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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9년 창세기 12강 `여러 민족의 아버지`(창세기 17장)2019-06-09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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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창세기 12강


여러 민족의 아버지


말씀/ 창세기 17장

요절/ 창세기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름을 바꾸어주신 것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비전과 소망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이 하나님의 비전과 소망이 나의 비전과 소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16장과 17장 사이에는 무려 13년의 갭이 있습니다. 13년 전 아브람은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비록 여종을 통해 태어나기는 했지만 이스마엘은 분명 아브람의 씨를 통해 낳은 아브람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이를 통해 15:4절에서 말씀하신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제 아브람은 그의 삶의 인생문제가 해결되어 여한이 없었습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난 후 13년간 아브람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래 인간적으로 가장 기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처음으로 방긋 웃던 그 모습을 아브람은 잊을 수 없었습니다. 또 처음 옹알이를 시작하던 날, 처음 벌떡 일어나 앉기 시작한 날, 걷기 시작한 날들을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어놓겠지만 당시는 아직 그러한 것이 발명되지 않아 아브람은 그의 마음 속에, 그의 기억 속에 아들의 모습을 선명한 사진으로 찍어 두었습니다.


한편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잘 키우는 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이를 위해 사래에게 이스마엘을 신앙적으로 잘 교육하도록 특별 부탁 했습니다. 그렇게 꿈같은 13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특별히 아브람에게 별다른 말씀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아마도 현재 자기가 잘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쭉 그대로 잘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1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히브리 원문상 “엘 샷다이”입니다. 이는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 God Almighty 입니다. 본문에서는 문맥상 무능하거나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Walk before Me, and be blameless (NASB)”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현재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지 않으며 그의 삶이 완전하지 않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한 삶을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그 의미를 알려면 먼저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도움이 됩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분들 중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평소 전혀 생각하지 않다가 어버이날이 되면 겨우 잠간 생각이 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행하여 완전하지 않는 삶이란 하나님을 이처럼 시골에 계신 연로하시고 거동이 불편하신 부모님 정도로 생각하는 삶입니다. 주일날 말씀들을 때 잠간 생각하고 예배가 끝나고 집에 도착하는 순간 다시 하나님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삶으로 전혀 신앙적인 성장이 없는 삶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지 않은 삶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동행하여 완전한 삶이란 삶의 크고 작은 문제에서 기도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입니다. 이런 삶 가운데 영적으로 배우고 성장하는 삶이 곧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한 삶입니다.


정리해보면 지난 13년간 아브람의 삶에서 하나님이 사라졌습니다. 과거 그에게 심각한 인생 문제인 후사 문제가 있었을 때 그는 늘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또 그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인생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이제 별로 기도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기도가 멈추었을 때 영적인 성장도 동시에 멈추었습니다.


