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20년 마태복음 12강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신 예수님`(마태복음 8:1-17)2020-05-17 16:53
작성자

2020년 마태복음 제 12강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8:1-17

요절 마태복음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오늘 말씀을 통해 첫째, 병든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둘째,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신 예수님을 깊이 배우고 그 치유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자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나병은 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병으로 병중 최악의 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한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걸리면 가정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혼자 생활해야 합니다. 보통 병에 걸리면 그때부터 사람들의 관심과 돌봄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 청소년시기에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위해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여 병원에 입원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병에 걸리게 되면 그런 생각은 사치스런 생각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서 멀어져 혼자 모든 질병의 고통을 감당하며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나병환자는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원하시면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나병이 멈추는 정도가 아니라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는 부활의 믿음이요 재창조의 믿음이었습니다. 또한 이 나병환자는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치료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보잘것없는 자신에 대해 주님이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겸손히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과 겸손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치유하셨습니까?


예수님이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그의 병이 깨끗하여졌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그를 고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손을 대신 것은 왜 입니까? 예수님은 그가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배척받고 돌팔매를 당한 마음의 깊은 슬픔을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그에게 이해와 공감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기계적으로 고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노니”라고 하심으로 그에 대한 깊은 자비와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얼마나 고생했고 그 마음이 아팠는지를 아시고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몸만 치유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치유하시는 진정한 치유자요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더 중요한 영혼구원, 그리고 십자가사역이 지장을 받지 않도록 치유사실을 널리 알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대신 그가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예물을 드려 건강을 확인받고 정상적인 사회생활로 복귀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이 사람들과 격리되어 깊은 고독과 슬픔과 절망의 골짜기에서 나와 건강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의 중심 가버나움에 오셨습니다. 이 때 가버나움 주둔군 로마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당시는 하인을 물건 취급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하인의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여기며 어떻게든지 고쳐주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백부장이 로마군이지만 겸손히 요청하고 또한 자신의 하인을 사랑하는 것에 깊이 감동을 받으시고 가서 고쳐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백부장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들으셨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8) 그의 말은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심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너무나 크신 분이고 그에 비해 자신은 너무나 작은 존재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하인의 병이 위중하여 경황이 없어 예수님께 다급히 오시라 했지만 정신이 들어 보니 너무나 무례한 요구를 한 것이 아닙니까? 자신의 행동은 군대로 하면 대대장급이 감히 군총사령관이나 황제보고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말한 격이었습니다.


