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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9년 요한계시록 3강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요한계시록 3장)2019-10-21 01:39
작성자

2019 요한계시록 3강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말씀/ 요한계시록 3장

요절/ 요한계시록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교회는 오늘날 터키의 내륙 지역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사데 교회가 위치한 사데라는 도시는 고원지대에 위치하였습니다. 높은 고원지역에 성을 쌓고 남쪽으로 한 군데에만 입구를 만들었습니다. 성 위에서 사방을 바라보면 고원 아래로 적들이 쳐들어오는 여부를 훤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도시 아래로 흐르는 팍톨루스 강에는 사금이 풍부하여 금화를 주조하기도 하였고 도시 근방의 허무스 평아에서는 풍요로운 농산물이 공급되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다른 도시 사람들은 언제 적들이 쳐들어와 성안 사람들을 몰살하거나 노예로 잡아갈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늘 긴장하고 성 위에 24시간 파수꾼을 두어 성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사데 사람들은 이 성에는 전혀 적이 쳐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긴장을 완전히 풀고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갔습니다. 동시에 풍요로운 금과 농산물을 기반으로 고급진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사데 도시에 위치한 사데 교회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당시 사데 교회의 정확한 영적 상태를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초로 생각해 볼 때 사데 교회가 사데 도시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데 교회 사람들은 사데 사람들처럼 영적인 긴장을 완전히 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다른 교회에서는 유대인의 거짓 고소로 인해 교회 지도자가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되고 심지어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온 교회 사람들은 밤낮으로 교회 지도자를 위해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또 박해로 인해 교회 재산이 몰수되어 함께 모여 예배드릴 처소를 잃기도 했습니다. 그런 고난이 오면 가정에 모여 가정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들이나 산에서 혹은 동굴에 모여 예배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고난과 환난이 그러한 교회를 깨어있게 하였습니다. 교회 재산을 몰수당하여 동굴에서 예배드릴 때 그들이 부르는 찬송가는 참으로 신령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교회 지도자들을 위해 눈물로 부르짖어 기도할 때 그들의 기도소리는 하늘문을 열고 주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사데 교회는 그러한 고난이나 박해가 전혀 없었습니다.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하는 것에 대해 아무도 비난하거나 욕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안전하고 평안한 상황이 그들을 영적으로 잠들게 하였습니다. 교회의 책임자인 감독부터 시작하여 대부분의 성도들이 깊은 영적인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들이 드리는 기도는 주님께서 들으실 때 마치 잠꼬대처럼 들렸습니다. 그 기도 소리에 어떤 간절함이나 절실함이 없었습니다. 들어주시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기도였습니다. 잠꼬대같은 이런 기도소리를 들으시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또한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신령함이나 어떤 영적 감동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배드리는 성도들의 얼굴을 보면 마치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는 영화 한편을 억지로 보고 있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듣기 싫은 지루한 교장 선생님 훈화를 어쩔 수 없이 참고 듣고 있는 고등학생들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주일날 자기에게 나아와 이런 표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데 교회 성도들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2-3절을 보십시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당시 사데는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이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적들의 침입에 의해 정복당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 사데는 BC 549년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 또 BC 214년 안티오쿠스 삼세에 의해 정복당한 전력이 있습니다. 특히 페르시아의 침입 때 성의 보초를 서고 있던 한 경비병이 절벽 아래로 헬멧을 떨어뜨렸습니다. 그 경비병은 밑에 아무도 없을 줄 알고 자기들만 아는 비밀 길을 따라 절벽 아래로 내려가 헬멧을 주워 성으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밑에 페르시아 병사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올라갈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절벽이 그 길을 따라가면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사람의 척후병이 그 길을 따라 올라갔을 때 놀랍게도 성 위에 몇 사람의 보초 외에 사데 군대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데 사람들은 절벽 위의 성벽 쪽은 안전하다고 여기고 병력을 전혀 배치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데 성은 페르시아 군에 의해 정복되게 되었습니다. 또 안티오쿠스가 쳐들어왔을 때에도 이와같은 안일한 태도를 가졌다가 정복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주님께서는 사데 성도들에게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영적인 잠을 자고 있다가 어느날 주님께서 도둑같이 임하시면 그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적인 잠을 자는 사람이 그가 자고 있다가 주님께서 도둑같이 재림하시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성을 지키는 파수꾼이 자고 있다가 그가 자는 동안 적이 침입하여 성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일에 실패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 사람들은 파수꾼에게 중한 책임을 묻고 사형에 처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와같이 교회는 이 시대의 영적인 파수꾼과 같습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현재 내가 잠들어있는지, 깨어있는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두 가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내 기도소리에 어떤 간절함이나 절실함이 묻어있는지, 박윤선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죽기내기로 기도하고 있는지, 아니면 혹 잠꼬대하는 것처럼 기도하고 있는지 않은지 살펴보면 됩니다. 