우리가 아브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는 점이 많이 있습니다. 두 부부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생활에 많은 변화가 생깁니다. 신생아는 보통 2시간에 한 번씩 정확하게 우유를 달라고 울어댑니다. 얼마나 필사적으로 응애, 응애 얼굴과 온 몸이 시뻘개질정도로 생명을 다해 울어대는지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갓난아이처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권면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2시간에 한 번씩 젖병을 소독하여 우유를 주고 나면 새벽기도할 기운은 당연히 없습니다. 퇴근하고 난 후 저녁에도 피곤하여 기도할 여력이 없습니다. 이렇게 한 번 중단된 기도생활은 나중에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고 시간이 생겨도 다시 회복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람도 그런 상태가 죽 지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 이스마엘이 특별히 아프거나 사고를 당하였다면 다시 간절한 기도생활을 시작했을 터인데 별다른 사고 없이 무럭무럭 잘 자랐던 것 같습니다. 이와같이 아브람의 삶에 기도가 중단되었을 때 그의 영적인 성장도 중단되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2절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24년 전 아브람에게 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24년 전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그 날로 돌아가셨습니다. 다시 그에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느순간 영적으로 바닥을 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름만 크리스챤이지 사실은 불신자와 거의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주일 날 졸면서 비몽사몽간에 말씀을 듣는데 갑자기 설교자가 하는 말이 가슴에 팍 꽂히면서 나에게 하는 말씀으로 들릴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시는 순간입니다. 어떤 가게에 들어갔다가 그 가게의 벽에 기록된 말씀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생각되는 순간 그것은 실제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 나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시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바닥을 치고 있을 때 그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마음으로 받았던 그 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갔다가 아버지 집을 다시 기억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셨던 말씀을 처음 마음으로 받았던 그날, 주님을 처음 사랑했던 첫 사랑의 그 날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주셨던 그 언약의 말씀을 상기시키며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현재 아브람은 이스마엘 한 사람의 아버지가 된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스마엘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안정된 직장을 원하던 사람이 마침내 안정된 직장을 얻었을 때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처럼,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기 원하던 사람이 마침내 그러한 배우자를 얻었을 때 만족하는 것처럼 아브람은 그토록 바라던 후사를 얻어 만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아이의 아버지로 만족했을 때 그의 영적인 성장은 정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 곧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큰 민족의 아버지가 되리라는 하나님이 처음 주셨던 그 비전을 붙들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러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단지 아브람을 통해 여러 다양한 혈통을 가진 민족들이 탄생하게 된다는 뜻입니까? 그래서 아브람이 위대한 이름이 된다는 뜻입니까? 사실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제일 위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민족이 다 아담의 허리를 통해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모든 인류의 조상이라고 해서 아담의 이름을 위대한 이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목자님들 중 자신이나 이세의 이름을 아담이라고 짓는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고 그래서 그의 이름이 위대한 이름이 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는 아브람의 삶과 신앙, 그의 내면성에 있어서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고 모든 신앙인들이 배우고 본받을 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아브람이라는 이름은 “고상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현재 아브람은 그의 이름대로 가정적인 아버지, 아들 하나를 온 마음을 다해 잘 키우는 아버지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가정적인 아버지, 자녀들을 온 마음을 다해 잘 키우는 아버지는 최고의 아버지입니다. 오늘날 아버지같지 않은 아버지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아브람은 100점짜리 아빠입니다. 물론 하나님도 아브람이 다른 무엇보다 먼저 훌륭한 아버지, 자기 가정을 잘 돌보는 아버지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본래 그를 부르신 뜻은 그보다 더 크고 원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이름을 바꾸어주신 것은 그러한 삶의 자세를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딱 자기 가정만 생각하는 고상한 아버지가 아니라 여러 민족을 아버지처럼 품는 마음의 자세를 갖기 원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 가정은 그래도 비교적 쉽게 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피가 섞인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가정을 넘어 다른 여러 가정들을 품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나랑 특별히 마음이 맞는 한 두 가정과는 가깝게 지낼 수 있으나 개성이 다르고 성향이 현저히 다른 여러 가정들을 다 마음으로 품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대하는 것은 보통 내면성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이 여러 가정들을 품는 정도가 아닌 한 나라, 더 나아가 여러 나라를 품는 내면성을 가진 사람이 되기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사실 아브람의 입장에서 볼 때 한 가정의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정실 부인인 사래가 하갈로 인해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늘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이스마엘이 자기를 낳아준 친모와 법적인 어머니 사래 사이에서 갈등하며 사춘기의 방황에 빠질 때 극도로 긴장하며 이 문제를 도와야 했습니다. 이런 갈등 요소들 가운데 아버지로서 역할을 잘 하여 가정에 큰 문제가 없도록 하는 것만 해도 아브람으로서는 힘에 부칠 때가 여러 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민족의 아버지의 내면을 가지라니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가능합니다. 사실 아브람이 자기가 가진 인간적인 꾀와 여러 술수를 동원해서 하갈과 사래 사이에 줄타기를 하고, 아들 이스마엘을 용돈을 두둑히 주며 달래는 방법을 쓴다고 해서 가정의 여러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갈은 정실부인과 비교하여 불만족에 시달리고, 사래는 정실 부인으로서 대접받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분노에 시달리고, 이스마엘은 이런 콩가루 집안에 태어난 것으로 인한 반항심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예비하신 때에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여 주십니다. 뒤에 나오지만 정실 부인인 사래의 몸을 통해 아들을 주심으로 이 모든 문제들이 말끔히 해결되도록 하여 주십니다. 더 나아가 단지 가정 문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믿음으로 사는 삶의 본이 됨으로 여러 민족이 존경하고 본받고자 하는 열국의 아비가 됩니다.