이런 비슷한 경험을 시몬 베드로도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에 그냥 성경선생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방향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를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무릎아래 엎드려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b) 이런 비슷한 자기발견이 백부장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또 백부장 생각에 예수님이 왜 자기 집에 굳이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까? 말씀만 하시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높은 분들은 말씀만 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초에 모든 것이 있게 한 말씀 그 자체이셨습니다. 때문에 오시지 않고 말씀으로 하인을 능히 치료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말씀으로 능히 자신의 하인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자기의 군대생활을 들어 설명했습니다. 군대에서는 높은 사람이 명령만 내리면 즉시 그대로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지 않고도 병을 향해 떠나라 명령만 하시면 병이 즉시 떠날 것을 그는 믿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예수님은 백부장의 영적 깨달음과 믿음에 놀라셨습니다. 그의 깨달음과 믿음이 객관적으로 큰 것이어서도 그랬지만 그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에 더욱 놀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믿음의 사건들을 체험했고 풍성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고 성경선생들을 통해 수없이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정말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높이고 따르는 이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말씀계시도 거의 받지 않은 이방인이 이렇게 예수님의 본질을 꿰뚫어 보다니 저으기 놀라신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경고적인 의미로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1,12) 이 말씀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대신 이방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주인공들이 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목회자나 풀타임들이 은혜의 홍수 속에서 무감각하게 살 수도 있고, 반면에 삶의 현장에서 평신도나 학생들이 영적 센스를 갖고 주님과 동행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탓하지 않고 백부장처럼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든지 진리를 깨닫고 믿음을 배우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백부장의 영적 센스와 믿음, 그리고 그가 받은 칭찬의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이때 그 즉시 그 하인의 병이 떠났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는 믿음으로 일하는 법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시공간에 매이지 않고 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내가 묶여 있어도 일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일하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간이 없어서, 몸이 묶여서 하나님의 일을 못한다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일하는 법을 배우면 우리는 코로나 기간에도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움직여 일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믿음과 심정이 있는 사람은 그 주위사람들이 복을 받습니다. 병 나은 하인은 주인 잘 만난 복을 받았습니다. 반대로 왕하 5장에 보면 하인 잘 만난 복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입니다. 자신의 수하에 있는 소녀 종이 주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이스라엘에 있는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만났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복의 근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과 심정이 있는 사람이 상사나 부하나 친구나 가족으로 있는 것이 자기에게 복이 되었다고 간증하는 것을 많이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도 우리 주위에 고통 하는 사람들에 대해 무심하게 지내지 않고 주위사람의 고통을 살피고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여겨져 그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간구하는 진정한 친구요 이웃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의 장모님이 고열로 끙끙 앓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제자의 삶을 사는데 장모님의 열병이 부담되고 걸림이 되었을 것입니다. 장모님은 장모님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만으로도 걱정이 태산 같은 데 병까지 앓게 되니 얼마나 몸과 마음이 힘들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어려움에 깊이 공감하시고 그의 집을 심방하셨습니다. 또 장모님의 고통에도 공감하시고 이해와 위로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시자 그녀의 몸과 마음의 맺힌 것이 풀리고 씻은 듯 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온전히 나아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맛있는 음식으로 섬겼습니다. 기도의 동역자,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쫒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안식일이 끝나자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을 다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고통을 헤아리사 다 아들딸처럼 영접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귀신을 내어쫒으사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심령에 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병자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마태는 예수님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는 분임을 깨닫고 증거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요.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이 말씀은 이사야 53: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53:4a절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이 말씀은 메시야의 사역과 고난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병을 담당하신 분이십니다.


이 말씀이 가르쳐 주는 것은 첫째로, 인간은 연약함과 질병의 문제를 가진 존재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영육 간에 각종 질병을 가지고 그 질병 때문에 고통과 슬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어떤 인간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병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린이인데 심장판막증을 가지고 태어나 고통당하는 아이들은, 지켜보는 부모님이나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합니다. 청소년들도 힘차고 건강하게 보이지만 비염도 있고 여드름, 아토피, 알러지 등 피부질환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육체적으로 멀쩡하지만 정신적으로 우울증, 강박증, 불안장애, 열등감, 자의식, 허무, 무기력 등 내면의 병들을 심각하게 앓고 있기도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연약한 자들, 병든 자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오는 자들을 다 영접하셨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그들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그들의 슬픔을 자기의 슬픔으로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사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환자 중에는 간호하는 이들에게 벽을 느끼고 서운함을 표시하는 이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누가 나의 아픔과 슬픔을 다 알겠습니까? 어쩌면 이것은 인간의 한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내적 외적 질병으로 인한 아픔과 슬픔을 아십니다. 어떻게 아시냐고요? 병에 걸린 적도 없는 데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육체적 고통과 내적 슬픔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120대의 채찍에 맞으시며 살점이 터지고 찢겨나가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찢겨진 상처에 수없이 다시 채찍질 당하셨습니다. 아마 장기가 손상되는 고통도 맛보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사바늘 꽂히는 것도 부담스러워합니다만 예수님은 두 손과 발에 망치로 대못이 박히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얼마나 참기 힘드셨는지 고통 때문에 수없이 까무러쳤다 깨어나길 반복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풍병자의 무기력을 경험하셨고 철저히 버림받고 외면 받으면서 나병환자의 슬픔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연약함과 병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다 아시기에 우리의 참 친구가 되실 수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친히 해결하셨습니다. ‘담당하셨다’는 것은 해결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을 통해 우리의 죄와 질병의 저주를 다 가져가 버리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죄의식으로부터만 아니라 병으로부터도 해방되어 영육 간에 건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말라기서에 보면 메시야를 통한 치유의 역사를 이렇게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공의로운 해는 바로 돋는 해이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병든 영혼들에게 치료하는 광선을 발합니다. 이 십자가에서 나오는 치료의 광선을 받으면 어떤 사람도 치료가 됩니다. 그래서 병든 영혼이 강건하게 되어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놀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가 얼마나 심각한 병자이든 간에 당신에게 나오는 자를 다 치료하여 건강한 새 인생 살게 하십니다. 그동안 UBF는 이렇게 병든 자들을 십자가능력으로 치유하여 강건하게 하는 역사를 했습니다. 얼마나 강건하여졌는지 그들이 강건하게 되어 목자요 선교사들이 되어 세계로 나아갔습니다.


