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마태복음 8강 은밀히 보시는 내 아버지
말씀 마태복음 6:1-18 요절 마태복음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코로나 사태 기간에 우리는 본질적인 것들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예배는 무엇인가?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이런 주제들을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본질을 벗어나게 되면 지엽적인 것에 매여 불행하게 삽니다. 이시간 우리가 정말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닫고 마음에 새기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5장 후반부에서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고 그것을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주요신앙행위들을 어떤 동기로 감당해야 하는 가를 가르쳐주십니다.
본문에 언급된 당시 주요 신앙행위는 구제, 기도, 금식입니다. 6:1절은 그런 신앙행위들을 ‘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의’란 올바른 행위로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행위들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의를 행하지 않고 불의를 행하는 이들은 논외이고 의를 행하는 이들의 문제점을 다룹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절을 읽겠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주의하라”는 표현을 보면 마음을 모으고 집중하지 않으면 어느새 그러기 쉽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할 때 그는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상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께 상 받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께 상 받는 것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2-4절은 구체적으로 당시 사람들이 행하던 의중에서 구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제란 자기의 물질을 희생하여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구제할 때 주의할 점이 무엇입니까? 외식하는 자처럼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구제행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시 외식하는 사람들은 구제를 회당과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하였습니다. 구제는 본래 가난한 자들을 돕는 목적으로 합니다. 그런데 외식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척 하였지만 사실은 사람들에게 영광 받는 목적이 더 컸습니다. “나팔을 부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행위이며 동시에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전요한 박사님은 자신이 한 훌륭한 일들에 대해 자신은 북을 치진 않았지만 바이올린을 켠 적은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의로운 행동을 하고 말은 하진 않았지만 자막을 띄우는 정도의 은근한 행위들은 많이 하지 았나 되돌아봅니다. 왜 우리가 구제행위를 하고 자랑하면 안 됩니까? 그렇게 하면 자기의 상을 다 받아버려 하나님께 받을 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른손과 왼손은 한 몸이며 아주 가까운 지체입니다. 그런데 서로가 모를 정도로 하라니, 구제행위를 그처럼 은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아무도 모르게 하기가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이 나의 의로운 행위를 보고 계시며 갚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히11:6). 그러므로 성도의 은밀한 의의 실천은 단순히 도덕적 수준을 넘어선 믿음의 행위입니다.
다음은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5-8절은 기도할 때 자세를, 9-15절은 기도의 내용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세에 대해서 첫째는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과 둘째는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외식하는 사람들은 기도할 때 사람들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과 큰 거리 코너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이 나의 기도하는 것을 보고 그 경건함에 감탄하며 인정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 그들은 손을 들고 멋지게 기도하거나, 큰소리로, 멋진 미사여구로, 혹은 길게 기도하며 아멘 소리가 몇 번 나오나 체크했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겉은 기도하는 데 속은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다면 그는 외식하는 기도자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기도하기를 좋아했지만 사람들이 보지 않는 데는 거의 기도하지 않고 기도하더라도 아주 짧게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기본이며 본질입니다. 주님은 기도의 외식자들이 기도의 본질로 돌아가도록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주님은 그렇게 사람 앞에 기도하는 자들을 돕기 위해서 문을 닫고 골방으로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골방은 단칸방이라 자기 골방이 없는 사람도 있고 골방에 들어가서도 딴 생각만 하고 핸드폰만 하다 나오는 이도 있기 때문에 골방기도는 문자적인 의미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또 기도할 때는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중언은 거듭 말하고 부언은 덧붙여 말하는 것입니다. 왜 이방인들이 기도할 때 중언부언할까요? 이는 기도를 듣는 대상을 인격적인 존재로 알지 못하고 비인격적이고 소통이 어려운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필요로 한 것이 무엇인 지를 다 아실 정도로 소통의 달인이십니다. 그러니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할 이유가 전혀 없고 주문 같은 비인격적인 말들을 뇌까릴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인격적인 대화를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 말씀하신 김에 좋은 기도의 예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기도문에서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 몇 가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첫째로 기도의 대상입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존재의 근원이며 자녀들을 부양하며 위기의 순간에 자녀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존재입니다. 아버지이신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수준이 높은 분임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를 수준 높게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 뜻대로 해주지 않으실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차원 높게 인도하시기에 우리 뜻대로 인도하시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기도가 그대로 응답이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거절, 연기, 변형응답도 차원 높으신 하늘 아버지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 기도제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는 것인데 하나님이 피조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분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불완전하고 작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창조주는 크고 완전하시고 전능하십니다. 창조주의 영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존재에 걸맞게 대접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첫 번째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이름 곧 자기가 잘되고 자기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자나 깨나 이에 관심을 갖고 이를 위해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작음을 모르고 하나님의 크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크신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지니 정도로 여깁니다. 우리가 영적 눈을 떠서 하나님의 크심을 알아 우리의 주 관심과 기도제목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기를 기도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두 번째 기도제목은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에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하늘에서와 달리 땅에서는 사탄과 그 하수인들에 의해 훼방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도 실현될 때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우리도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제목은 하나님을 위한 기도제목이며 동시에 우리를 위한 기도제목입니다.