우리 청년들이 각자 한 가정의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 젊은 시절부터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각자 자기가 가진 인간적인 능력을 의지하여 할 때 아브람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감당하면 아브라함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존경하고 배우고 본받고자 하는 삶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본문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브람의 삶이 아닌 아브라함의 삶을 살고자 결단하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6-8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과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맺어 그와 그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9-14절에서 하나님은 할례를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몸에 새기도록 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 할례는 마음에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으로 하는 할례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약속의 말씀을 굳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 소감을 쓰는 것은 그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소감도 형식적으로 쓰면 말씀이 마음에 새겨지지 않습니다. 세월의 지우개로 지울 때 금새 지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해 소감을 쓸 때 지우개로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돌에 새겨진 말씀처럼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질 것을 믿습니다. 이처럼 그 마음에 말씀이 새겨진 사람은 얼굴에서 빛이 나고 말과 언행에 힘이 있습니다. 분별력이 있고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매주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김으로 이와같은 말씀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하나님이 아브람을 통해 주신 이 말씀은 사래에게 그대로 전달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지난 13년간 아브람은 어쨌든 인간적으로는 기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에 비해 사래는 상당히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 사이에서 때로는 분별력을 잃고 행동하는 남편을 지켜보며 감당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또 아브람의 씨를 통해 큰 민족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왠지 소외된 것 같은 자신의 처지로 인해 서글프고 슬픈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다소간 섭섭한 마음도 왜 없었겠습니까. 어떤 때는 남편으로 인해 너무 속상하고 서글퍼서 부엌에서 눈물을 펑펑 쏟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래는 그 모든 시간을 인내하며 감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은 남편을 통해 그녀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인편을 통해 그녀에게 온 하나님의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를 열어보니 하나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사래에서 사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사래는 공주라는 뜻이고 사라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뜻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라에게 복을 주어 사라의 몸을 통해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 사라는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셨던 그 약속의 말씀이 아브람 한 사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라 두 사람에게 주신 공동 언약의 말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곧 하나님 보실 때 두 사람은 한 몸이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한 몸으로서 함께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에게 큰 위로가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 결혼하신 분들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말씀을 함께 받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부는 곧 한 몸입니다. 나 혼자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잘 해야 합니다. 어제 화랑 센터의 이사라 자매가 결혼을 하였습니다. 부모님이 일찍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픔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듬직하고 잘생긴 신랑을 보내주셔서 큰 마음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혼인 서약을 하는데 신랑이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변함없이 사랑하고 동역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아멘으로 밝게 화답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결혼하신 분들은 상대방이 영적으로 다운되고 뒤로 쳐지는 것 같으면 함께 경주하는 사람처럼 서로 도와주고 격려하며 끝까지 골인점을 향해 달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함께 받은 공동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할 때 “그가 웃었다”는 표현이 원문으로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하면서 속으로 말했습니다.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아브라함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아니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면서 너의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이삭이라 짓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라를 통해 낳을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지으신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불경하게 웃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그의 탄생이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고 아브라함과 특히 사라에게 큰 웃음과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20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마엘도 열 두 두령을 낳고 큰 나라가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내년 이 맘 때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을 다시 말씀하셨고 그 아들 이삭과 언약을 세우리라 하셨습니다.


말씀을 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모든 가족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였고 이스마엘의 나이 13세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약속의 1차 성취가 카운트 다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고상한 아버지의 삶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열국을 품는 아버지의 내면성을 갖기 원하셨습니다. 아브람이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하루하루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그러한 삶을 살아 열국의 아버지로서의 내면성을 갖춘 주의 청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