초창기 UBF에는 운명주의와 슬픔에 병든 형제자매님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울밑에 선 봉선화 같았습니다. 처량하고 슬픈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병든 내면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지성인들을 섬기는 목자들이 되었습니다. 

한 목자님은 의존심에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센터에 나오던 누나들을 따라 다니면서 이것저것 사달라고 하던 연약한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이분도 변화되어 책임목자로 한 캠퍼스를 섬기다가 지금은 미국으로 나아가 교수 선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 형제님은 명문대 최고의 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과대표를 하는 가운데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해 깊은 절망과 자책, 허무와 무기력으로 자살하고자 망우리 공동묘지에 가서 수면제를 먹고 무덤 옆에 누웠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도 목자님을 통해서 UBF로 인도되어 예수님을 만나고 강건하여졌습니다. 그래서 다른 영혼들을 섬기는 목자의 삶을 살다가 현재는 캐나다 선교사로 섬기고 계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과거에만 있었습니까? 성경공부중에 홍대 UBF 한 형제는 얼마나 연약한 지 센터에서 학교 가는 길이 5분 거리도 안 되는 데 천천히 벽에 기대에 달팽이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학교에 갔었다 합니다. 그런데 이분도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지금은 가정을 이루고 목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중에 깊은 무기력과 게임중독으로 대학입시에 여러 번 실패하고 학업도 감당하기 어려워하던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분도 변화되어 주님 안에서 강건하여졌습니다. 그래서 학업도 잘 감당하게 되었고 체육대회 때는 힘차게 달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나의 죄와 병을 짊어지고 가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영육 간에 나의 질병이 치료됩니다.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건강하고 힘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 중에 자신의 연약함을 보고 절망하고 계신 분들이 혹 있습니까? 그러나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나의 연약함을 지고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조금씩 강해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상한 갈대 같은 내가 점점 참나무처럼 강해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꺼져가는 심지 같던 나의 마음속에 성령의 횃불이 타오르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연약한 형제자매들이 있습니까? 그들을 정죄하거나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긍휼을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병에 걸리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병에 걸린 것이 꼭 그의 잘못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청소년발달장애의 경우, 선천적으로 호르몬 조절이 안 되는 것이 문제인데 어떻게 그를 미워하고 정죄하겠습니까? 정죄는 하지 않지만 소망도 갖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도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험한 십자가에 능력 있네, 거기서 나의 삶이 변했네, 주의 십자가에 능력 있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어떤 사람도 소망이 있습니다. 치유될 수 있습니다.

빨리 치유되지 않아도, 점점 치유될 것입니다. 지금 자신의 여전히 연약한 것에 절망하고 계신 분들도 한 25년이 되면 참나무처럼 단단하고 강건하게 변화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질고를 이미 가져가 버린 십자가의 능력을 믿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우리도 십자가 앞에 나아가 강건하여지며 끊임없이 우리 형제자매들이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야 하겠습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병혼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십자가를 통해 이미 우리들의 연약함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므로 강건하여지며 모든 형제자매를 십자가를 통해 강건케 하는 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