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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0년 마태복음 26강 `천국에서 큰 자`(마태복음 17:22-18:14)2020-09-07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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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26강 

천국에서 큰 자 

말씀/ 마태복음 17:22-18:14
요절/ 마태복음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태복음은 총 5개의 강화와 예수님의 행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정리해 보면 산상수훈(5~7장), 제자도(10장), 천국 비유(13장), 그리고 오늘 말씀인 공동체 강화(18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말 강화(24장)입니다.

오늘날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개인주의 의식이 강하고 반면 공동체 의식은 약한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 가운데 저자 마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공동체 정신에 대해 귀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가운데 어떻게 이러한 공동체 정신이 꽃필 수 있는지 배우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공동체 강화 말씀에 들어가기 전 본문의 배경이 되는 17장 하반부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7:22-23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포인트는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십자가에 죽으시지만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고” 말씀하신 순간 모든 사고가 정지되고 머리 속에서 삐 소리가 나며 그 뒤 말씀은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매우 근심했다는 표현은 원문상 ‘they had severe mental and emotional distress’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할 때 패닉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본능적인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을 때 저 주사 바늘에 내 안으로 쑥 들어오면 아파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을 믿고 주사를 맞으면 오히려 병이 낫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 할 때 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죄의 병이 낫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24~27절은 성전 세금에 대한 논쟁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출애굽기 30:11~16절 말씀에 근거하여 성전세를 내었습니다. 출애굽기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로의 노예 생활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특히 이집트의 모든 장자가 죽은 유월절 심판의 밤에 문설주에 발린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그 심판으로부터 건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되었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한 도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에 와서 섬기는 대신 각자 생업에 종사하고 대신 반 세겔을 성전에 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반 세겔은 노동자의 이틀치 품삯에 해당하며 약 20만원 정도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 아마도 평소처럼 베드로의 집에 거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때 성전 세금을 걷는 자들이 호주인 베드로에게 와서 너의 선생은 성전세를 내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엉겁결에 “내신다” 큰소리를 치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거금 20만원은 당연히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는지, 자기 아들에게 받는지 타인에 받는지 물었습니다.  

당시 임금들은 나라를 경영하기 위해 관세와 국세를 받았습니다. 관세는 상거래 활동으로 발생한 수익에 대해 걷는 세금이었고 국세는 사람의 수대로 걷는 주민세였습니다. 이러한 세금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그의 아들에게는 면제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상식을 기초로 타인이 낸다고 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십자가 부활의 복음으로 건설되는 천국의 왕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제자들이 그 천국 복음의 일군이요 왕되신 예수님과 함께 그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실입니다.

성전세는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주신 출애굽의 은혜, 장자 재앙으로부터 건져주신 유월절의 은혜에 기초해서 내던 속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기초 위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의 일군들입니다. 또 주님의 보배로운 피의 은혜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구약 시대에 내던 성전세는 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이 얼마나 복받은 자들인지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십자가 부활의 복음의 완성되기 이전 이 성전세 문제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베드로에게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 그 입에서 한 세겔을 얻어 성전세를 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18: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제자들은 성전세 사건을 통해 큰 깨달음과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의 일군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인가, 세상 나라에도 왕이 있으면 그 밑으로 2인자, 3인자 서열이 있는데 천국 서열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제자들은 어떤 자가 천국에서 큰 자인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세우시고 그들이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천국이 제자들과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임을 보여줍니다. 현재 제자들은 이 세상 나라의 일을 천국에도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왕이 있고 그 밑에 강력한 서열 제도가 있습니다. 그 서열은 여러가지에 의해 결정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개인 능력에 따라 결정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그런 능력이 부족해도 왕의 총애를 받은 사람이 일방적인 왕의 은총으로 서열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사극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장희빈’이 그런 케이스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왕정 시대는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말한 서열의 원리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개인이 가진 능력을 발휘해서 이 사회에서 자기 서열을 높입니다. 집을 한 채 사면 서열이 올라가고 빌딩을 한 채 사면 서열이 급상승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정관계의 인맥을 잘 활용하여 서열을 올리기도 합니다. 요즘 청년들은 유투브 방송으로 대박을 치면 서열을 확 끌어올릴 수 있다며 유투브 방송에 열을 올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천국은 이 세상의 원리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자기 서열을 조금이라도 높이려고 경쟁하고 다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근본적으로 개인주의, 이기주의 사회가 아닙니다. 천국은 공동체 사회입니다. 천국에는 서열 다툼이나 개인의 출세의 욕망이 없습니다. 천국에는 모든 사람이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그렇다고 해서 천국이 어린아이처럼 철없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졌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어떤 점을 가지고 있을까요?  

