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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9년 요한계시록 1강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요한계시록 1장)2019-10-06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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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요한계시록 1강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말씀/ 요한계시록 1장

요절/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가을학기 요한계시록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에 들어가기 전 간략하게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잠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요한계시록을 계시록이 기록된 1세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666은 당시 황제숭배를 강요하며 교회를 박해하던 네로 황제를 비롯한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암호코드입니다. 하지만 계시록을 1세기 성도들만을 위한 책으로 본다면 로마 황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찾기 어렵습니다. 그런가 하면 계시록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종말의 사건에 대한 예언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계시록에 기록된 여러 내용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역사적 사건을 통해 성취됩니다. 이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나폴레옹이 등장했을 때 드디어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을 때 이후 히틀러가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유럽 통합을 추구하는 EU를 적그리스도 정부로 보기도 하였습니다. 또 모든 시민들에 대한 정보를 칩의 형태로 몸에 넣도록 하는 것, 이른바 베리칩을 666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사람들의 마음에 큰 두려움과 혼돈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보아야 합니까?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단지 1세기 성도들만을 위한, 혹은 단지 예수님의 재림 직전을 살아가는 종말의 성도들만을 위한 책이라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요한계시록은 다른 모든 성경들과 마찬가지로 1세기 성도들과 재림직전의 성도들을 포함하여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책입니다. 특히 여러 환난과 고난 가운데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믿음을 돕기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가을학기 계시록 말씀을 통해 특히 믿음의 시험과 시련 가운데 있는 분들에게 큰 위로가 되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내적 결단을 새롭게 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계시록의 저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당시 요한은 오늘날 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을 순회하며 섬기던 목회자였습니다. 기록 연대는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말기인 AD 95년경으로 봅니다.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그는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었습니다. 밧모 섬은 에베소에서 남서쪽으로 90km에 위치한 작은 섬입니다. 지표는 모두 화성암으로 이루어져 불모지이고 밀이나 포도나무의 재배가 약간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은 조선시대 때 제주도처럼 정치범을 비롯한 죄수들을 유배보내던 곳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특징은 이 책이 에베소의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면서 동시에 묵시문학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묵시문학은 BC 200- AD 100년경 널리 사용되던 문학 형태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다니엘서가 묵시문학에 해당합니다. 한편 BC 167-164년 기간 마카비 전쟁 때 알렉산더가 세운 헬라제국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유대교에 대한 무시무시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이때 묵시문학이 꽃을 피웠습니다. 묵시문학은 박해의 상황 가운데 박해자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여러가지 암호를 사용합니다. 주로 그림이나 이미지, 숫자를 암호로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에서 숫자 2는 타당한 증인의 수, 3은 삼위 하나님, 4는 전체 피조세계, 6은 완전에서 하나가 부족한 사람의 수, 혹은 불완전의 수, 7은 완전수, 10은 완성, 12는 충만함, 24는 12족장과 12사도 곧 구약과 신약, 1000은 무한을 가리킵니다. 특히 144,000은 12x12x1000으로 구약과 신약의 구원받은 수많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신천지에서는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144,000명이 신천지 신도가 되면 종말이 온다고 가르치는데 그것은 황당한 해석입니다. 얼마 전 신천지 신도의 수가 144,000명을 넘었는데도 종말이 오지 않자, 전도를 많이 하고 헌신을 많이 하는 A급 신도 144,000명이라고 말을 바꾸면서 더 많은 헌신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은 초월적 관점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묵시문학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초월적 관점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관점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마치 하나의 천이 씨실과 날실로 잘 짜여져 있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그 접점을 살아갑니다.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그 접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자유의지를 따라 순간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때로 인간에게 자기가 견뎌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 어려움을 견뎌내지 못하면 공황장애와 같은 여러가지 정신적 혹은 신체적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종내에는 파멸과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간과 공간의 접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그 한계에서 벗어나 미래적/초월적 관점에서 그 상황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앙을 떠나서 고난 가운데 많은 이들이 붙드는 경구가 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 그렇습니다. IMF 때 많은 이들이 죽을 것처럼 고통하였지만 이 또한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습니다. 이와같이 내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접점을 벗어나 미래적인 관점에서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면 고난을 이겨내는데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계시록은 현재 견뎌내기 힘든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미래적 관점, 더 나아가 초월적인 관점,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재의 고난을 바라보도록 돕습니다. 이를 통해 어떤 견디기 힘든 고난이라도 이겨내고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요한계시록의 구조는 “서문 - 일곱 교회에게 주는 예수님의 말씀 - 일곱 인 - 교회의 보호(7장) - 일곱 나팔 - 교회의 사명(10:1-11:13) - 교회의 영적 전투(12-14장) - 일곱 대접 - 바벨론의 멸망 - 최종국면 - 새 예루살렘 - 내가 속히 오리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에는 대조적인 두 개의 성이 나옵니다. 하는 큰 성 바벨론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입니다. 바벨론의 특징은 크다는 것입니다. 크다는 것은 힘과 능력과 권세가 출중하다는 것입니다. 돈이 많고 여러 능력과 재능있는 인재도 많습니다. 세상의 정치 권력자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나옵니다. 세계 최고의 부호들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이 성의 주인은 하나님의 대적자인 사탄입니다. 그는 세상의 돈과 권력과 쾌락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을 이 성에 와서 살도록 유혹합니다. 반면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한 분을 사랑하고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큰 성 바벨론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미워하고 박해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큰 성 바벨론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합니다. 반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영광스럽게 됩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교회의 최종적이고도 영광스러운 승리입니다. 교회에는 여러가지 시험과 환난이 있습니다. 외적으로 사탄에게 속한 큰 성 바벨론의 박해가 있습니다. 내적으로 성도들 안에도 남은 죄가 있으므로 여러가지 갈등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교회는 최종적인 승리를 얻게 됩니다. 교회의 최종적인 승리 - 이것이 곧 요한계시록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요한계시록은 묵시 문학의 형태로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요한은 이 계시의 말씀을 본 계시록을 통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원문상 읽는 자는 단수, 듣는 자와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계시록은 약 4.5미터 길이의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책은 개인이 소유하기 어려웠고 주로 한 교회에 하나 정도 있었습니다. 개인이 이 말씀을 들으려면 예배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면 두루마리를 펴서 설교자가 이 말씀을 읽습니다. 그러면 청중은 그 말씀을 들었고 또 들은 말씀을 지키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요한은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을 읽는 자, 듣는 자, 또 들은 그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어에서 happy라는 말과 blessed라는 말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Happy는 우연을 뜻하는 hap(happen to)에서 나왔습니다. 우연히 좋은 일이 생기면 행복하다는거죠. 우연히 복권을 샀는데 우연히 복권번호가 딱 맞아서 당첨되면 행복합니다. 우연히 주식을 샀는데 주식이 오르면 행복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연으로 인한 행복은 결코 영원하지 못합니다. 잠시 행복하다가 그 행복이 다 사라집니다. 어떤 경우는 행복이 불행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복권에 당첨되어 행복했는데 이후 탐욕에 사로잡힌 가족들로 인해 가족들 사이가 원수사이로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에 비해 blessed는 영원한 기쁨, 참된 만족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한순간 있다가 사라지는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 영원한 만족을 주십니다.

