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봄맞이 수양회 제 2 강 성경의 능력 말씀 / 디모데후서 3:1-17 요절 / 디모데후서 3:16, 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여 명문 대학에 가려 하고, 스펙을 많이 쌓아서 좋은 회사에 취직하려고 합니다. 돈 많은 부모도 능력이라고 하는 세상에서 돈도 많이 벌려고 합니다. 비주얼도 빠지면 안 되기에 외모도 열심히 가꾸고, 피트니스 센터에서 몸만들기에도 열중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과연 능력 있는 사람이 될까요? 사람들이 보기에 이런 모든 조건을 갖추고 능력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도 사실은 이기적인 야심을 좇아 살다가 수많은 죄를 짓고 고통합니다. 외모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내면에는 죄악된 소욕이 가득하여 냄새가 나고 그 삶은 추하기만 합니다. 능력이 있어 보이는데, 선한 열매는 하나도 맺지 못합니다. 그래서 능력을 인정 받아 높아지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기적이다, 교만하다, 추하다며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이런 인생들은 결국 능력이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능력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가 진정한 능력을 성경에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도대체 성경에는 어떤 능력이 있을까요? 이 시간 다같이 성경의 능력을 알아보고, 성경이 주는 능력을 얻어 선한 열매를 많이 맺는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같이 1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대대적인 박해가 있을 것임을 예견한 말씀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구속사적 관점에서는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말세에 있게 될 고통을 말합니다. 여기서 고통하는 때란 영어로 보면, 'perilous times'로 ‘어렵고 괴로운 때’를 말합니다. 또 RSV 성경을 보면, ‘times of stress'로 ’스트레스가 많은 때‘를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생각하면 한 마디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사람들은 극한의 생존경쟁에 내몰려 서로를 돌아볼 여유가 없고 소외감과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립니다. 정치 불안과 전쟁 공포, 자연재해와 환경 파괴 같은 것이 우리를 스트레스 받게 합니다. 현대인의 질병 중 90%가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1년에 80만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끔찍한 현실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시대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죄’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4절까지 말세에 나타나는 죄들의 목록을 나열합니다. 그 죄의 목록은 로마서1:29-31에 기초한 것입니다. 가장 앞에 있는 ‘자기 사랑’은 그 뒤에 나오는 모든 악덕들의 근원이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자기에게 많은 세상적인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돈을 사랑하다보면 신으로까지 섬기게 됩니다. 그래서 노예처럼 돈이 하라는대로 다 하다가 사람을 해치고, 속이기도 하고, 심지어 국정을 농단하여 감옥에 가기도 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또한 돌팔이 약장사처럼 공허한 호언장담을 하며 자랑을 하고, 교만하여 남을 멸시하고 자기를 높입니다. 그 결과로 윗사람의 권위도 무시하고 비방하며, 십계명을 어기고 부모를 거역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섬기지도 않고 거룩함을 저버립니다. 무정하여 혈육 간에도 애정이 없고, 상처 받은 일로 원통함을 풀지 않습니다. 남을 헐뜯어 모함하고, 절제하지 못하여 감정과 욕망의 지배를 받습니다. 사납고 포악하며, 선을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한 것을 생각조차 하기 싫어합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친구도 배신하고, 조급하여 경솔히 말하며 자만합니다. 무엇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쾌락을 사랑합니다. 젊은이들은 말초적 쾌락을 즐기기 위해 포켓몬 잡기에 열중하고, 조건 만남을 하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주말마다 등산을 하며 불륜 상대를 찾기도 합니다. 말세에는 이러한 죄들이 넘쳐나서 신자들까지도 이런 죄들에 물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매주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경건의 모양을 갖춘 신자라도 경건의 능력은 부인합니다(5a). 그들은 예배에서 좋은 말씀을 듣고도 한 귀로 흘려버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아니 순종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라고 하지만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세상 죄에 물들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한 죄도 짓습니다. 이러한 신자들을 향해 세상은 ‘개독교’라고 비난합니다. 바울은 이런 말세에 디모데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까? 5b절을 보십시오.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돌아서라’는 말은 그들의 삶의 양식을 본받지 말고 과감하게 주님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말세에 우리 신자들은 인본주의와 물질주의, 쾌락주의의 세상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좇아 살아야 합니다. 죄의 세력은 강하고 끈질깁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돌아서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악에 끌려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돌아서되 180도로 돌아서야 합니다. 특히 디모데는 양들을 악한 세상에서 보호하고 그들을 지키고 올바르게 양육해야 할 책임을 맡은 목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분명하게 돌아서서 세상의 죄악과 조금도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교만히 행해도 주의 종들은 겸손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살아도 주의 종들은 섬기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다 돈을 사랑해도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절제하며, 친절하며, 용서하고, 화목해야 합니다. 