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어린 아이는 자기 스스로를 의존적인 존재로 인식합니다. 어린 아이는 무엇을 하든지 어른을 의존하고 그의 부모를 의지합니다. 아이가 어릴수록 의존도는 더 커집니다. 이번에 무릎 연골수술을 받으러 서울로 올라오신 어머니를 통해 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어머니만 안 보이면 그렇게 울어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밭일을 하러 갈 때 항상 저를 둘러메고 가셨습니다. 밭에서 일하다가 배가 고파 우는 저에게 젖을 먹이는 것을 보신 외삼촌은 개구락지 새끼처럼 허약해 보인다고, 저것이 어떻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한 마디 하셨다고 합니다. 한편 어머니는 자존감이 낮은 편이셨는데 아무도 찾거나 돌보지 않는 자기를 찾고 의지하는 아이를 보며 큰 존재의미를 느끼셨다고 합니다.

5살쯤 되었을 때 할아버지가 위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어머니가 저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병원에 가셨습니다. 그 때 제가 얼마나 울어댔던지 도저히 견디지 못한 할머니가 택시를 잡아타고 저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 때 병원에서 하얀 침대 위에 누워 계시던 할아버지의 발치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어린 아이는 그 부모를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부모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가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면 한결같이 이와같은 어린아이의 마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시편에는 다윗의 시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의 시를 보면 그가 얼마나 이와같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졌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삶의 여러 역경과 고난 가운데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의존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했습니다. 시편 10편을 보면 다윗은 마치 자기를 돌보지 않는 부모님께 소리지르며 떼를 쓰는 아이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표현은 이렇게 점잖게 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사실상 아이가 부모님께 어서 와서 나를 도와 달라고 온 몸으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또 시편 18편을 보면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이 시편 역시 점잖은 표현으로 되어 있지만 실상은 다윗이 늘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매달리며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일반적인 의미로 자립적인 한 사람의 어른이 된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기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매우 좋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른인 사람은 삶의 고난과 역경이 닥쳐도 어린 아이처럼 울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습니다. 속으로는 곪아 터지면서도 괜찮은 듯 뻣뻣하게 가만히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 울며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어른으로서 심히 자존심 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문제 해결을 하려고 시도합니다. 내가 어른인데 내가 해결해야지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은 내 영역이며 내가 내 삶의 주인이요,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성숙한 어른의 삶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린아이처럼 삶의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한 다윗을 그 시대 어느 누구도 어린아이같다며 함부로 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각자는 어떠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입니까, 아니면 성숙한 어른입니까? 우리가 삶의 역경 앞에서, 아니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고 하나님께 울며 매달리는 영적으로 성숙한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어린 아이에게는 어떤 귀한 점이 있습니까? 어린 아이에게는 늘 배우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눈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합니다. 저의 큰 아들 에스라는 서울대 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에스라가 어느 정도 자란 후 서울대 병원에 함께 간 적이 있었는데 여기가 네가 태어난 고향이야 말해주자 신기한 듯 여기 저기를 두리번 거렸습니다. 에스라가 태어난지 3년 후였을 때 둘째인 다니엘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4살이던 에스라에게 이제 곧 네 동생이 태어난다 말해주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해 하였습니다. 병원에서 둘째 다니엘이 태어나기를 기다리다가 저와 에스라가 같이 잠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새벽이 되어 둘째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4살이던 에스라에게 에스라야 동생 태어났어 말했더니 자던 아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온 동생을 신기하듯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4살 먹은 어린아이가 새벽 시간에 “네 동생 태어났어” 말 한 마디에 그렇게 벌떡 일어나는 것이 너무 신기했습니다. 이처럼 어린 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게 늘 새로운 것을 알고 배우려는 learning mind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린 아이와 같은 우리에게 늘 뭔가를 가르쳐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다시 시편 18:33~34절을 보면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배웠을 때 그의 발이 암사슴 발과 같이 되었습니다. 과거 그의 힘과 능력으로는 높은 곳에 오를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훈련을 받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배웠을 때 그의 발이 암사슴 발과 같이 되었습니다. 높은 곳을 사뿐 사뿐 오르며 절벽과 암벽 사이를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또 과거 그의 힘과 능력으로는 놋 활을 당길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훈련을 받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배웠을 때 그의 팔에 힘이 생겨 놋 활을 당기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발이 암사슴 발처럼 되고 우리의 팔이 놋 활을 당기게 되는 것은 한 순간에 기적처럼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훈련관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우리가 이와같이 성장할 수 있도록 여러 훈련을 주십니다.

