떤 자였는지를 밝힙니다. 2절. 그는 옛 뱀입니다. 그 옛날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여 선악과를 따먹어 죄를 짓고 하나님과 관계성이 어그러지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오늘 신문에 보니 인류를 위협한 존재 중의 1위가 모기, 2위가 사람, 그리고 3위가 뱀이라고 나왔습니다. 물론 본문의 의미와는 다르지만 뱀은 그만큼 사람을 해하는데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마귀라는 말은 ‘디아볼로’로서 ‘비방자, 참소자’라는 뜻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욥을 칭찬하시자 끊임없이 그를 깎아내리던 사탄의 모습 속에서 비방자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도 상대방을 칭찬할 줄 모르고 끊임없이 깎아내리는 것은 매우 사탄적인 것입니다. 또 둘 사이를 교묘하게 이간질하는 것도 매우 사탄을 닮은 모습입니다. 사탄은 ‘사타나스’로서 ‘파괴자, 대적자’라는 뜻입니다. 원래는 일반명사였으나 나중에 고유명사화 되었습니다. 늘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사탄의 속성을 닮은 것입니다. 마귀와 사탄으로 불리는 이 용은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성, 이로 말미암는 생명을 빼앗는데 모든 지혜와 능력을 총동원하여 인류를 대적하는 원수입니다. 우리가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잡혀서 천 년 동안 결박당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집니다. 그리고 잠그고 인봉을 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의 존재 여탈권은 하나님에게 있고 천 년 동안 가석방이란 것이 없습니다. 3절 후반절에 보면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말씀합니다. 놓이는 장면이 7절에 가면 나옵니다. 한 번 잡았으면 영원히 가둬두실 일이지 왜 풀어주신단 말입니까? 이는 그를 따르는 자들을 몰수이 한꺼번에 거둬들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용으로 하여금 알곡와 가라지를 구별시키는 일을 마지막 때에 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사탄을 결박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4절. 요한이 보좌들을 보는데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앉았습니다. 그들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첫째 부류는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영혼들입니다. 이사야도 목 베임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바울도 그렇게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요즘 IS도 크리스천들을 그렇게 죽이고 있고 12년 전 김선일씨도 그렇게 죽었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를 매우 슬프게 합니다. 가장 힘없고 억울한 삶을 산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탄을 결박하고 천년 왕국을 누리는 자들의 첫 번째는 바로 그와 같은 분들입니다. 다음으로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생활에 많은 제약이 따르더라도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믿음의 순결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합니다. 그들이 산다는 것은 첫째 부활을 했다는 말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이 천년 왕국의 핵심입니다. 

인간은 본래 어떤 존재였습니까? 창1장은 인간이 여느 피조물과 같은 존재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왕 같은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에 동참시키시는 것은 원래 처음 창조의 목적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세상을 다스리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열매를 충만하게 맺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죄와 피조물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미움과 정욕과 죽음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까지 계속되는 우리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탄은 갇히고 창조 시 하나님이 주셨던 그 복을 회복합니다. 종말은 단순한 세상의 마지막이 아니라 처음 창조 시로의 회복입니다. 우리 삶을 어린 양 예수님 안에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5절.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나머지 죽은 자들은 불신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6절을 보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복이 있습니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둘째 사망이란 영원한 불 못으로 떨어지는 심판을 말합니다. 4절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한다는 것을 여기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우리 신자의 신분이 종말의 때에 왕 같은 제사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천년 왕국은 언제 이뤄집니까? 여기엔 여러 이론들이 있습니다. 후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역사적 전천년설, 그리고 현천년설(무천년설) 등이 있습니다. 후천년설은 천년왕국 이후에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이론입니다. 전천년설은 천년왕국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는 것인데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대 환란 전에 예수님이 공중에 몰래 재림하셔서 믿는 자들은 휴거하고 공중에서 잔치를 베푼다는 이론입니다. 역사적 전천년설은 대 환란을 성도들과 불신자들이 같이 통과하고 대 환란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며 어떤 방법으로든지 휴거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천년설은 천년은 상징이고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종말 기간을 천년으로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은 천년 왕국 이후에 펼쳐지니 그런 면에선 후천년설과 비슷합니다. 천년은 다른 숫자가 그렇듯이 예수님과 왕노릇 하는 본질로의 회복이 온전히 이뤄지고 아무도 이것을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을 천 년이라는 숫자로 나타낸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역사적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이나 칼빈은 다 무천년설주의자였습니다. 무엇을 받아들일지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이것가지고 싸워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어느 것이 확실히 맞다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받아들이든 예수님은 재림하실 것이고 성도들은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고 세상과 구별된 천국을 누리게 되는 것은 동일합니다. 

