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5강
4장은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여주었고 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대로 피조된 세상은 움직여짐을 보았습니다. 이제 5장은 예수님에게 포커스를 맞춥니다. 그는 구속주이십니다. 계시록의 저자는 그가 어떤 분인지 소개하면서 그를 바라보도록 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에겐 한 두루마리, 곧 책이 있었는데 안팎으로 씌었고 아무도 열 수 없도록 인으로 봉해 있었습니다. 두루마리 안팎으로 쓰인 책은 겔2장에 처음으로 나옵니다. 그 책은 심판에 관련된 책이었습니다. 또한 다니엘서 12장을 보면 마지막 날에 관련된 책을 주님이 다니엘에게 인을 쳐서 마지막 날까지 잘 간수하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책은 바로 그런 책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책입니다.
그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기록된 책입니다. 우리는 보통 중요한 내용, 즉 학위 논문 같은 것은 단면으로 인쇄할 때가 많은데 당시에는 반대였습니다. 평범한 글은 단면에 쓰고, 중요한 글은 양면에 썼습니다. 그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양면으로 쓰고 일곱 인으로 봉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쯤 되면 아무나 그 책을 열어서도 안 되고, 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한 천사가 이 책을 펴기에 누가 합당하냐며 책을 펼만한 사람을 찾습니다. 그런데 하늘에도, 땅에도, 지하에도 그 책을 펴서 읽을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더왕처럼 돌에 박힌 명검 엑스칼리버를 확 뽑아버리는 사람이 나타나면 좋겠는데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도 요한은 크게 울었습니다(4). 책을 펼 사람이 없기로 왜 할아버지가 되어가지고 운단 말입니까? 책이 펼쳐져야 하나님의 구속과 심판이 실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90세가 넘어서까지 살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곳 밧모섭에 위배를 당하면서까지 믿음을 지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구원하시고 심판하실 것을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럭비공처럼 우연히 튀다가 물안개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 세상이 아닙니다. 처음이 있었으니 마지막이 있어야 하고 행한 대로 보응이 있어야 합니다. 약속을 받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을 믿고 멀리서 환영하며 죽어간 믿음의 선진들은 어떻게 된단 말입니까? 장차 부활을 소망하며 수고하다가 죽어간 동료들은 어떻게 된단 말입니까? 만일 구원과 심판이 없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신자들이 가장 불쌍한 자가 되지 않습니까?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이 아직도 한을 갖고 우십니다. 젊음을 빼앗겼던 그 한을 풀지 못했는데 박근혜 정부와 아베 정부가 적당히 협상을 한다고 눈물이 그쳐지겠습니까? 99년 이태원 한 패스트푸드 화장실에서 살해된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서로 상대방이 죽였다며 아직도 이실직고를 하지 않는 두 명의 미국인들을 다 죽이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외아들이 그렇게 비명에 갔는데 어디서 그 한을 푼단 말입니까? 법의 공정한 심판을 바라고 또 바라고 있습니다. 이처럼 구원과 심판이 없다면 요한의 눈에선 눈물이 마를 수 없습니다. 우리 눈에서도 눈물이 마를 수가 없을 것이요 신앙생활 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허무한데 굴복하는 피조물들이 몸의 구속을 바라면서 그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탄식하는 것이 반드시 갚아져야 합니다.
요한이 우는 데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말합니다. 5절을 보면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하였습니다. “울지 말라”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의 장례 행렬을 멈춰 세우시고 ‘울지 말라’ 하신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울 이유가 없는 데 왜 우느냐는 것입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답니다. 유대 지파에서 오신 다윗의 후손, 예언된 그 분이 이기셨답니다. 우린 2,3장에서 주님이 교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한결같이 ‘이기는 자’가 되도록 말씀을 하셨는데 여기서 보니 주님이 먼저 이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기셨습니다. 그가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뗄 자격이 있습니다. 이 메시지 앞에서 요한의 눈물은 비로소 그쳐지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우린 세상 속에서 양들 문제 때문에, 동역자들과의 갈등 때문에, 혹은 여러 어려운 일들 때문에 웁니다. 그 눈물을 그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의 승리하심에 있습니다. 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이기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인을 떼고 책을 펴면 구원과 심판이 시작됩니다. 구원과 심판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동시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제 요한은 눈물을 그치고 이겼다고 하는 그 유대 지파의 사자를 찾습니다. 사자라고 하니 분명 용맹하고 박력 넘치게 생겼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충격적인 장면을 봅니다. 6,7절을 봅시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보좌와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초라해 보이는 한 어린양이 있었습니다. 그에게서 처음으로 들어오는 인상, 그것은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자라고 하면서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니요?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다고 하는데 일곱은 완전을 상징하고 뿔은 권세를 상징하고 눈은 지혜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어린양은 완전한 권세와 완전한 지혜를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권세와 지혜로 하신 일이 어린양으로서 죽는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로마 황제처럼 칼과 폭력으로 이긴 자가 되신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서 이긴 자가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자기희생을 통해 죄를 이기셨고 사망을 이기셨고 사탄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하여 구원자요 심판의 주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마치 세자 책봉식에서 임금으로부터 계승자로서의 조서를 받는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두루마리를 받습니다. 이는 계시록 이전의 모든 복음서의 결론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린양으로서 죽으심으로 그는 영원히 이긴 자가 되시고 세상에 종말을 가져오신 분입니다.