경건의 능력을 덧입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6, 7절을 보십시오. 당시 헬라 사회에는 지식 욕구가 강하여, 부유한 집의 여자들이 학문과 예술을 배우기 위해 학자나 예술가를 집에 초청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영지주의 교사들은 초청을 받아 그들을 유혹하여 잘못된 이단 사상과 도덕적 타락에 빠뜨리고는 하였습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여자는 그 뜻이 ‘작은 여자’로 도덕성이 결여된 여자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여자들은 죄를 짓고, 자기의 죄를 신비한 지식으로 벗어나려고 애쓰다가 더욱 육체적 욕망에 빠져, 죄 위에 죄를 더하고는 하였습니다. 그들은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진정한 지식인 복음을 얻고자 배운 것이 아니라 현학과 스릴을 얻기 위해 배웠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복음의 지식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거짓 선생들의 결국은 어떠합니까? 8, 9절을 보십시오. 얀네와 얌브레는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바로 앞에서 이적을 행했을 때 비슷한 이적을 행한 마술사들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겉으로는 진리의 사도인 척했으나, 실상 그들은 얀네와 얌브레처럼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요,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입니다. 애굽의 마술사들이 모세의 등장으로 그들의 거짓된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처럼 거짓 교사들의 어리석음도 마침내는 진리의 빛 가운데 드러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면 디모데가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면서 기억해야 할 바가 무엇입니까? 10, 11절을 읽겠습니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은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내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디모데는 바울의 가르침과 삶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적인 교훈을 주었습니다. “교훈”이 제일 먼저 언급된 것은 그 영향이 가장 크고 디모데의 영적 가치관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행실”에 대해서는 디모데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말로 교훈했을 뿐 아니라 그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의 “의향”은 그의 인생목적을 말합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일을 이루기 위해 오래 참으며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디모데는 이런 바울의 삶의 목격자였습니다. 바울은 제1차 선교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많은 회심자들을 얻었으나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아 추방되었습니다. 그는 이고니온으로 갔으나 그 곳에서도 말씀을 전할 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고향인 루스드라로 피신하였고 거기서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곳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서 거의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죽은 줄 알고 둘러 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나 다시 그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디모데는 아마 그 둘러싼 제자들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지 잘 보았고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런 자신의 삶을 상기 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1b, 12절을 읽겠습니다.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바울이 이 모든 박해와 고난을 당할 때,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울을 건지셨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이를 기억하고, 박해를 받아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 때, 박해를 받을 수 있고,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해야 할 것은 주께서 우리를 건져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이 확신 가운데서 우리가 각오해야 할 바가 무엇입니까?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오늘날 종교 자유가 보장되는 문명사회에서는 바울 시대 같은 박해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진실하게 신앙생활하려 할 때 많은 박해를 받게 됩니다. 헌신적으로 복음역사를 섬기다가 가족들에게 불효자로 오해를 받고 미움을 사기도 합니다. 제사를 안 지낸다고 호적을 파겠다는 위협도 받습니다. 같은 사명을 가진 신자와 결혼하려다가 극심한 박해를 받기도 합니다. 군에서도 신앙을 지키려고 고난 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술, 담배 안하고 퇴폐적인 회식을 거부한다고 혼자 깨끗하냐며 따돌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고난을 감당할 때 반드시 주님께서 승리를 주십니다. 박해를 통해서 믿음의 뿌리가 견고케 하시고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말세에 세상은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이 넘쳐 납니다. 그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을 상실합니다. 남을 속이기도 하지만 자기도 거짓과 악에 넘어가 스스로 속고 맙니다. 이런 속임수가 난무하는 말세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4a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라고 합니다. 디모데가 배우고 확신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그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성경을 배웠습니다(15a). 또한 바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진리를 배웠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디모데는 성경에 기초한 복음 진리를 깊이 영접하고 확신하였습니다. 