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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7년 누가복음 제 8 강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누가복음 5:17-39)2017-04-0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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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누가복음 8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말씀 / 누가복음 5:17-39

요절 / 누가복음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본문에는 두 가지 모양의 죄인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테러를 일으키거나 국정을 농단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죄인입니다. 한 사람은 육신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죄인이었고 한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었던 죄인입니다. 58절에서 베드로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그를 제자로 부르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시고 죄인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십니다. 죄인을 환영하는 곳은 교도소 밖에 없습니다. 아니 사람들은 세금을 축낸다고 죄인이 교도소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지금 우리도 찾아오시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기도합니다.

 

17절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데 내가 이를 위해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4:43). 한 집에서 가르치시는 데 이번 경우는 좀 특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는 평범한 서민들만 모여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지역에서 일고 있는 예수 신드롬을 전해 들었습니다. 예수라는 자가 병을 고치고 이적을 행한다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지, 혹 요술을 부려 혹세무민하는 이단은 아닌지 밝히고자 하였습니다. 감찰반이 뜨면 언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한참 말씀이 울려 퍼지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있을 때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왔습니다.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 싶었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전전긍긍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돌아가기에는 너무 아쉬웠고 중풍병에 고통 하는 친구를 하루라도 더 빨리 낫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내일 모래 당장 죽는 병이 아니라고 병자의 고통이 덜한 것은 아닙니다. 한 형제는 대학병원 소아병동에서 알바를 했는데 한 어린이 환자에게 소원이 뭐냐고 물었었다고 합니다. 그의 입에선 빨리 죽고 싶어요라는 말이 나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매일 병마와 싸우는 것이 괴로워서 낫고 싶어요가 아니고 죽고 싶어요라고 합니다. 병자의 마음을 안다면 그냥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매우 무리한 일을 시도했습니다. 지붕 위로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께로 달아 내린 것입니다.

 

삽시간에 방은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천정 이곳 저곳이 무너지고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사람들은 연실 재채기와 기침을 해댔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무례함을 보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입장만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보았습니다. 아니면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라며 이것이 창조경제라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20). 예수님도 두 눈을 갖고 계시고 그들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다 보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이 좋다 나쁘다,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불쾌하거나 유쾌한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8장에 가면 혈루증 걸린 여인이 등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았지만 그 옷가에만 대어도 능히 낫는다는 믿음을 갖고 그 몸에 터치한 그 여인의 동작에 예수님은 민감하게 반응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말과 행동으로밖에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삼상 16장에 보면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들을 다 불러서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아들을 보고 아 이 자가 왕이 될 자구나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키와 용모를 보지 말라고 하시면서 내가 이미 그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보는 것은 사람들의 보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는 중심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그의 아버지가 보기에도 전혀 재목감이 아니어서 그 자리에 부르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택하셨습니다. 사람의 외모는 하나님이 보시는 바가 아닙니다. 그가 외적으로 중풍병자인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붕을 뜯고 새치기를 하고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만 나아가면 반드시 고침을 받고 새로워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을 보고 또 요구합니다. 토익 900점과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을 보고 이력서를 보고 포트폴리오를 보고 학벌을 보고 인성을 봅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요구하는 인재상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물론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진리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는 것과 말씀에 대한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번지 점프를 할 때 안전요원들은 안전수칙을 이야기하고 안전장비들과 생명줄에 대해서 알려주고 점프하는 요령 등에 대해서 가르쳐줍니다. 잘 이해하고 충분히 숙지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잘 뛰어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줄이 끊어지거나 풀려지지 않을 거라고 100% 신뢰하는 사람이 뛰어내릴 수 있습니다.

믿음은 내 인생의 100%를 믿는 대상에게 거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님에게 인생을 건 것입니다. 그래서 지붕도 뚫은 것이고 그 앞에만 나아가면 된다는 생각에 도전을 한 것입니다. 믿음이 도전하게 만들었고 그 움직이기 힘든 몸으로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결과만 보지만 예수님은 그 동기를 보십니다.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고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선물로 받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고 뭐라 말씀하십니까?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예수님의 입에서는 이 사람아 네 중풍병이 깨끗이 나았느니라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뒤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일어나 걸어가라하는 말씀이 나온 것도 아닙니다.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첫째는 예수님은 단순한 치료의 능력자가 아니요 메시아임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들도 고치시고 많은 고질병들을 고치셨습니다. 이는 자선사업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려주고자 함이셨습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이 와 있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도 믿음으로 나아왔습니다. 이보다 자신을 더 잘 드러낼 기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죄 사함을 주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분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둘째는 그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중풍병이 아니라 죄 사함임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볼 때 시급한 것은 중풍병에서 낫는 것입니다. 이 병 때문에 마음대로 행동할 수도 없고 생활에 많은 제약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가장 시급한 것은 죄 사함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놓였습니다. 인간에게 근본적인 안식이 없는 것은 사람들과 갈등하고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불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인생은 하나님의 진노가 항상 그 위에 있습니다. 로마서를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경건하지 않고 불의한 사람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고 있다고 말합니다(1:18). 이것이 해결이 되지 않으면 그는 지옥 불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엊그제엔 1081일 만에 세월호가 목포로 돌아왔습니다. 304명의 어린 영혼들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영혼들이 매일 지옥의 바다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나도 언제 세상을 하직할지 모릅니다. 얼마 전 윌리암정 선교사님이 아들과 콘서트에서 돌아오다가 교차로에서 신호를 무시한 차량과 추돌하여 다행히도 아들은 멀쩡하지만 선교사님이 뇌사 상태에 빠지셨습니다. 2년 후배이며 학창시절 동고동락을 한 그를 생각할 때 마음이 아픕니다. 그렇게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 그런 슬픔을 당할 아무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 세상을 마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는 보스턴의 동역자이고 닥터이고 두 아이의 아버지이고 폴린 선교사의 남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죄 사함을 받았는가, 곧 하나님과 관계성이 회복되었는가, 구원의 증표가 있는가, 이 하나만 남습니다. 그를 심판대 앞에서 변호해줄 유일한 증거는 예수님이 주신 죄 사함 뿐입니다.

