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가을 수양회 주제강의 2강 / 김게바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말씀 / 마가복음 10 : 32 -45 요절 / 마가복음 10 :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한 동안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하였습니다. 요즘은 ‘갑질’라는 단어가 인터넷상에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갑질‘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힘 있는 자가 군림하고 지배하는 사회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알게 모르게 높임 받고 군림하려는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 살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사회적으로 약자인 ‘을’이었습니다. 드디어 이들에게도 ‘갑’ 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제자들은 권력을 등에 업고 마음껏 ‘갑질’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큰 자는 ‘갑질’하는 자가 아니라 먼저 낮아지고 섬기는 자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삶으로 섬기는 자가 진정으로 큰 자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저희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떤 자가 큰 자인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희 모임이 섬기는 가운데 하나가 되고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이번 예루살렘 행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온전히 이루시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위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길은 고난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사형수가 형집행장으로 끌려갈 때 조금이라도 천천히 가려고 몸부림 칩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으로 천천히 가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앞서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도 제자들보다 앞서 나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이번 예수님의 모습은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셨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결연한지 제자들이 놀라고 무리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이미 두 번 말씀하셨습니다. 이때마다 제자들은 못들은 체 딴청을 피웠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놀라고 두려워 하였다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다 모인 곳입니다. 적진의 한 가운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곳으로 앞서 나아가시니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예수님은 두려움이 가득한 제자들에게 3번째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보라!”는 말로 예수님은 제자들의 주위를 환기시키시고 자신의 말에 집중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게 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로마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깁니다. 빌라도는 군병들에게 넘기고 군병들은 예수님을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십니다. 예수님은 앞에 두 번과 달리 이번에는 죽으실 장소와 이방인에 의해 죽게 될 것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마치 과거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처럼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자들에게 이처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강조하시는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인간들을 구원할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 하자마자 자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인간들 대신 죽게 하시므로 인간들을 구원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선지자를 통하여 이를 예언하셨고 마침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서 죽게하시고 부활케 하시므로 그 약속의 성취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속 역사를 직접 눈으로 보고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의 어깨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관심사는 무엇이었을까요?
35-37절을 보십시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청하였습니다. “주님 주의 영광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소서” 그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곧 지상메시야 왕국이 이루어 질것이라고 생각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12제자가 권력을 나누어 가질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 최고의 권력가가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 졌습니다. 자신들보다는 경쟁자인 베드로가 그 자리에 앉을 확률이 높은 것이 팩트였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총리가 되어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생각하면 도저히 견딜 수 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를 밀어내고 자신들이 권좌를 차지하여 세상을 호령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들을 베드로보다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간청하였습니다.
저는 이들의 마음을 매우 잘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풀타임 시절 ‘스탶목자’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앞에는 쟁쟁한 선배가 두 명이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두 명의 선배가 교통사고가 나서 센타에서 사라져 주기를 간절히 바란 적이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의 영혼이라도 팔아서 권력을 쟁취하고 싶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습니다. 이는 도저히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분노의 하이킥’을 그들의 얼굴에 날리는 것이 당연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의 교만과 무례함을 넘어선 오만방자함을 끝까지 참으시고 인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자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수 있는가 차분하게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38-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들은 예수님 좌우편에 앉기 위해서는 어떤 고난의 길을 가야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여기서 예수님이 마시는 잔과 받는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해 고안해 낸 형벌 십자가형입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형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것도 3번이나 반복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 길을 갈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할 수 있나이다“ 그들은 자신이 마셔야 할 잔이 예수님이 혁명을 일으키실 때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영적으로 무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의 고백을 영적으로 승화시켜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로 성장하기 까지 감당하시고 섬겨주셨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자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좌우편 자리는 인간의 노력으로 쟁취하거나 선행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청탁한 사실이 열 제자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제자들 사이에 심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 열 제자 모두가 화를 내었다는 것을 볼 때 서로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모두가 야고보와 요한과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가치관은 여전히 세상 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불러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는 다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예수님 당시 로마 집권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렸습니다. 이것은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난 정권의 국정농단 사건입니다. 그들은 권세를 이용하여 대기업을 압박하여 출연금을 강요 하였습니다. 또 유령 회사를 만들어 국가 지원금을 통째로 빼돌렸습니다. 심지어 최순실씨는 대기업에게 승마를 하는 자신의 딸에게 명마를 지원하게 하고 명문대학 학장에게는 자신의 딸을 입학시키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이들은 권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는데 몰두하였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의 모습니다.