군대에서 특수부대 훈련을 하는 기관이 있습니다. 그 훈련소에 가면 여러 장애물을 마련해놓고 그 장애물을 이겨나가는 과정을 통해 평범한 부대원을 특수부대 요원으로 성장시킵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피훈련생인 우리는 그때 그때 눈 앞의 장애물이 제거되기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발이 사슴처럼 되고 우리의 손이 놋활을 당기게 될 힘을 갖추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아버지와 같으신 이 하나님의 마음을 영접하고 어린아이처럼 늘 배우고 성장하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과 자세를 갖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에서 예수님은 천국은 이와같이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잘 받아 배우고 성장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졌음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세상 나라와 같은 개인주의, 출세주의, 성공주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천국에는 세상 나라에서 의미하는 큰 자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남들보다 더 많이 의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남들보다 더 많이 배우는 자는 있습니다. 굳이 큰 자가 있다면 그러한 자가 큰 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큰 자라 할지라도 결코 자신을 내세우거나 남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남들보다 하나님을 더 힘있게 의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잘 배운 것 뿐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 한 사람을 영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주의 이름으로 귀하게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동체 정신이 깨어지는 경우를 보면 그것을 특권과 차별로부터 시작됩니다. 교회 공동체가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을 특별대우하는 순간 그 교회의 공동체의 사랑은 무너지게 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작은 자를 실족시킨다는 것은 나의 잘못이나 죄로 인해 한 사람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통 사회적 지위나 위치가 높은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많은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의 경우 별 신경을 쓰지 않고 함부로 말하거나 대하게 됩니다. 그 경우 그 사람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줄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사람이 믿음의 길에서 떠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연자 맷돌이 목에 매달린 채 깊은 바다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형벌을 받을 수 있는 죄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세상 공동체는 힘있고 영향력있는 사람이나 단체의 눈치를 봅니다. 그러한 사람들 위주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힘과 영향력이 그 단체의 주인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가장 작고 영향력이 없는 사람 안에 함께 하십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은 개인의 영성에도 관련이 있지만 본문의 문맥상 공동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아간 한 사람의 죄가 아이성 전투의 패배를 불러왔습니다. 우리가 손이나 발, 혹은 눈이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어버릴 정도의 개인 영성에 힘써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 한 사람의 범죄가 공동체 전체에 미치는 악영향 때문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사회적으로 힘 있고 영향력 있는 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별다른 영향력 없는 백 사람보다 귀하게 여기고 대접하는 것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교회 내에서 이런 세상 방식이 침투할 때 공동체 정신이 무너지게 됩니다. 

12~14절을 보십시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백 마리의 양을 가진 목자는 마치 백 명의 자식을 가진 부모와 같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양이 다 귀합니다. 그가 만약 한 마리 양을 잃어버렸을 경우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잠시 안전한 곳에 두고 그 길 잃은 양을 찾기까지 찾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그러합니다. 부모가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잘 나가는 자식보다 부족하고 연약한 자식을 더 안쓰러워하고 마음을 쓰듯 우리 하나님의 마음은 길 잃은 양과 같은 소자 한 사람에게 늘 가 있습니다. 

이상에서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살기 어려워졌다고 말합니다. 그런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말세지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극단으로 치우치는 개인주의,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 되고 성공하고 돈 많이 벌고 집 사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있는 사람과 관계성을 잘 맺어 그 덕을 보면 된다는 생각이 사람들을 고통하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 하나님은 저자 마태를 통해 귀한 공동체 정신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이 공동체는 각자 출세하고 성공하고자 하는 야심으로 가득한 어른들이 아닌,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의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배우며 성장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극히 작고 낮은 자를 예수님 대하듯 귀하게 여기고 섬기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에 공동체가 주는 기쁨이 있고 안식이 있고 위로가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절실히 원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공동체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주 안에서 이러한 공동체를 이루어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