또 예배드릴 때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배드릴 때 주님께 예배드리는 감격과 기쁨이 있는지, 또 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을 주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영접하고 말씀에 순종하고자 결단하는 은혜가 있는지, 혹 지루한 영화 한 편 보는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이것을 살펴보면 내가 잠든 신자인지, 깨어있는 신자인지 얼추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종로 센터 형제 자매님들, 또 목자님들이 주님 앞에서 깨어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주님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영혼의 잠을 자는 그 시간에 깨어있는 몇 사람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곧 신앙의 순수함과 순결함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선교사님들과 만나 대화를 하다보면 이분들이 우리 모임의 초창기에 있었던 그 순수했던 예수님 사랑, 양들 사랑의 그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그 순수했던 청년 대학생 때의 신앙을 50이 넘도록 그대로 간직하고 계신지 참으로 은혜가 되었습니다. 이 분들은 우리 주님께서 보실 때 흰 옷을 입고 다니는 분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국내에 계신 분들 가운데서도 많은 분들이 우리 모임 초창기 때의 그 순수했던 신앙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모두 주님께서 보실 때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분들입니다. 우리가 순수하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함으로 주님 보시기에 옷을 더럽히지 않은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당시 빌라델비아 교회는 사데 교회와 달리 여러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먼저 빌라델비아는 사데와 달리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습니다. 특히 AD17년에 있었던 대지진 이후 도시를 거의 새로 세워야할만큼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빌라델비아에 위치했던 빌라델비아 교회는 사데 교회와 달리 재정적으로 풍요롭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작은 능력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이는 이 교회가 믿음이 작거나 성령의 은사가 작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이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 가운데 사회 지도층 인사나 부유한 자들이 드물고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많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유하지만 잠들어있던 사데 교회와 달리 영적으로는 깨어 있었습니다.

 

과거 한국 교회가 새벽기도를 중심으로 부흥했습니다. 그 시발점을 보면 한국 교회가 가난하고 힘들었기 때문에 새벽 시간 외에는 충분히 기도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여자 성도들은 먹고 살기 위해 하루종일 일해야 했으므로 남편과 아이들이 잠든 새벽시간에 교회에 나와 기도했습니다. 여자 성도들이 기도한 후 마룻바닥을 보면 그가 흘렸던 눈물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하루하루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던 작은 능력을 가진 성도들이 눈물로 드린 그 기도와, 가난 가운데서도 마음을 담아 드렸던 그 헌금들 위해 한국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아마도 이러한 한국교회와 유사했던 상황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작은 능력을 가졌으나 참되고 진실한 믿음을 소유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지키며 남편의 박해나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을 향한 믿음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들에게 모든 부요함이 가득한 하나님 나라에 올 것을 보장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저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는 가난함과 빈곤 가운데 힘들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열어주신 천국의 그 모든 부요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제 3 세계와 비교해 볼 때 이미 큰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서도 상대적으로 여러 어려움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 영적인 부요함을 가져달 줄 것을 믿습니다. 어려움이 있기에 주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기에 주님 앞에 항상 겸손하고 주님을 간절히 의지할 것입니다. 우리의 가난함을 부요함으로 바꾸어주실 주님을 믿고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9-13절에서 주님은 메시야를 거부했던 유대인들 중 몇이 그들의 발 앞에 절하게 함으로 그들을 향한 주님을 사랑을 나타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온 세상에 임할 시험 가운데 그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마치 빌라델비아 도시가 최근에 새 이름을 받았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새 이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곧 더 이상 작고 연약한 교회가 아닌 크고 힘있고 강한 주님의 교회로서 새 이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4-16절을 보십시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에베소 위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인 서머나에 내려 사데를 지나 동남쪽으로 내려오면 빌라델비아가 있습니다. 그 빌라델비아를 지나 히에라볼리를 지나 조금 더 내려오면 라오디게아가 있습니다. 한편 역시 항구도시인 에베소에 내려 안디옥을 지나 밑으로 내려오면 라오디게아가 있고 라오디게아를 지나 동쪽으로 가면 골로새가 있습니다. 이렇게 로마에서 만든 큰 두 개의 길이 만나는 접점에 라오디게아가 있었습니다. 큰 두 개의 길이 만나니까 라오디게아에서는 서머나, 에베소, 골로새 등 어디로든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천안이나 대전같은 곳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감으로 자연스럽게 상업과 무역, 은행업이 발달했습니다. 또 북쪽 근방에 온천으로 유명한 히엘라볼리가 있었고 남쪽으로는 차가운 생수로 유명한 골로새가 있었습니다. 