바울은 그가 배워서 확신한 이 성경적 진리에 거하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거하라’는 것은 원어로 보면 그 상태를 유지하며 계속 머물라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이 성경 진리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성경에 놀라운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어떤 능력이 있을까요? 첫째, 성경에는 구원을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구원에 이르는 지혜’, 이는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수많은 죄와 인생의 여러 난제들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태어나고 죽게 되는 것인지, 왜 나는 죄를 짓고 죄책감으로 고통 하는지, 누구도 속 시원히 대답해주지 않습니다. 불철주야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얻으면 알 수 있을까요? 철학책을 많이 읽으면 알 수 있을까요? 산에 들어가 면벽수도를 하면 알 수 있을까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구원을 얻는 지혜는 성경 안에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란 에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여 죽음을 정복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의 복음 진리를 믿음으로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동서고금 철학과 사상, 유대교의 율법에 능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짓누르는 중한 죄짐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고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었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난 한 형제가 있는데, 그는 불량청소년인 동생을 포기하지 못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늘 사랑에 목말라 했습니다. 대학에 들어온 그는 한 자매를 만나 그 사랑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일방적 통보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지방의 한 대학원에 내려가 이를 잊어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고 매일 피시방에서 몇 시간씩 게임을 하고 술을 마셨습니다. 밤마다 소주를 세병씩 마셔야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이 형제가 한달동안 마신 소주가 120병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자취방에는 소주병이 가득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공부하고 연구해야지 하다가도 저녁이 되면 피시방에 가서 게임을 하고 술을 사서 마시는 자신을 보며 절망했습니다. 그 때 한 UBF 목자님이 그를 찾아왔고 말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뺀질거리며 영 변할 기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님들이 포기하지 않고 심정을 가지고 계속 도전하여 말씀 공부를 할 때 점점 말씀이 들어가고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문제를 발견하고 소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말씀을 통해 자신이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십자가에서 다 대속하셨음을 믿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고, 그의 심령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화가 임했습니다. 이 후 그는 우울증과 불면증에서 깨끗이 벗어나게 되었고, 연구도 잘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캠퍼스 목자가 되어 양들에게 식사도 대접하고 자기 차로 센터로 픽업도 해주며 섬기다가 최근에 믿음의 가정까지 이루었습니다. 능히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시는 성경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립니다. 둘째,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려면 교육을 잘 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해지기 위해서도 교육을 잘 받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좋은 교사와 좋은 교재가 필요합니다. 교사는 예수님이시기에 문제가 없고, 교재가 문제인데, 성경이 바로 베스트의 교재입니다. 16b-17절을 보십시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교훈’은 복음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책망’은 ‘유죄 판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된 사상이나 오류를 바로 잡고 거짓을 밝혀내는 것을 말합니다. ‘바르게 함’은 ‘추를 바로 세우다’는 뜻인데 신자들을 진리와 사랑으로 바로 잡고, 그 길로 정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의로 교육함’은 ‘하나님의 공의를 기준으로’ 훈련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유익합니다. 이렇게 성경으로 교육할 때,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양 무리를 섬기는 책임을 맡은 일꾼들, 즉 영적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온전케 한다는 말은 “That the man of God may be perfect"로 ‘완벽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처럼 완벽해질 수는 없지만 그 내면성에 흠잡을 데가 없는 충분히 성숙한 일꾼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케 한다는 ”thoroughly furnished"로 온전히 준비시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이 지식과 힘과 능력이 부족해도 성경에 있어 탁월하면 무슨 일을 맡든지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에도 낙심하지 않고 도전하며 복음의 원수들을 파하고 믿음의 승리를 이끌어 냅니다. 결국 하나님의 큰 영광을 드러냅니다. 나아가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공부할 때 말씀은 우리를 새롭게 하고 우리에게 내적인 힘을 줍니다. 말씀을 겸손히 들을 때 그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회복시켜주고 주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힘이 솟구치게 합니다. 하늘의 지혜를 주고 영적 분별력을 줍니다. 담대한 마음과 용기를 줍니다. 관악3부에 있는 한 목자님은 학생 때 친구를 괴롭히는 일진들에게 대항하다 심한 왕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울증에 걸려 의사로부터 치료 불능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출세해서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대학에 왔습니다. 