 

중풍병에서 일어나 걸으면 참 좋습니다. 이제까지 못해보던 것도 해보고 가지 못했던 곳도 가고 만나지 못했던 사람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에서는 나았는데 그 후에 그냥 죽으면 어떡합니까? 바라던 대로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하고 원하던 결혼도 하고 꿈을 이루었습니다. 시급한 현실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16장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처럼 호위 호식하다가 그냥 죽으면 어떡합니까?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아침에 잠간 보였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중풍병에서 낫지 못하면 잠간 불편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잠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에 들어간다면 어떤 것을 택하겠습니까? 과연 무엇이 더 절실하고 시급한 것입니까? 네 명의 친구들이 간절히 바라는 중풍병 치료보다도 죄 사함이 먼저라면 과연 어떤 현실문제가 죄 사함보다 시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가장 귀한 선물을 주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지금까지 죄 사함은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고 제사 예식을 치르면 하나님을 대신한 제사장의 선포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여기는 성전도 아닙니다. 제물도 준비하지 않았고 예식을 치르지도 않았습니다. 매우 시끄럽고 불결한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믿음 하나만을 보시고 예수님이 죄 사함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이 움직이는 성전이 되시고 누구나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서 죄 사함을 받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경건하게 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4:5)”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믿음으로 죄 사함의 음성이 우리 마음에 항상 들려지기를 기도합니다. 이 죄 사함의 복음이 캠퍼스와 우리 삶의 현장에서 전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노발대발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시는 죄 사함을 일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존재가 하니 말입니다. 그들은 신성모독을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물론 말이야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쉽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면 실제 일어나 걸어가는 현상이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선지자들이 병자들을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는 영혼을 구원하는 죄 사함을 주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죄 사함이란 것이 병 나음을 통해 보여 졌습니다. 가령 나병은 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징벌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병에서 나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셨음을 의미했습니다. 다시 말해 죄 사함을 받으니 병에서 낫는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병에서 낫는다는 것은 죄 사함의 증표인 것을 나타내시고자 이렇게 말하십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그리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하셨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하시던 죄 사함의 일이 이제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곧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오늘 놀라운 일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심각한 마음의 부담이 생겼습니다.

 

