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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0년 마태복음 24강 `주는 그리스도 `(마태복음 16:13-28)2020-08-10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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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마태복음 24

 

주는 그리스도

 

말씀/ 마태복음 16:13-28

요절/ 마태복음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나의 주요 그리스도로 만나는 은혜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빌립보 가이샤랴는 과거 단 지파가 살던 곳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 황제 가이사가 헤롯에게 선물로 주었고 이후 헤롯의 아들 빌립이 각각 로마 황제와 자기 이름을 따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불렀습니다. 요단강 물이 이 지역에서부터 흘러나왔고 그러므로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르는 아름다운 산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이곳에 오신 후 갑자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인자 곧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누구라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외쳤던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도 그 초기 사역 때 세례 요한처럼 회개의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 때 악녀 이세벨과 싸우며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했던 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이 손을 얹을 때 병자가 낫고 떡을 들어 축사할 때 오천명이 먹는 기적을 체험한 이들은 예수님을 엘리야와 같은 심정과 능력의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망하기 직전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고 이로 인해 많은 미움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예레미야처럼 임박한 심판을 경고함으로 당시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면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레미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관점에서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의 단편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혹은 선지자 중 하나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제자들의 답변을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이제 16장에 이르러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기간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면서 예수님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시간을 가진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누구라 하는지 각자의 생각을 물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0-16장 사이를 살펴보면 예수님은 이 질문의 답에 대한 힌트를 여러 번 주셨습니다. 11:3절에서 세례 요한이 옥에서 사람을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이사야 61:1절 말씀을 인용하시며 자신이 이사야가 예언했언 메시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11:28-30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토라의 근원이며 지혜의 근원임을 말씀하셨습니다. 12장에서 귀신들린 자를 그 결박에서 풀어주심으로 사탄보다 강한 자임을 보여주셨습니다. 14장에서 거친 바람과 파도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이러한 제자들의 생각과 결론을 대표하여 말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구약 시대 때에는 왕이나 제사장이 하나님의 세우심을 받을 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보내실 구세주를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여자의 후손을 통해 그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구세주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온 세상이 거의 다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 왕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그 다윗 왕의 후손을 통해 영원히 변치 않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머리 위에 눈에 보이는 기름대신 성령의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젊음의 소중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큰 은혜요 복이었습니다. 그들 자신이 죄로부터 구원받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당시 무리들처럼 예수님을 단편적으로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사대 성인 중 한 분이라는 견해가 많았습니다. 요즘 청년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막연히 부정적인 느낌만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전공지식이나 기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알아야 할 여러가지 지식이 있습니다. 영어나 중국어 같은 언어 지식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은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를 가르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관심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드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배우고 체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일정 기간 시간과 정성을 다해 말씀을 배우고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한 번 순종해 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말씀을 한 번 순종해 볼 때 말씀이 가진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 청년들이 여러 전공지식과 언어 능력도 필요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이러한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중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전공공부와 취업 등으로 몹시 바쁘다 할지라도 시간을 내고 정성을 드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관심을 갖고 배우는 시간을 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나는 큰 은혜를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7-1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하늘 아버지께서 계시로 알려주실 때에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분들 가운데, 또 온라인으로 말씀을 듣는 분들 가운데 예수님이 주요, 그리스도가 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깨달은 분이 계십니까? 참으로 복받은 분들입니다. 그것은 결코 자기 스스로 생각해서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베드로라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이 반석은 베드로라는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이 교회의 기초는 모퉁이 돌 되신 예수님입니다. 베드로 전서 2:4-5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교회의 터를 닦으셨습니다(고전 3:11). 그리고 친히 거룩하고 보배로운 모통이 돌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이들은 예수님과 같은 종류인 산 돌(living stone)이 됩니다. 그가 직업이 무엇인지, 돈이 많은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잘났거나 못났거나 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그에게 예수님을 나의 주요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신앙이 있는지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한 고백이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부가 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 몸의 일부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예를 들어 새끼 손가락 위에 붙어있는 손톱 하나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 손톱이 빠져나갈 경우 타이프 칠 때 영어의 경우 ‘a’, 한글의 경우 자를 잘 칠 수 없게 됩니다. 피아노를 치는 분의 경우 새끼 손가락으로 건반을 힘차게 두드릴 수 없어 음악의 완성도가 현저하게 떨어지게 됩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몸된 그리스도의 교회에 결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구성원들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곧 죽음의 세력이 교회를 해칠 수 없습니다. 또한 교회에는 천국 열쇠가 맡겨져 있습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하늘에서 응답합니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선포할 때 성령께서 각 사람의 마음에 빛을 비추셔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게 됩니다. 시련 가운데 있던 성도가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복을 받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20절에서 예수님은 당시 통용되던 메시야라는 용어에 대해 사람들이 정치적인 의미로 오해하지 않도록 아직은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그리스도가 가야 할 길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 제 삼일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왜 이러한 고난의 길, 죽음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사야 53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그리스도는 제자들이 기대했던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해줄 생명의 구세주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각자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죽음의 길을 가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죄값을 다 지불한 후 부활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본문에서 항변하였다는 표현은 원문상 꾸짖었다(rebuke)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꾸짖었습니다. 일견 그는 사랑하는 예수님이 그런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일이 절대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서 예수님을 위해 해주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그의 모든 인간적인 꿈과 소망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때 방금 전 베드로를 높이며 칭찬했던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베드로의 인간적인 야심과 욕심, 생각을 통해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를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24-26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님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처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37-39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처음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아마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심하게 책망을 받고 난 후 다시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 의미가 명확해졌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른다는 것은 곧 그가 가신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후 그들이 보기에 위험한 이 신앙이 퍼지지 않도록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을 박해하고 역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것입니다.