그러던 그가 목자님을 만나 성경 공부를 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용서의 사랑 앞에 회개하고 증오의 칼날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우울증도 깨끗이 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감사하여 캠퍼스 후배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대에 가서도 그의 사랑이 인정을 받아 사병들의 고충을 상담해주는 고충상담병으로 일했습니다. 대학원에 가서는 성경에서 연구 아이디어를 얻고 기도 가운데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연구하여 서울대 공대 대학원생 역사상 최초로 네이쳐지에 제1저자로 논문도 내게 되었습니다. 지난해에는 교수가 되어, 교수 목자로서 캠퍼스 양들을 헌신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어떻게 이런 놀라운 능력이 있을까요? 16a절을 보십시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여기서 ‘모든 성경’의 문자적인 뜻은 ‘모든 책’으로 그 의미는 각각의 성경책을 말합니다. 성경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감동으로’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셔서’라는 뜻입니다. 곧 성경의 모든 부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영, 곧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것처럼, 성경도 사람이 기록한 책이지만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그 전능한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가장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공부하면 감동을 받고 능력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서도 캠퍼스 1학년때만 해도 자기 하나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연약했던 사람들이 성경을 꾸준히 공부하더니, 어느새 여러 후배들을 섬기는 능력있는 목자가 되고, 더 나아가 전세계 곳곳에 복음을 들고 누비는 위대한 선교사의 삶을 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순종하는 삶을 살 때 2041년까지 10만 선교사 파송의 역사를 능히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얻어서 선한 열매를 풍성히 맺는 복된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기독교계 학교에서 채플 수업도 들었지만 늘 잠을 잤습니다. 성경에 관심도 없었고 오히려 그것을 믿으면 미개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서울대 의대에 왔는데 공부 하나는 최고라는 자존심이 너무나 잘난 친구들 속에서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시체처럼 기숙사에 누워 자다가 밤에 일어나 친구들과 당구장, 호프집, 노래방을 전전하는 기숙사 폐인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잔뜩 술에 취해 기숙사로 돌아오는데 밤하늘의 별을 보며 문득 이 커다란 우주에 먼지 같은 내가 죽든 살든 무슨 상관인가 생각되었습니다. 저는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당시 유행하던 도올의 노장사상 강의도 들어보고 국립도서관에 앉아서 이런저런 책도 읽어보고 지하철 3호선에 앉아 종점을 왕복하며 하루종일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답도 얻을 수 없었고 저는 육체의 본성대로 식욕과 정욕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정신이 극도로 피폐해져 몸에 암이 생겼다는 망상에 빠지는 건강염려증까지 생겼습니다. 저는 죽음이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알지도 못하는 절대자에게 살려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 죄인의 보잘 것 없는 기도에도 응답하시고 UBF 선배님과 일대일 성경공부를 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처음 초청받은 모임이 우연찮게 부활장 암송대회였는데 여러분이 각자 개성대로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열 번도 넘게 듣고 있는데 제 마음에 가득했던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물러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 후 수양회에 참석하여 요한복음 4:13,14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말씀을 통해 스스로 인생의 터진 웅덩이를 팠던 교만과 정욕죄를 깨닫고 회개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저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대신 저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정수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24) 저는 예수님의 이 뜨거운 사랑 앞에 차갑기만 하던 마음이 녹아서 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러자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고 발이 허공을 걷는 것처럼 가벼워졌습니다. 이후에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 말씀을 통해 인생의 고귀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고,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21:15)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캠퍼스 목자로서의 사명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해 학업을 감당하였고 캠퍼스 목자로 후배들을 섬겼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로 모교 병원의 교수로 일하며 양들을 섬기고 제자양성하는 은혜를 계속해서 누리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번 말씀을 통해 사람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는 것은 오직 성경의 능력임을 되새기게 됩니다. 제가 성경을 더욱 사랑하고 공부하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이 시대 고통하는 캠퍼스 양들을 진실로 사랑하고 능력의 성경으로 교육하는데 힘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명확한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성경에는 거스르고 완악한 모든 사람을 가르쳐 책망하고 순종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이 성경이야말로 이 어두운 시대에서 우리를 감동케 하는 유일한 희망이요 빛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더욱 사랑하고 성경의 능력을 믿고 순종하며 힘써 가르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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