제자들도 이들처럼 최고의 자리에 올라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세상을 호령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될 수 만 있다면 자신들을 성공한 사람이요 큰 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큰 자’, ‘위대한 자’가 어떠한 자인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43-44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아 섬김 받고 명령하는 자가 큰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전면 부정하셨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 노예들은 물건취급을 당했고, 일생 주인을 섬기며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종과 노예가 되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섬기는 자’, ‘모든 사람의 종’이란 신분적인 의미보단 그 사람의 내면성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섬김의 내면성을 가지고 섬기는 자가 진정으로 크고 위대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섬기는 자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첫째, 겸손한 자입니다. 겸손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모든 사람은 존귀합니다. 또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훌륭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서로 존중하고 상대방의 장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높여 줄 때 내가 낮아질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여긴다고 내가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높여 줄 때 상대방도 은혜를 받고 마음으로부터 나를 인정하게 됩니다. 특히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낮아져서 겸손히 섬길 때 더 큰 은혜가 되고 더 큰 존경을 받게 됩니다. 서로를 낫게 여기고 존중해주는 공동체는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이런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어느 공동체가 행복이 없고 메마르고 갈등이 많다면 이는 남을 높여주기보다 자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서로 상처만 받고 모임이 사분오열 됩니다. 저희 모임이 서로가 겸손하게 낮아져서 섬김으로 은혜와 사랑이 충만한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한 사람의 ‘죄 문제’와 끝까지 씨름해주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로 인해 병든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기심, 열등감, 무기력, 정욕, 분노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것이 매우 부담이 됩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만 들어도 신경이 곤두서고 거부감을 느낍니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먼저 듭니다. 그러나 섬김이란 이런 상황에서도 자기를 부인하고 상대방을 영접해 주는 것입니다.
섬긴다고 해서 무조건 감당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죄 문제와 씨름해주고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필요하면 훈련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사람이 되도록 도와야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의 영적 투쟁이 필요하고 자기희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할 때 한 영혼이 회복되고 살아납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살리는 일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 안에서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단 12:3).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예로 들어 우리가 왜 섬기는 삶을 살아야만 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이 땅에 원해서 온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부모에 의해서 태어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이라고 말씀 하시므로 자신의 의지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첫째, 섬김 받기보다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인생들로부터 찬송과 경배와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 받고자 하는 마음을 부인하셨습니다. 도리어 섬기고자 결단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일생 죄인들을 낮아져 섬기시고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둘째,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대속’이란 노예를 풀어주기 위해 지불하는 몸값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사탄의 권세에 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밖에 없는 고귀한 생명을 희생하시기까지 인생들을 섬기셨습니다. 이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럴 수도 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우리를 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너무 커서 자신의 전 생애를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드리고자 결단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내어놓기 까지 섬기시므로 가장 큰 자가 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섬기는 자가 진정으로 위대한 자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학생시절 저의 꿈은 지부장 선교사가 되어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즈백에 선교사로 나가 있던 조이 사모님이 비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귀국하는 순간 저의 꿈은 무너졌습니다. 저는 늦은 나이에 평신도 목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독일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2년 만에 비행기 삯도 빌려서 귀국해야 만 했습니다. 반 지하 단칸방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직장에서 여상사와의 갈등으로 인사적 불이익을 당하였습니다. 이는 저에게 극심한 스트레스가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모임에서 제가 팀 목자로 세움 받지 못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또 요회 리더들을 돕는 과정에서 스탶목자님 가정과 반복적으로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이로인해 저는 모임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직장에서도 모임에서도 마음을 둘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실패자가 된 것 같아 몹시 괴로웠습니다. 이로 인해 신경이 갈수록 예민해져 갔고 직장생활을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가 되었습니다. 결국 직장을 퇴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저희 모임에서도 주일예배를 제외한 모든 모임에 불참하였습니다. 저는 사람과 모임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여과없이 표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삶은 저를 더 망가뜨리고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리게 하였습니다. 저는 결국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동역자와 밤마다 감사제목을 발표하고 합심기도를 하며 저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의 문제는 높임받고 섬김받고자 하는 마음이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이 모임과 직장에서 제가 갈등하게 된 요인이었습니다. 저는 이를 회개하였습니다. 이때 주님은 사업과 신앙적으로 회복의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런 와중에 2부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분들이 힘들어 하였습니다. 이때 저는 모임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제가 상처받았다는 생각에 지도자들의 약점을 판단하고 정죄하였습니다. 자존심을 내세우며 상대방이 먼저 사과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가까이하려고 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제자들과 같이 ‘누가 크냐?’ 하며 다투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저에게 오늘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제가 모임이 어려울 때 겸손히 상대방의 약점을 감당해주고자 씨름하지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아직도 높아지고 대우받고자 하는 마음이 충만하여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요구하는 마음이 많이 있는 것을 회개합니다. 제가 변하지 않으면 저는 끊임없이 큰자가 되고자 다투는 삶을 살 것입니다. 제가 이제는 죄악된 자기를 부인하고 먼저 겸손히 낮아져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처럼 섬김으로 큰 자가 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섬김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섬기는 자가 진정으로 위대한 자임을 배웠습니다. 저희 각자가 예수님의 섬김의 도리를 배워 진정으로 위대한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서로를 인정하고 높여주는 가운데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은혜와 기쁨이 충만한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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