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19년 창세기 26강 `애굽에서 번성한 이스라엘`(창세기 46-48장)2019-09-23 02:22
작성자

2019 창세기 26강


애굽에서 번성한 이스라엘


말씀/ 창세기 46-48장

요절/ 창세기 47:27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이제 창세기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야곱과 요셉의 삶을 통해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6: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지난 말씀에서 요셉은 흉년의 기간을 지낼 수 있도록 아버지에게 모든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오실 것을 청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야곱, 곧 이스라엘은 아들이 준 방향대로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애굽으로 가는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본문에서 브엘세바는 가나안 최남단에 위치한 곳입니다. 이제 이 브엘세바만 벗어나면 기나긴 광야길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광야가 끝나는 곳에 애굽이 위치해 있습니다. 야곱은 가나안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희생제사의 의미는 지금까지 가나안에 사는 동안 함께 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애굽으로 가는 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인지 하나님께 묻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이런 야곱, 곧 이스라엘에게 이상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아, 야곱아” 그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부르시고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기초해 볼 때 야곱의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은 낯선 곳입니다. 미지의 땅입니다. 비록 지금은 아들 요셉이 총리로 있다 하나 정치적 싸움이 살벌한 세계 무대의 중심지 애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들에게 주신 말씀, 곧 가나안 땅에 거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강한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속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나님은 애굽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을 큰 민족으로 키우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인구밀도가 높은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이 큰 민족이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드넓은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큰 민족으로 키우려는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의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큰 위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낯선 땅, 미지의 땅 애굽으로 가기 전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있을 때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와 함께 가신다면 그가 어디로 가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영원히 애굽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그를 인도하여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단지 야곱의 시신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묻히게 되리라는 의미보다는 이스라엘 민족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야곱은 큰 힘과 용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는 바로가 보낸 수레를 타고 애굽으로 힘차게 내려갔습니다.


8-27절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야곱의 일가족의 명단입니다. 27절에서 저자는 이들의 수가 모두 70명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70은 완전수입니다. 비록 적은 수이지만 완전수인 70명의 야곱의 후손들은 약 430년의 기간을 거쳐 무려 성인 남자만 60만, 다 합하여 대략 200만명의 큰 민족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마침내 야곱은 고센 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센 땅은 요셉이 근무하던 이집트 왕궁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나일강 삼각주의 우편 이집트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가나안으로 돌아가려 할 때 지리적으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요셉은 수레를 타고 고센으로 왔습니다. 얼마만의 부자간의 상봉입니까! 요셉은 아버지의 목을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이후 요셉은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들에게 바로가 직업이 무엇인지 묻거든 목축을 한다고 답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목축하는 사람과 같이 거주하기를 매우 싫어하므로 고센 땅을 내어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전략적으로 이스라엘이 고센 땅에 거주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과 고유한 전통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집트 사람들과 함께 섞여서 거주할 경우 이집트의 우상숭배 사상과 문화에 영향을 받을 위험이 있었습니다. 또 이집트 사람들과의 알력싸움에 휘말려들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어느 정도 구별된 장소에서 따로 거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47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미리 일러준대로 바로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에 요셉이 계획했던대로 이스라엘은 고센 땅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지금까지 형들은 바로 왕 앞에서 스스로를 종으로 자처하였습니다. 3절을 보면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는 바로의 질문에 “종들은 목자이온데…”라고 답했습니다. 또 4절을 보면 “양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같은 당대 최강대국의 왕에게 이런 자세를 보이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어떠합니까?


다시 한 번 7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야곱은 바로 앞에 당당히 서서 그를 축복하였습니다. 축복했다는 것은 바로와 그의 나라가 잘 되도록 하나님께 복을 빌어주었다, 기도해주었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 계열의 제사장보다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인 예수님이 더 높으심을 여러 논증을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그가 멜기세덱을 통해 십일조를 드리고 또 멜기세덱으로부터 축복기도를 받았다는 사실을 들고 있습니다.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논란의 여지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히 7:6,7)” 야곱은 바로를 축복하였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에 의하면 논란의 여지없이 바로보다 야곱이 더 높은 자입니다.