한편 라오디게아에서 나오는 물은 석회가 가득하여 도저히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수로를 이용하여 히엘라볼리의 온천수와 골로새의 생수를 끌어다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긴 거리를 이동하면서 물이 오염이 되고 미지근하여져서 마시면 구토 증세를 일으키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의 형편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시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근거로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의 형편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당시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성향을 유추해 보면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혹시 지역적인 편견으로 보일까 염려됩니다만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삼도로 가는 길목에 있던 천안 지역의 사람들은 말도 천천히 하고 자기 속생각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부지, 도올 내려가유우” 하는 사이에 산 아래 있던 아버지가 돌을 피하지 못했다는 웃지못할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처럼 교통의 요충지에 있던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혹 마음상할까봐 말도 천천히 하고 불편한 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일에 조심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또 잠간 몇일 머물렀다가 떠날 외지 사람들에게 마음 상하는 말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니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있어도 말을 잘 안하고, 속상한 일이 있어도 말을 잘 안하고 늘 상대방에게 맞춰주고 분위기 따라가는 그런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라디오게아 교회 성도들도 이런 성향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향은 신앙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 있는 뜨거운 주님 사랑, 예수님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주저하였습니다. 너무 튀면 오버한다고 비난받을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뒤에서 “쟤 너무 오버하는거 아니야? 지가 뭐라고 저렇게 나댄대?” 수근거리며 비난할까 몹시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뭘 하든 먼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분위기를 살폈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 선에서 해도 비난받지 않겠다고 생각되는만큼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눈치보며, 사람들의 여론을 살피며 신앙생활하다보니 처음 가졌던 그 뜨거운 신앙의 열정과 주님을 향한 사랑이 점점 식어갔습니다. 사람들에게 비난받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주님은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둘 중의 하나를 분명하게 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대해 크게 두 가지 해석이 갈립니다. 그 중 하나는 주님의 이 말씀이 “할려면 똑바로 해, 똑바로 하지 않으려면 때려치워”라고 이해하는 해석입니다. 제가 연구를 해 보니까 주로 동양계, 특히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뭐든 하려면 똑바로 하고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하려면 차라리 때려치워버려라 마” 이런 정서가 동양인, 특히 우리 한국인에게 너무 이해가 잘 됩니다. 한편 서양인들은 무슨 말을 하든 진중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약 그 말이 농담이라면 분명히 농담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표현 하나 하나, 단어 하나 하나를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진중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입니다.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할려면 똑바로 하고 그런 식으로 할 거면 때려쳐버려라 마” 이런 표현은 그 동양적 정서를 전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적당히 신앙생활하느니 차라리 관두어라”라는 식의 말씀을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찬 것도 마치 아이스 커피가 맛있는 것처럼 좋은 쪽으로 해석합니다. 예를 들어 차가운 분별력을 가지고 양들의 죄문제를 분별하고 진리의 말씀을 냉철한 마음으로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고 여깁니다.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해서는 제가 어느 한 쪽을 강요하기보다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선택할 자유를 드리겠습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주님께서는 미적지근한 신앙생활을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남의 눈치를 보는 신앙생활, 남들에게 비난받지 않을만큼 적당히 하는 신앙생활을 주님은 아주 싫어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왕 신앙생활할거면 뜨거운 마음과 열정으로 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사를 살펴볼 때 주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셨던 분들은 한결같이 뜨거운 열정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챨스 스펄전은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설교자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가 남긴 설교들을 자세히 읽어보며 그가 가졌던 설교의 능력을 체험해 보기 원합니다. 그러나 단지 그가 남긴 글만 가지고는 그가 전했던 설교의 능력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이는 그가 전했던 메시지에 뜨거운 주님 사랑, 양들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스펄전 목사가 태버내클 교회에서 다음 주일 날 전할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설교의 제목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없는 빈 회중석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때였습니다. 교회의 지붕에서 어떤 사람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없이 가방을 싸들고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스펄전이 전한 설교에 깊은 감동을 받고 회심을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스펄전은 특별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고 그냥 성경에 기록된대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를 외친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외침에 뜨거운 주님 사랑의 마음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뜨거움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미국 대부흥 운동의 주역 중 하나인 죠지 휘트필드 역시 뜨거운 열정과 양들 사랑으로 가득한 설교로 유명합니다. 한 번은 그가 탄광에서 일하는 인부들을 대상으로 설교하였습니다. 