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창세기 21강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말씀 창세기 31-33장 요절 창세기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쨍 하고 해 뜰 날 이란 노래가 있었습니다. 상황과 조건은 같지만 나란 존재가 변화되면 우리 삶에 쨍 하고 해가 뜹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 근본적인 행복을 가져오는 존재의 변화에 대해서, 그리고 이것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 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31장은 야곱이 20년간 생활했던 밧단 아람을 떠난 내용입니다. 그가 밧단 아람을 떠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상황 때문입니다.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이 자기 아버지의 재산을 다 빼앗아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곱이 삼촌의 얼굴을 보니 삼촌의 얼굴도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야곱이 더 이상 있기에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명령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성도가 상황이 힘들다고 거처를 옮길 수 없습니다. 상황이 힘드냐 여부보다 하나님의 뜻과 명령,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확신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으므로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아내들의 동의를 구했습니다. 야곱은 아내들에게 그녀들의 아버지가 문제가 많다는 것과 이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했습니다(5,13). 이에 라헬과 레아는 “아버지가 문제가 많다”는 말에 “120% 공감한다”며 야곱의 방향에 동의했습니다(16). 야곱은 라반이 무슨 억지나 꼼수로 자신을 막을 수 있기에 몰래 야반도주하듯 삼촌의 집을 떠났습니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라반은 야곱을 추격하여 7일 만에 뒤따라 잡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현몽하여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 말씀하시므로 라반은 야곱을 책망하지 못하고(24, 29) 자신의 신을 도둑질한 것만 거론했습니다. 그 신은 라헬이 훔친 드라빔인데 야곱이 동의하여 라반이 모든 짐을 수색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라헬이 안장 밑에 감추고 생리중이라고 함으로 끝내 숨겼습니다. 이에 야곱이 되려 라반의 그동안의 옳지 못한 삶을 책망하며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악덕기업주같은 삼촌에게서 자신을 지켜주시고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42). 라반은 야곱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야곱에게 불가침조약을 맺자고 제의합니다. 이는 자신이 잘못한 게 있고 야곱이 정말 성실하고 게다가 하나님이 함께 하므로 나중에 강해질 수 있기에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증거의 돌무더기를 쌓고 함께 제사를 드리고 함께 먹었습니다. 다음날 라반은 손자들과 딸들과 입 맞추고 축복하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그의 귀향길에 1차 장애물이었던 삼촌문제를 해결해 주심을 체험했습니다. 32,33장은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두 번째 장애물인 에서문제를 해결해주신 것을 기록했습니다. 야곱은 라반문제를 해결한 후에, 곧 바로 에서문제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라반을 여우에 견준다면 에서는 호랑이였습니다. 에서는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최대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는 에서에 대해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을 아신 하나님은 선제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하셨습니까? 야곱이 가는 길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내셨습니다(32:1,2).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천군들로 마하나임 곧 두 부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보호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군대를 보내사 야곱 일행을 앞뒤 혹은 좌우로 완벽하게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영적 눈을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군대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를 믿지 못하고 에서에게로 자기의 사자들을 보내 문제해결을 시도했습니다. 에서에게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알리고 은혜받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에서를 4번이나 자기의 ‘주’라고 표현하며 자기를 낮추어 에서의 마음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에서가 무려 4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자신을 치러 온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때 하나님의 군대를 떠올리며 두려워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히 두려워하고 답답해하다가 다시 인간적인 대책을 세웠습니다. 그 대책은 에서가 자신을 치는 경우, 한 떼라도 건지고자 일행을 두 떼로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주도적으로 인간적인 대책을 다 세운 다음에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을 찾고 기도했습니다(9-12). 기도내용은 어땠습니까? 먼저 하나님을 찾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노력을 다 한 후에 할 일이 없을 때 기도한 것입니다. 그는 먼저 조상들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찾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고향집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렇게 할 때 은혜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음을 상기시켰습니다. 하나님은 벧엘 약속대로 그와 함께 하셔 지팡이만 가지고 요단을 건넜는데 두 떼나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는 그렇게 자신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현재 자신의 가장 큰 문제인 에서문제에도 함께 해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그의 기도의 마지막은 약속의 말씀을 주장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12)” 기도가 파워풀하려면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에 기초해야 합니다. 정말 야곱의 기도는 완벽한 기도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기도문은 완벽했지만 기도의 능력을 실제 믿지 않고, 인간적인 대책을 다시 강구한 것입니다. 그는 기도 따로, 자기노력 따로 투트랙을 추구했습니다. 이것은 균형 잡힌 신앙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본문의 흐름은 그가 인간적인 사람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13-20절은 야곱이 에서의 마음을 녹이기 위해 예물작전을 구사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잠을 잘 잘 수 있습니다(시편 127:2). 그러나 야곱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대책마련에 부심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예물작전입니다. 그는 에서가 좋아할만한 짐승들로 550마리 이상을 선택합니다. 시가로 10억은 될 것입니다. 