바로는 당시 최강대국 이집트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에 비해 야곱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야곱은 바로가 최강대국의 왕이지만 전혀 기가 죽거나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그를 위해 축복기도해주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당당함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그것은 그가 애굽으로 내려갈 때에 그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오늘날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청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본문의 야곱과 같은 자신감과 당당함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시대의 청년들은 프레임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학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프레임이 있습니다. 학력이 낮으면 다른 것은 보지도 않고 그 사람을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의 감옥에 던져 넣습니다. 뭐라고 자기 생각을 말하면 “학력이 낮은 사람은 입다물고 계세요”라는 유형무형의 메시지를 날립니다. 그런데 학력이 좋은 사람을 만나면 이번에는 외모의 프레임에 가둡니다. “외모가 그 모양인데 잘난척하시면 곤란합니다.”라는 유형무형의 메시지를 날림으로 그 사람을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의 감옥에 다시 가둡니다. 기성세대의 어른들, 특히 나름대로 뭔가를 성취한 어른들은 젊은 청년들이 뭐라고 뭐라고 입바른 소리를 하면 그 말이 듣기 싫습니다. 그래서 즉시 상대적으로 자기가 강하고 상대방이 약한 부분을 찾아서 그를 프레임에 가둡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조용히 하도록 만듭니다.


사실 요즘과 같이 고도의 경쟁사회에서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떤 성취를 이룬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최선을 다해보지만 결과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 자신감마저 잃고 마음이 위축됩니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주눅이 듭니다. 여러 연구결과에 의하면 청년들이 사회생활에서 실패하는 원인이 실력이 부족한 것이 50%라면 마음이 주눅이 들고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이 50%라고 합니다. 많은 청년들은 자기가 스펙이 부족하고 실력이 부족해서 100% 그것 때문에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주눅들고 위축된 그의 태도로 인해 실패한 것이 최소한 50%는 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아무리 객관적으로 자신의 형편이 이 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 보잘 것 없어보여도 당당한 자세와 자신감을 잃지만 않는다면 최소한 50점은 먹고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스펙으로, 또 지난 날 이룬 업적으로, 또 눈에 보이는 현재 상황으로 평가하는 이 사회를 살면서 청년들은 어떻게 다시 당당함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에서처럼 잘나고 똑똑하고 능력많고 몸에 털도 많은 청년도 많지만 부족하고 어리버리한 나를 기독청년, 예수믿는 청년으로 부르시고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이 하나님은 세상의 프레임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으시며 절대적으로 나의 편이 되어주시며 나를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 청년들이 세계 최고의 스펙을 가진 사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 종로센터 20대, 더 나아가 30대 청년들이 어깨를 쫙 펴고 당당한 모습으로 다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소리도 크고 힘차게 내고, 선배님들을 만나면 인사도 밝고 힘차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세상에서도 주님 안에서 밝고 힘차고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나이를 묻는 바로에게 야곱은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라고 답하였습니다. 또 그가 비록 조상들에 비하면 아직은 어리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고백합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130년의 인생을 살면서 인생이라는 것이 결국은 나그네 길임을 배웠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 집에서 부모님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형과의 갈등으로 인해 어머니의 고향인 밧단아람으로 가서 청년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와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노년의 때에 이집트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경험을 통해 야곱은 인생이란 한 곳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가는 나그네처럼 가야 할 길을 가는 과정임을 체험하였습니다.


야곱이 체험했던 것처럼 성경은 인생이 나그네길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열차가 시작도 없이 끝도 없이 계속하여 같은 코스를 반복하여 돈다면 그 기차는 겉보기에는 앞으로 가고 있지만 사실은 정지해 있는 것과 별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람에게 만약 죽음이 없다면 그에게 있어 시간은 정지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존재하는 순간 그에게 있어 인생은 종착지를 향해 달려가는 기차와 같이 됩니다. 목적지를 향해 쉬지 않고 길을 걸어가야 하는 나그네가 됩니다.


사람이 이와같이 인생이 근본적으로 나그네 길임을 알 때 최대한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돈과 세상명예, 성공에 대한 욕망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나그네도 밥을 먹어야 하고 잠시 쉴 숙소도 있어야 하므로 그러한 것이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상쾌한 마음으로 길을 갈 수 있는 정도이면 족합니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길을 갈 때 각 코스마다 반드시 배워야 할 것들을 잘 배우는 것입니다. 미혼일 때는 미혼으로서 배워야할 것을 잘 배우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갖게 되면 부모로서 배워야 할 것을 잘 배워야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믿음을 배우고 삶의 진리들을 배워야 합니다.