27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세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병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이 병든 자입니다. 당시 로마는 세금을 원활하게 징수하기 위해 지역마다 세관장을 세웠습니다. 입찰을 해서 가장 높이 부르는 사람이 세관장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지역에서 100만원 정도의 세금이 나온다고 하면 130만 원 정도를 써내는 사람이 그 지역의 세관장이 됩니다. 그러면 그는 150만 원 정도를 걷어야 이익이 있으므로 자기 밑에서 일하는 세금징수원을 고용하여 이 일을 하게 했는데 그가 바로 세리입니다. 세리 또한 자신들의 이익을 내야 했으므로 200만 원 정도를 걷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에선 100만원으로 시작한 세금이 세리들을 거쳐 백성들에게 갈 때는 200만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보기에 세리는 동족의 고혈을 빠는 흡혈귀와 같은 존재요 공인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리가 백성들에게 원망을 듣지 않으려면 세관장에게 핍박을 받을 것이고 세관장에게 핍박을 받지 않으려면 백성들의 원망을 들어야 합니다. 아마도 레위는 세관장과 백성들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어 매우 피곤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갈 데가 없고 안식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관계성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모든 관계가 어그러지고 불편한데 어디서 행복을 얻겠습니까? 돈을 벌어도 만족이 없고 좋은 음식을 먹어도 모래를 씹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삶의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이렇게 씌어있습니다. “일체의 희망을 버려라희망을 잃은 그의 삶은 지옥 같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랐다고 말씀합니다(28). 예수님은 사람을 낚는 가장 훌륭한 어부이십니다. 베드로라는 사람과 레위라는 사람은 다릅니다. 베드로는 처음엔 예수님과 그의 말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깊은 데를 체험하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관심을 갖게 하고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신에 대한 절망과 영적인 갈급함이 목까지 차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나를 따르라그 한마디가 레위의 영혼에 낚시 바늘이 되어 정확히 걸렸고 끌어당겨졌습니다. 그에겐 관심을 갖고 받아주는 사람, 삶의 비전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은 너를 내가 받아주겠다는 말입니다. 받아준다는 것은 이미 이해와 용서를 전제한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해주며 새로운 삶의 방향과 좌표를 제시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레위에겐 갈 데가 생겼습니다. 의지할만한 대상이 생겼습니다. 삶의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였습니까?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다고 말씀합니다(29). 매우 놀라운 변화입니다. ‘예수를 위하여잔치를 한다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감사로 섬기고 싶은 마음이 넘쳤음을 보여줍니다. ‘큰 잔치를 한다는 말은 그의 마음을 누르던 절망과 어둠의 족쇄가 풀렸고 은혜가 풍성함을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을 초청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감당할만한 마음의 여유와 능력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많은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관심 갖고 받아주고 방향을 세워주니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해결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치료의 권능자요 변화의 능력자이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마음도 레위의 마음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며 제자들을 비방할 뿐이었습니다. 공감 능력 제로였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런 잔치를 열게 했는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변화에 관심이 없고 전통적인 규범의 고수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31,32)”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만 산다면 병원은 문 닫아야 하고 의예과는 가장 인기 없는 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병원처럼 장사가 잘 되는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주차하기 힘든 곳이 종합병원 주차장입니다. 육신이 아픈 사람만 많습니까?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많으며 또 영혼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건강합니까? 저도 건강하지 않습니다.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질병은 서로 연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의 혈관질환은 잘못된 식습관과 관련이 있는데 이것은 안일, 탐식, 무절제과 연관이 되고 가장 깊이는 교만과 게으름과 연관이 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기보다 물질과 정욕에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병든 자요 죄인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예수님이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중풍병자도 병자요 죄인입니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몰라도 죄 사함이 필요한 죄인이었습니다. 세리는 모두가 다 아는 공인된 죄인입니다. 이런 죄인들을 다 잘라낸다면 세상에는 한 사람도 남아있지 못할 것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하셨습니다. 회개가 곧 영혼의 치료입니다.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자신이 병든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신이 가던 삶의 길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예수님께로 방향 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영혼의 의사가 되신 예수님이 알아서 치료해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눈엔 죄인들이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엔 어떤 죄인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회개만 하면 건강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믿음과 희망을 갖고 계셨습니다. 세리로 사는 것과 모든 사람을 초대하여 섬기는 제자로 사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다릅니다. 누가 한 사람을 이렇게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어떤 심각한 죄인도 회개시켜 건강한 사람, 구원받은 새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점을 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비난할 게 없으니 이제는 먹고 마시는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좀 전에는 죄인과 먹고 마시는 것을 문제 삼았는데 그것이 먹히지 않자 이번에는 금식과 기도를 안 하고 왜 먹고 마시기만 하느냐고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한 비유를 드십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그 손님들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금식하던 사람도 혼인 잔치에 참여하면 신랑 신부를 위해서라도 금식을 풀어야 합니다. 흥겨운 잔치에 참여해서 자신은 금식하기 때문에 안 먹는다고 하면 분위기를 얼마나 깨는 일이 되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혼인 잔치와 같은 축제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엔 금식을 할 수 없고 신랑을 빼앗기는, 곧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시간에 금식해야 합니다.

이에 두 가지 비유를 더 하십니다. 낡아진 옷을 잘 활용하려고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면 새 옷도 찢는 격이고 또 낡은 옷에 새 옷감이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의 왕성한 발효력이 낡은 부대를 터뜨려 부대도 못쓰고 포도주도 버리게 됩니다. 서로 조합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혼인 잔치에서는 먹고 마시는 것이 어울리는 것이지, 잔칫집에서 금식하고 팽목항 같은 초상집에서 먹고 마신다면 매우 부적절한 조합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뱉고 있는 것입니다.

 

39절입니다. 사람들은 묵은 포도주를 좋아합니다. 묵은 포도주가 더 비싼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오래된 전통과 율법, 관습과 생각들을 마치 묵은 포도주를 마시듯 더 선호합니다. 그것이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죄 사함의 선포라든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모습은 새 포도주와 같아서 맛이 매우 떨떠름하고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겸손하여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 않으면 영원히 새 포도주를 맛보지 못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이란 은혜를 주셔서 일어나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삶의 탈출구를 찾지 못한 레위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심으로 그의 인생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나 세리 같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 시키셔서 구원받은 새롭고 건강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누구에게나 가장 시급히 필요한 것은 죄 사함이며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회개함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복된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