7절.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였습니다.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인다고 말합니다. 곡과 마곡은 겔38,39장에 나오는 북방민족의 왕과 나라를 말하는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상징합니다. 사탄은 바다 모래처럼 많은 사람들을 모읍니다. 그래서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영과 사랑하시는 성, 곧 교회를 삼킬 것처럼 둘러쌉니다. 이는 최후의 발악입니다. 그러나 발악은 발악일 뿐 아무 일도 못하고 오히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립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들을 미혹하던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19장에서 본 것처럼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들어간 곳입니다. 그들은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을 따르던 자들을 심판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11절. 요한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를 보는데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고 말합니다. 여섯째 인을 뗄 때 이런 일이 벌어졌었습니다. 하늘이 말려서 떠나가고 섬들이 제 자리에서 옮겨졌다고 말했습니다(6:13,14). 이는 사탄의 심판과 함께 사탄이 다스리던 영역도 다 사라지고 뭐든지 새롭게 됨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일찍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라고 말했습니다.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된 신자들은 옛 것에 매여 살 수 없습니다. 

12절. 요한이 보는데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죽은 자들은 성도들이 아니라 불신자들을 의미합니다.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다 그 보좌 앞에 서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들은 모든 유태인들을 곳곳에서 붙잡아서 아우슈비츠로 싣고 왔습니다. 교수도 있고 음악가도 있고 갑부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치 앞에서는 그런 전력이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노동을 할 수 있는 가 노동을 할 수 없는 가로 나누어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바로 목욕탕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목욕탕은 가스실이고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롬14:10). 

보좌 앞에 책들이 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생명책이라고 말합니다. 2차 대전 때 체코의 의사인 오스카 쉰들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자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방대한 양의 리스트를 만듭니다. 자기 공장에서 필요한 사람이라고 요청하는 리스트입니다. 심판관은 다른 것은 보지 않고 그의 이름이 거기에 적여 있는가만 보았습니다. 적혀 있으면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구원한 사람이 천여 명에 다다른다고 합니다. 이처럼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고 다른 책들에 기록되어 있으면 그는 심판을 받습니다. 이 책들은 살생부입니다. 재밌는 것은 살생부는 ‘책들’이라고 복수로 나와 있고 생명책은 단수로 나와 있습니다. 구원받는 사람보다 심판 받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의 행위가 낱낱이 그 책에 기록됨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일도 그 책에는 육하원칙에 기초해서 선명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아무도 변명하지 못하게 합니다. 13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줍니다. 아주 오래 전 바다에서 익사한 사람도 그 날에는 다시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한 번 죽으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심판이 있습니다. 사망과 음부조차도 죽은 자들을 내줍니다. 가장 강력한 세력은 사망이요 음부입니다. 이것을 의인화시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죽음을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죽음도 자신이 삼켰던 사람들을 다 토해내야 합니다. 그들도 다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14절을 보면 마침내는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진다고 말합니다. 이는 인류 위에 왕 노릇을 하던 죽음이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5,57)” 15절.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눅10:20).  

우리의 눈이 어디까지 바라봐야 합니까?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well dying도 아닙니다. 우리의 눈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는 천년 왕국과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받는 둘째 사망, 곧 불 못까지 봐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죽으면 차라리 모든 게 끝이면 좋겠지만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들을 불편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로도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오직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서 생명책에 기록되고 천년 왕국에 참여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