그는 회개하지 않고 죄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지옥 형벌을 당할 영혼들을 위한 상한 마음,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득안고 설교했습니다. 여기 앉아있는 영혼들이 회개하지 않고 지옥에 가게 될 경우 그가 당할 그 마음의 아픔을 가득 담아 설교했습니다. 그때 시커먼 광부들의 눈에서 눈물을 따라 흰 줄이 생겨났습니다. 그 수많은 광부들의 얼굴에 전부 두 줄기의 흰 라인이 생긴 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잊지 못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확실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주님의 성령은 뜨거운 열정, 뜨거운 사랑을 가진 마음 속에 역사하십니다. 우리 모임 역시 초창기 뜨거운 열정을 가진 분들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우리 모임이 초창기에 비해서는 많이 부요해지고 안정되었습니다. 가난하여 피를 뽑아 헌금으로 드렸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이 부요해지고 안정된 반면 뜨거움도 많이 잃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종로센터에도 아마 동일한 말씀을 하실 것 같습니다. 뜨거운 예수님 사랑, 양들 사랑의 정신을 다시 회복하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저희가 요한 계시록을 통해 주시는 이 주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새롭게 예수님 사랑, 양들 사랑의 그 뜨거움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7-19절을 보십시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위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라오디게아는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로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또 의료시설이 발달하였고 특히 효력이 뛰어난 안약 제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이와같은 풍요로운 도시에 위치한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풍요로움이 가득했습니다. 이러한 풍요로움 가운데 그들은 신앙생활하였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물질적인 풍요함과 영적인 풍요함을 구별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내가 영적으로 가난하고 빈곤하다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또 시력이 좋아서 모든 것이 잘 보이면 내가 영적으로 눈멀었다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또 좋은 옷을 사서 잘 입고 다니면 내가 영적으로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경제적으로 빈곤해져서 매달 매달 먹고 사는 것이 절실한 현실문제가 되고, 빚을 져서 매달 매달 이자를 갚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될 그러한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래서 그런 위기 가운데 누군가 도와주어서 기적적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한 삶의 경험을 체험한 사람은 영적으로도 내가 가난하고 헐벗어서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훨씬 더 잘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또 어떤 분은 시력을 잃게 되었을 때 그가 영적으로 눈먼 자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이 경제적으로는 풍요하지만 영적으로는 헐벗고 빈곤하며 눈멀었으며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이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도록 돕고 계십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나의 가난하고 빈곤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이 영적인 빈곤함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다른 무엇보다 주님과의 교제가 빈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교제를 깊이 하면 할수록 나의 영적인 실존에 대해 더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영적으로 가난한지 깨닫게 됩니다. 이 영적인 가난함을 면하기 위해서는 주님으로부터 불로 연단한 금을 사야 합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산다는 것은 주님께서 나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주시는 여러 고난이나 어려움을 잘 감당하는 가운데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돈이 많다고 부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연단과 훈련을 잘 받아 믿음이 성장한 사람이 부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흰 옷을 산다는 것은 주님이 주신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순종함으로 그 삶과 행실에 있어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안약을 산다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분별력과 깨달음을 통해 내 안에 있는 죄, 또 사람들 안에 있는 죄를 분별하고 그러한 죄와 싸우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때로 말씀을 통해, 때로 사람의 권면을 통해, 때로 어떤 사건을 통해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우리가 자기 발견하고 회개하도록 도우십니다. 회개하여 뜨거운 열심을 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라오디게아 성도들이 물에 물탄듯 술에 술 탄 듯 신앙생활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들에게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께서는 라디오게아 교회의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누구든지 그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주님께서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주님과 함께 더불어 먹으리라 하십니다.

 

결론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각자 다양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풍요로운 환경이 시험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경제적인 빈곤이 시험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다들 자기만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어려움 가운데 주님의 각자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이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미적지근한 신앙생활을 회개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김으로 이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종로센터가 가을학기 주님을 뜨겁게 사랑함으로 이기는 교회, 승리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