그것을 세 떼로 나누어 감정적인 에서가 지속적으로 기뻐하며 자신을 만나도록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각 떼의 인솔자에게 “주의 종 야곱”의 마음이 담긴 선물임을 알리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예물 떼를 먼저 보낸 야곱은 최후로 고민하다가 가족과 소유를 얍복 강 건너편으로 건네 보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는 왜 얍복 강을 건너지 못합니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라 앞으로 가긴 가야지만 호랑이처럼 무서운 에서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홍해 앞에 선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때 그가 기도를 했습니까? 그가 기도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우리도 너무 답답하고 힘들 때는 기도도 나오지 않고 대신 한숨만 푹푹 나옵니다. 그런데, 이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어떤 사람이 나타나 야곱과 씨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떤 사람은 누구일까요? 에서가 보낸 자객입니까?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한 것을 보면 어떤 사람은 사람이면서 하나님이신 분입니다. 그런 분은 성자 하나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고민하고 있을 때 나타나 씨름해 주십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이 씨름이 그냥 환상 속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보는 이도 있지만, 이 씨름의 결과 야곱의 허벅지 뼈가 위골되었기 때문에 환상속의 씨름이 아니라 실제 씨름입니다. 씨름이란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 합니다. 하나님의 씨름은 처음에 말씨름으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얍복 강을 건너가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보호를 약속하셨고 하나님의 군대도 보여주셨기에 그는 두려말고 가면 됩니다. 그러나 야곱은 “못갑니다 못가요”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말로 옥신각신하던 씨름은 물리적인 씨름으로 발전했습니다. 하나님과 야곱사이에 당기고 버티고 들어 올리고 버티는 격렬한 씨름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씨름은 거의 날이 새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도 포기치 않고 씨름하시지만 야곱도 끝까지 버텼습니다. 버티기로는 야곱 승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씨름하여 주실 때 빨리 자기를 꺾고 순종한 대표적인 인물은 마리아입니다. 누가복음 1:26-38절을 보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주어진 방향에 의구심을 표현했습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며 또한 그렇게 되었을 때 자신의 소박한 꿈과 이상이 깨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천사는 마리아의 반발에 “그래요? 그럼 다른 사람 알아볼께요~” 하지 않고 그녀를 말씀으로 씨름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곧 하나님의 방향에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요셉의 아내로 머무는 삶이 아니라 성모로서 구속역사에서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요 만세에 복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야곱도 자신에게 좋고 하나님께도 좋은 방향은 금세 순종했습니다. 예컨대 삼촌 집을 떠나라는 방향에 즉각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에서가 있는 곳으로 가라는 방향은 최대한 안 가려고 버텼습니다. 왜냐하면 순종하다가는 자기도 죽고 자기 가족과 족속이 다 죽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의 방향에 결사적으로 저항했습니다. 야곱은 자기생각, 자기 판단이 강하고 끈질겼습니다. 버티기 세계 챔피언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은 할 수 없이 야곱의 허벅지관절을 치셨습니다. 허벅지 관절은 사람이 서서 버티게 하는 힘의 중추인데 이 곳을 하나님이 치시자 야곱은 꼬꾸라졌습니다. 아무런 힘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장애인으로 땅바닥에 나뒹굴었습니다. 야곱의 생각은 여차하면 잽싸게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몸으로 도망치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끝내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허벅지 관절을 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사 포기치 않고 끝까지 도우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은 그를 그냥 내버려 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든지 우리가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도록 이렇게 우리를 치십니다. 허벅지 관절, 이것은 내가 자랑하던 건강일 수도 있고, 자녀들일 수도 있고 배우자일수도 있고 직장이나 양이나 제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고 하는 이어령 박사의 경우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딸의 건강을 치시자 하나님 앞에 고꾸라졌습니다. 모든 지성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엎드린 영성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굴복시키려고 이렇게 우리를 치실 때 그것을 슬퍼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알고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순종할 수밖에 없게 된 야곱은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합니까? 26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은 야곱이 자신에게 매달리도록 하기위해 그를 떠날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하나님을 붙들고 울며 애원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했습니다(호12:4a). 이는 순종하기위해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축복이란 무엇입니까? 직접적으로는 에서문제의 해결을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에서문제의 해결은 이미 하나님이 하신 말씀들 속에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믿지 못했는데 이제 내적 확신을 주시기를 간구했던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기 전에 먼저 무엇을 하셨습니까? 27,28 절을 읽겠습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먼저 그의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이름은 존재를 대변합니다. 특히 야곱이란 이름은 그의 지난날의 삶을 대변합니다. 야곱이란 이름은 ‘발꿈치를 잡는 자’ ‘지지 않는 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익을 쟁취하는 자’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은 야곱에게 자기발견과 회개를 촉구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지난날의 이기적이고 간교한 삶, 남에게 상처 주며 자기 유익을 챙긴 삶을 깊이 인정하고 회개하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야곱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그는 “야곱이니이다” 짧게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짧지만 그의 진실한 자기발견과 회개가 담겨있는 대답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십니다. 이는 그가 죄사함을 받았고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야곱은 벌레 같은 자에서 나비와 같은 자로 거듭났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그러면 그의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야곱의 바뀐 이름 이스라엘은 훗날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되었고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개명한 이유에 대해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라고 부연설명하셨습니다. 