왜 주님은 이 모습을 보여주셨을까요? 당시 교회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것처럼 매우 힘든 상황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세상을 휘어잡을 카리스마와 능력을 소원했을지 모릅니다. 사자처럼 한 번 울부짖으면 주변이 떠나가고 주변 사람들이 다 떠는 그런 성도가 되고 싶어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바라보도록 하신 장면은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기었고 두루마리를 받아들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로마 황제처럼 사자로 자신을 나타내는 방법은 승리하는 것 같지만 실패합니다. 강한 것 같으나 약합니다. 반면 어린양을 통한 방법은 실패하는 것 같으나 승리하고, 약한 것 같으나 강합니다. 죽임을 당하는 어린양이 될 때 결국 구원과 심판을 여는 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희생을 통한 승리의 길을 가는 곳이지 정복을 통한 승리의 길을 가는 곳이 아닙니다. 8절을 보면 어린 양이 그 두루마리를 취하실 때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립니다. 아! 빌2장의 말씀처럼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만유가 무릎을 꿇고 주로 시인하는 그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그들의 손에는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이 들렸는데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심판의 역사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기도는 성취된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시는 종말의 역사의 근간에는 성도들이 드린 기도가 밑받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그들이 새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새 노래란 옛 노래와 대조된 표현입니다. 옛 언약이 있고 새 언약이 있듯이 옛 노래가 있고 새 노래가 있습니다. 옛 노래는 출15장에 나오는데 홍해를 건너고 뒤따르던 애굽 군대가 홍해에 몰살된 직후에 미리암의 소고 장단에 맞춰 모세와 백성들이 부른 노래입니다. 애굽 군대를 심판하시고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노래였습니다. 그런 노래를 이제 또 다시 부릅니다. 애굽 군대와 같던 죄와 사탄의 권세를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박살내신 것입니다. 그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영원히 구원하신 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다고 노래합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라고 노래합니다. 이것보다 복음을 신나게 증거하는 노래가 어디 있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의 죽임 당하심과 흘리신 피로 우리를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한 나라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11절을 보면 만만이요 천천인 천사들의 음성이 들립니다. 셀 수 없는 천사 무리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계속 반복되고 있는 문장이 무엇입니까? ‘죽임을 당하신’입니다. 우리가 그 분에게 영광을 돌려드리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많은 이적을 행하셨기 때문도 아니요 기막힌 말씀을 많이 하셨기 때문도 아니며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든 피조물로부터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받으실 제목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들 중에 죽임 당함 이상의 능력의 일도 없고 부요한 일도 없고 지혜로운 일도 없고 힘 있는 일도 없고 존귀한 일도 없고 영광스런 일도 없고 찬송을 받을 만한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당하신 그 사실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찬양하고 사랑하고 신뢰하며 따라갑니다.
이어서 하늘 위와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이와 동시에 네 생물이 아멘 하며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이 동시에 동일한 찬양과 경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본질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임을 나타내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찬양은 예수님께도 그대로 돌려드려져야 할 것입니다. 두 분의 위격이 차이가 난다고 말한다면 이단이 될 것입니다.
6장부터 시작되는 재앙들의 앞에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의 주 예수님을 나란히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과 예수님이시며 그 분들은 같은 분임을 나타내고자 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보좌에 앉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하신 일이 결국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실현됨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창조의 목적은 구속을 통해 완성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보고 싶은데 그것을 이룰 자가 없어서 요한처럼 울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후회하지 않고 이 길을 가며 최후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죽으심으로 이긴 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의 보좌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옆에 죽임 당한 어린 양에게 우리 시선이 늘 고정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장로들과 온 피조세계가 그렇게 했듯이 그의 죽으심을 세세토록 찬송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