 

오늘 메시지의 제목이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입니다. 특히 지키는 것에 포인트를 두었습니다. 무엇을 지켜야 할까요? 계시록에는 여러가지 지켜야 할 것들이 나옵니다. 그중 하나가 짐승의 표인 666을 받지 않는 것이고 짐승에게 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 본문을 다룰 때 더욱 자세히 하겠지만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666은 완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흉내내면 완전과 신성을 추구하지만 결국 완전에 이르지 못하는 사탄의 수이며, 인간교만의 극치를 의미합니다. 666 표를 받고 짐승에게 절한다는 것은 하나님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인간의 교만을 선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대체물로 돈과 권력 쾌락을 숭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킨다는 것은 사탄을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을 섬기며 예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의 삶의 중심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에 있어야 합니다. Quiet Time과 같은 개인적인 예배의 시간도 소중합니다. 동시에 주일 첫 시간에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이 예배의 시간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이 예배의 시간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받고 그 말씀을 삶에서 순종하겠다고 결단하며 기도하는 이 시간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며 복 주시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다음으로 지켜야 할 것은 성도의 거룩함입니다. 서론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계시록에 기록된 교회의 이름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것은 음란한 것, 정욕적이고 세속적인 것, 탐욕적인 것들입니다. 지금 현재 내 행동이 거룩한 것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 행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일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지켜야 할 것은 충성된 증인의 자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은 재림하실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 한 마디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인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러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실제로 착하고 충성되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도 인내하고 믿음, 소망, 사랑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요한은 본격적으로 편지를 시작하기 전 인사말을 합니다. 우리말에서도 흔히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인사말로 하는 것처럼 당시에도 “은혜와 평강”을 인사말로 하였습니다. 마음이 잔잔한 호수처럼 평안하고 기쁨이 있는 것은 누구나 다 바라는 바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만약 그냥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인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로부터, 또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으로부터,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곧 성부 하나님, 성령님, 예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별 생각없이 각자 바쁘게 자기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실 세상은 태양으로부터 얻는 빛 에너지와 때를 따라 구름을 이루고 비를 내림으로 대지를 적시는 그러한 활동을 통해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 풀리지 않는 일들로 인해 짜증이 올라올 때 창문 너머 나무가지 사이를 타고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 싱긋한 풀내음은 다시 우리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와같이 성도에게는 주님께서 주시는 신비한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으로 인해 마음이 편안하고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은혜를 늘 사모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은 2,000년 전 이 땅에 구유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던 주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하여 맨 마지막에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말씀을 끝맺음을 합니다. 주 예수께서는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원문상에는 구름과 함께 오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실 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다시 오심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 위에 있던 그를 창으로 찌른 자들도 보게 됩니다. 이 때에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게 됩니다. 애곡하게 된다는 표현은 원문상 가슴을 친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가장 슬프고 비통한 일을 당할 때 가슴을 쳤습니다. 이번에 화성 연쇄 살인범이 DNA 증거를 통해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의 모친은 자기가 배가 아파 낳은 아들이 그러한 범죄자였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의 심장부분을 가리키며 여기가 너무 아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구름과 함께 재림하실 때 그를 믿지 않고 그를 증거하는 이들의 증거를 무시하며 불신앙으로 삶을 살았던 모든 이들은 가슴을 치고 심장을 치며 그 고통을 달래보려 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습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던 어느 주일 날 요한은 그의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그가 보는 것을 기록하여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12-16절을 보십시오.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이 말씀은 서론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묵시로 풀어야 합니다. 만약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림을 그린다면 예수님의 모습이 다소간 무시무시해보일지도 모릅니다. 먼저 일곱 금 촛대 사이의 인자같은 이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는 것은 그가 대제사장이신 것을 의미합니다. (출 28:4)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되셔서 매일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직무를 감당하십니다.