다음으로 야곱은 자기 인생의 세월이 험악하다고 하였습니다. 험악하다는 표현은 원문상 ‘라임’인데 이는 evil days라는 의미입니다. NIV 번역이 재미있는데 difficult로 번역하였습니다. “My years have been few and difficult” 야곱에게 있어서 인생은 매우 어려운 수능문제를 풀어내야 하는 수험생과 같았습니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이 왜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아이를 낳다가 젊은날 죽어야 했는지, 그후 그가 사랑했던 라헬이 낳은 요셉이 왜 짐승에게 찢겨 젊은 날 비명횡사를 해야 했는지, 하나님은 왜 그에게 원대한 꿈을 주시고 그 꿈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그를 데려가셨는지 등등이 그가 풀기 매우 어려운 수능문제와 같았습니다.

사람이 인생을 힘들다고 느끼는 것은 인생이 무슨 군대훈련처럼 힘든 훈련을 시켜서라기보다는 마음에 해결되지 않은 의문들을 주기 때문입니다. 아 그때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은 이런 결과를 위해서였구나 라고 그때그때 명쾌한 해답과 해설이 주어진다면 인생사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어려운 문제는 주어지나 그 답은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때 어려운 문제앞에서 고통하고 고뇌하는 수험생의 고뇌가 우리의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길을 이렇게 어렵게 하시는 무엇입니까? 그 해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실력을 키워주기 위해서입니다. 일전에 수학을 아주 잘 하는 청년으로부터 들은 일화입니다. 그가 본래 그렇게 수학을 잘하지 못했는데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절대 쉽게 참고서를 보지 않고 1시간이든 2시간이든 심지어 하루나 이틀을 그 문제를 낑낑대며 고민하며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수학실력이 비약적으로 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에게 풀기 어려운 문제를 주시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문제를 풀려고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인생을 살아내는 우리의 인생살이 실력이 향상되기 원하십니다. 우리 청년들이 삶의 어려운 문제들을 붙들고 씨름하는 가운데 이와같이 인생을 살아내는 실력이 빼어난 사람들로 성장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47장 후반부는 더욱 심해진 기근으로 인해 이집트의 모든 돈과 가축과 토지가 다 바로의 소유가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저자는 이스라엘 족속이 그 기간 고센 땅에 거주하며 목축업을 하는 가운데 생육하고 번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창세기가 곧 끝이 나고 큰 민족으로 성장한 이스라엘이 다시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그린 출애굽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고센 땅에 거주하며 생육하고 번성하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시는 과정입니다. 창세기 12:2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고센 땅으로 데려오셨습니다. 이를 위해 요셉에게 꿈을 주셨고 그 꿈의 성취를 통해 야곱의 모든 집안 사람들이 이곳 고센 땅으로 이주해 오도록 하셨습니다.


이상에서 창세기를 총정리해보면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반드시 그 약속의 말씀을 지키십니다.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기가막힌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임을 통해 캠퍼스 선교의 약속의 말씀, 또 꿈을 주셨습니다. 우리 선배 목자님들의 헌신과 수고를 하나님이 쓰심으로 많은 청년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목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캠퍼스 선교에 있어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마치 요셉의 시대 때와 같은 기근을 만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방향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준비해두신 청년 요셉을 중심으로 그의 방향을 잘 따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가운데 영적 기근이 든 것과 같이 이 시대에, 수많은 청년들이 주의 말씀을 떠나 세상으로 가는 이 시대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고 고민하고 기도하는 청년이 있습니까? 내가 먹고 사는 나의 인생문제 해결도 중요하지만 나의 소중한 젊음의 시간을 다소 희생해서라도 이 시대 청년 선교, 캠퍼스 선교를 위해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일까 생각하고 고민하는 청년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예비해두신 이 시대의 요셉입니다. 그를 중심으로 모여 기도하고 그가 주는 방향을 잘 따를 때 거기에 살 길이 있습니다. 또한 야곱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청년 요셉에게 있어 다소 부족할 수 있는 영성, 인생의 경륜을 보완해 줄 수 있습니다. 소중한 조언을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를 더욱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서로 믿고 세워주는 야곱과 요셉의 아름다운 동역 - 여기에 우리 모임이 다시 한 번 캠퍼스 선교에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믿습니다.

48장에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로 입적시키는 내용입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요셉에게 장자가 받는 두 몫을 주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특히 야곱은 동생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 주었습니다. 아버지 요셉은 출생 순서를 존중하려 하였으나 할아버지 야곱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방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순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축복하는 야곱의 영성에 대해서는 다음 말씀에서 더욱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결론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요셉의 가슴에 꿈을 주시고 그 꿈을 성취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꿈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꿈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