 

십자가 형은 1세기 로마인들이 즐겨 행하던 처형법입니다. 십자가형은 주로 흉악범이나 반역을 행하던 자들에게 집행되었습니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형벌로 엉덩이를 까고 곤장을 치거나 범죄 혐의자의 경우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주리를 틀었습니다. 조선 말기 한국에 왔던 한 외국인의 기록을 보면 주리를 트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형벌이었는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 다리 사이에 막대기 두 개를 넣고 주리를 틀었을 때 그 형벌을 당한 사람의 눈동자가 돌아가 하얗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형은 이러한 고통을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3일간 쉼없이 당하도록 하는 형벌이었습니다. 또한 발가벗긴 채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에 달아놓아 죽음보다 더한 수치를 안겨주었습니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저술가인 키케로는 십자가형을 가장 잔인하고 역겨운 처형법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십자가형을 죽음 중에서 가장 비참하고 불쌍한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십자가형을 몸서리치게 두려워하였습니다. 십자가란 말만 들어도 오금이 저리고 이마에서 땀이 쏟아졌습니다. 아마 조선시대 때 의금부에 잡혀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느끼던 공포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16장에 이르러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은유나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 의미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무슨 낭만이나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이루지 못했던 꿈을 성취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그가 짊어지셨던 십자가를 나도 지고 수치와 멸시, 저주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부모님, 자식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심지어 가장 소중한 내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열두 제자들 중 많은 이들이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제자들 중 야고보 사도가 가장 먼저 순교의 붉은 피를 흘렸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스스로 자청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순교 이후 수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이 신앙으로 인해 순교의 붉은 피를 흘렸습니다. 과거 성경은 테두리가 전부 빨갛게 칠해져 있었습니다. 이는 그 말씀이 순교자들이 흘린 피 위에 기록된 말씀이라는 의미었습니다.

 

실로 기독교는 피의 종교입니다. 자기 생명을 잃는 길입니다. 과거 순교자들이 흘렸던 피로 인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이러한 박해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필요가 없을 까요? 과거 신앙의 선배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피와 눈물과 땀을 흘리며 예수님을 따랐으니 이제 우리는 꽃가마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유람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면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여전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부인해야 하는 자기는 무엇이며 우리가 져야 하는 자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원문상 ‘to say No to’라는 표현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가 부인해야 하는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자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싫어하는 자기입니다. 창세기에서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사를 드리기 싫어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음과 정성을 다해 제사 드리기를 싫어하고 형식적으로, 떼우기 식으로 제사드리기 원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흉악한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이 아무리 부담스럽고 싫어도 자기를 부인하고 그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순종하여 살아야 합니다.

 

또 제자들이 져야 하는 자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현재 나에게 감당하도록 맡겨주신 주의 일입니다. 어떤 분에게 그것은 교회에서 맡은 직분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에게 그것은 부모나 남편, 혹은 자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에게는 직장 일 혹은 상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는 사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죽기보다 더 싫은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자기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홀라당 벗어버리고 싶습니다. 땅바닥에 내 팽개치고 다시는 쳐다보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만 아니라면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다고 주님께 하소연합니다. 그러나 내 팽개치고 싶은 그것이 바로 내가 져야 할 자기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따르던 제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1세기 성도들이 눈물과 피를 흘리며 사람들의 조롱과 수치를 받으며 각자 자기가 매달려 죽어야 할 십자가를 자기 어깨에 매고 처형장을 향해 길을 가던 그 발걸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자 할 때 그 1세기 성도들이 흘렸던 눈물과 피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에는 아픔이 따릅니다. 그러나 1세기 성도들이 받게 될 영광과 면류관에도 동참하게 됩니다.

 

어떤 것이 더 힘들까요? 단 한순간 진짜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더 어려울까요? 아니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날마다 마음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더 어려울까요?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각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점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 길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길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너무 힘들고 죽을 것 같을 때 먼저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가신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도록 힘주시기를 기도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7절은 큰 위로의 말씀입니다. 먼저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가셨던 주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 중에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십니다.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그 때에 얼마나 영광스러울까요? 얼마나 기쁘고 감사할까요? 반면 십자가가 너무 힘들고 수치스러워 팽개친 사람은 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끝까지 감당함으로 영원한 영광에 동참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이 말씀은 17장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고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고 사도행전의 성령강림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그 왕권을 가지고 다시 오십니다.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랐던 모든 이들의 머리에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주십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각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칭찬과 위로와 상급을 받는 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