사람과 겨루어 이긴 것은 그의 과거의 삶을 축약한 것이고 이스라엘의 본 연의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선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것이 맞습니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자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은 첫째로 그가 아주 고집 세고 인간성이 강한 자라는 것으로 이런 그와 씨름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인내와 섬김을 반어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가 굳이 하나님을 이겼다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꺾여졌을 때, 하나님께 순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내는 데 포기치 않고 끝내 승리했다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자기를 꺾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통치를 받은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어찌하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이들을 말합니다. 야곱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그는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중심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중심에서 타인중심적인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쟁취하려고 하는 욕심 많은 자아에서 섬기고 베푸는 내려놓음의 자아로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 자기생각, 자기 판단, 자기고집의 자아에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는 자아로 바뀌었습니다. 야곱의 지금까지의 삶은 죄악된 자기가 왕이 되고 다스리는 삶이었습니다. 반면 이제 이스라엘의 삶은 하나님이 왕이 되어 다스려주시는 삶입니다. 내 생각과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야곱의 삶은 벌레 같은 흉측한 삶이고 이스라엘의 삶은 나비처럼 자유롭고 아름답고 평강하며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가 내가 주도하는 야곱의 삶은 욕심과 염려와 후회가 가득찬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스라엘의 삶은 자유와 평강과 순수함과 거룩함이 넘치는 삶입니다. 삶의 행복은 야곱적인 삶을 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삶의 행복은 이스라엘로 살 때 누리게 됩니다. 내가 이스라엘로 살 때 나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벌레와 나비는 같은 존재이지만 그 삶은 천지차입니다. 우리는 이미 거듭나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변화된 자신의 신분과 정체성, 삶의 중심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다시 불행해집니다. 우리가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나의 현재의 이름이 이스라엘임을 기억하고, 이스라엘로 사는 reidentify 작업이 필요합니다. 우리 다시 나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새롭게 인식할 때 다시 자유와 기쁨과 평화와 안식이 찾아들고 삶의 방향이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이런 작업을 매일, 매주 잘 감당하여 항상 자유와 기쁨과 행복과 삶의 방향이 분명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야곱도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29a). 이는 하나님에 대해 알고자 하는 소원이 생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놀라운 신비가운데 계신 분이요 무한자, 초월자로서 우리 인간의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는 답이 바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밝히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간구를 받으시고 그를 축복하셨습니다(29b). 그러자 그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 곧 하늘의 평강이 임했습니다. 마음의 평강과 순종의 길에 대한 확신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런 그의 내면은 밤과 같은 모든 어둠이 사라지고 밝은 태양이 솟아올랐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으므로 그 곳 이름을 브니엘로 바꾸었고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새로운 태양이 환하게 떠올랐습니다. 이제 야곱은 에서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기에 에서가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는 에서를 향해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나아갔습니다. 이는 아첨이나 굴욕이 아니라 변화된 존재로서 진심으로 회개와 사죄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에서가 달려와 그를 맞이하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고 두 사람은 울었습니다. “엉엉, 야곱아, 이 얼마만이냐, 다리는 왜 그러고? 고생 많이 했구나. 나는 다 잊어버렸다.” “흐흐, 형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에서의 마음을 녹이시고 변화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축복을 받으면 풀리기 힘든 인간관계 등 모든 문제도 눈 녹듯이 해결됩니다. 잠언 16:7절을 보면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원수라도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상에서 하나님은 야곱이 에서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철저하게 죄인으로서 자기발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사함과 평강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또한 그의 이름을 개명하사 그의 근본적인 존재의 변화를 이루셨습니다. 그의 삶의 이유와 목적이 달라지게 하셨습니다. 삶의 DNA와 화학식이 달라지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면 상황과 조건이 어떻든 그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내면의 행복, 만족, 평강과 기쁨을 소유한 자들이 됩니다. 우리는 이미 거듭나 새로운 존재가 되었지만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의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새롭게 함으로 모든 어둠이 사라지고 브니엘의 밝은 태양이 우리 심령에서 솟아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분은 저를 이삭과 같은 사람이라고도 하였지만 사실 내면 깊은 곳에 경쟁심, 이기심, 어찌하든지 최고가 되고자 하는 야심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저를 지탱하던 제자양성의 열매들이 떨어져나가므로 저는 고꾸라지고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 저를 깨뜨려주시고 저의 존재변화를 이루어 주시고 자유와 행복을 누리어 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제가 소유나 명예나 자기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구하며 왕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며 다스림 받기를 기도합니다. 자신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고 높이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문제는 많고 상황은 나쁘지만 내가 근본적으로 변화되면 브니엘의 태양이 뜹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중심인 사람들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또 거듭난 분들은 변화된 자기존재를 재인식함으로 참 자유와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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