 

다음으로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같고 흰눈(as white as snow)같았습니다. 이는 주 예수께서 죄가 하나도 없고 순결하심을 의미했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영적 부흥을 이끌었던 설교자 죠지 휘트필드는 “내가 가장 순결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도에 집중하고 있는 그 시간 가운데서도 하나님 보실 때 그 안에 더러운 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기도에 집중을 잘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나는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 하는 자기 자랑의 죄일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의 마음 안에도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께는 그러한 죄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공해가 전혀 없는 청정 지역에 막 내려 수북히 쌓인 눈처럼 그 안에 얼룩지거나 더러운 부분이 없습니다. 온전히 순결하고 죄가 하나도 없습니다.

 

다음으로 그의 눈은 불꽃 같습니다.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보지 못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한 사람의 내면은 소우주와 같다고 합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내 자신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다 보십니다. 내 안에 숨겨진 욕망과 탐욕, 모든 죄를 다 보십니다. 그러나 불꽃 같은 그의 눈은 타오르는 사랑의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는 나의 모든 죄로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다만 그는 삶의 여러가지 환난과 고난을 통해 내 내면 깊숙이 숨겨진 죄를 깨닫고 죄인된 자기 발견을 하기 원하십니다.

 

다음으로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습니다. 이는 그의 힘과 권능을 의미합니다. 그는 단지 좋은 말로 우리를 위로해줄뿐 그 이상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강한 힘과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루터는 성도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의사와 환자의 관계로 비유했습니다. 그는 죄로 병든 우리의 내면을 치료할 힘과 권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의사가 그가 계획한 플랜을 따라 환자를 치유해 나가듯 주 예수께서는 그가 가진 힘과 권능을 때를 따라 적절히 사용하심으로 죄로 병든 우리의 내면을 치유해 나가십니다.

 

다음으로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습니다. 많은 물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큰 하나의 시내가 여러 줄기로 갈라져서 거기에서 물이 자갈 위를 지날 때 내는 소리가 여러 군데에서 동시에 나는 그런 많은 물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면 여기에서는 이 소리가 나고 저기에서는 저 소리가 그 많은 소리들이 합하여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같은 웅장한 소리를 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와같이 많은 물 소리와 같습니다. 주님의 생각은 깊고도 깊습니다. 그 깊은 곳에서 나오는 주님의 생각이 말씀으로 표현될 때 맑은 물소리와 같고 많은 물 소리와 같습니다. 자연에서 들려오는 이러한 물소리는 세상 풍파로 지치고 찌든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깊은 생각에서 흘러나오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죄로 병든 우리의 내면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힘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옵니다. 좌우에 날선 검은 역시 주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날선 검과 같아서 내 내면 깊이 감추어진 죄를 드러냅니다. 암덩어리같은 죄를 도려내고 잘라내어 내 생명을 보존하여 줍니다. 또한 그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습니다. 주님 안에는 조금의 어둠도 없습니다. 절망도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항상 소망의 빛으로 가득합니다. 사랑의 빛으로 가득합니다. 그 사랑이 넘쳐나서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습니다. 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어둠과 절망으로 가득하던 우리의 마음이 소망과 비전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때로 어둡고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때로는 더럽고 추한 내 내면의 죄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때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 눈을 들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때 죄로 병든 내면이 치유됩니다. 어둠의 터널을 지나 소망의 빛을 보게 됩니다.

 

17-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주 예수께서 오른손에 붙들고 계신 일곱 별은 에베소 일곱 교회의 사자들, 곧 교회의 감독들을 의미합니다. 또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최고의 관심은 교회에 있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위해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생명처럼 사랑하십니다. 또 교회를 책임진 목자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결론입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을 듣게 된 것부터 엄청난 복을 받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들은 말씀을 기억하고 지키는 자는 영원한 복이 있습니다. 이번 가을학기 요한계시록 말씀을 통해 종로 센터에, 또 우리 각자의 마음에 이 하나님의 복이 흘러넘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