세 번째 기도제목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11) 일용할 양식은 몸을 지닌 인간에게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실 때 인간뿐 아니라 동물에게도 일용할 양식을 보장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아버지로서 피조물을 기본적으로 먹이고자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것도 없는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 먹을 것을 달라 호소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거의 40년 동안 그들이 굶지 않게 하늘에서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셨습니다. 광야에 아무것도 없기에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물고기는 생계의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 물고기가 어디에 있는 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빈 그물이었던 베드로에게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그의 먹는 문제를 일생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험하고 경쟁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먹고 살지 그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코로나 사태가 커지면서 미국은 지금 1000만 명의 실직자가 생겼고 우리나라도 대처가 잘 되었으나 국내소비가 위축되어 자영업자들은 큰 타격을 받고 경기가 침체되면 다양한 직종에서 실직자들이 발생할 위기에 있습니다. 무역의존도가 70%인 우리나라에서 세계경제의 영향을 받기에 먹고사는 문제가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근 중에도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예비하시고 과부를 통해 먹이신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먹이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이런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허락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신 주님은 ‘우리들’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주위 형제자매들의 일용할 양식문제에도 관심 갖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함을 뜻합니다. 우리가 주위의 형제자매들을 돌보고, 어려운 선교사님들도 돌보고 가난한 이웃 나라들도 돌아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계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음 기도제목은 죄문제를 위한 기도입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죄사함을 받도록,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죄사함은 과거의 죄문제요,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은 미래의 죄문제입니다. 왜 죄문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죄문제는 우리 삶을 파괴시키고 우리의 삶의 힘과 생명과 기쁨을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키고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게 하여 전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앞에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듯 날마다 죄사함을 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과거의 죄문제를 처리하는 데 달인들입니다. 그러나 현재 죄와 싸우는 부분에서 약합니다. 그래서 죄사함 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며 쉽게 시험에 자신을 내어줍니다. 그러나 악의 실체인 마귀는 그렇게 관대한 존재가 아닙니다. 마귀는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면 그냥 놔주지 않습니다. 영혼을 탈탈 텁니다. 그래서 마귀의 시험에 들면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을 다 털리고 비참한 심령이 되어 겨우 빠져 나옵니다. 사탄에게 낚이게 되면 낚인 물고기처럼 입이 찢어져야 간신히 탈출하게 됩니다. 그러니 시험에 빠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누려야 할 풍성한 생명과 행해야 할 선한 일들이 많이 있잖습니까? 하나님의 도구로 귀하게 쓰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마귀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하루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기도 말미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음을 고백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며 찬양하는 것이고 그 통치권과 영광이 온전히 회복되어야 할 이유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이상의 주기도문은 주문이 아닙니다. 생각 없이 외기만 하면 안 되고 그대로 외지 않더라도 차라리 그 의미와 취지를 알고 기도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16-18절은 금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금식은 어떤 면에서 최고의 신앙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음식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고, 더 나아가 생명의 원천인데 그런 음식을 끊고 하나님께 나아가니 가장 간절한 신앙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금식을 하나님께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면 이는 외식하는 연극배우와 같은 행태입니다. 이런 금식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으며 배고픔만 남기는 허무한 금식일 뿐입니다. 금식이 정말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면 금식하지 않는 것처럼 금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신앙행위가 사람 앞에서 행해지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상을 잃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신앙행위들을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첫째로 사람을 크게 여기고 하나님은 작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전염병으로 세상을 치시자 사람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들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가고 싶은데도 못가고 집에 갇혀 있습니다. 도시와 나라들이 봉쇄되고 세계경제가 휘청대고 있습니다. 지금의 코로나 바이러스는 과거 대전염병에 비하면 약과입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112만명의 확진자, 6만여명의 사망자가 생겼는데, 1720년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 때 파리 인구의 절반이 속절없이 죽고 유럽인구의 1/3이 죽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의식하고 잘 보이려 했던 사람들이 그 무수한 죽음의 무리 속에 끼여서 사라졌습니다. 인생들은 너무나 보잘 것 없습니다. 그들은 바람에 나는 티끌 같고,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이것이 인생들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우리는 애쓰며 심지어 이중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결국 심판의 날, 하나님 앞에 함께 설 보잘것없는 존재들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외식하는 삶을 살았는데 이제 회개하고 절대주권자요 심판장이신 하나님께 인정받기위해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 크신 심판장이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사랑하는 내 하늘 아버지의 시선과 그분과의 교제가 너무나 좋기 때문에 그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꾸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만큼 좋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사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 앞에 서는 골방이 감옥과 같다면 왜 자꾸 골방으로 들어가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은밀한 대화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대화는 거기서 모든 행복이 나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시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시간을 잘 쓴 시간입니다.
현재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격리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 어떻게들 살고 있습니까? 감옥과 같은 삶을 살고 계십니까? 답답해서 죽을 것 같습니까? 행복한 미소가 번집니까? 영화 마션에 보면 주인공은 화성에서 500여 일을 홀로 보냅니다. 그런데 마션의 주인공은 화성에서 홀로 지내는 데 의외로 행복하게 지냅니다. 그 이유는 감자를 배양하는 데 성공하고 감자가 자라는 것을 보내는 재미에 푹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라나는 감자를 보면 행복해하며 혼잣말하며 그 500 일을 거뜬히 보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람을 떠나 혼자 있으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영적 진공상태에 빠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지 않는다면 사회적 격리가운데 있는 나는 감옥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시고 나와 대화하시고 나와 동행한다면 감옥이 아니라 골방입니다. 기도의 골방은 연인과의 교제처럼 달콤하고 충만한 공간입니다. 기도의 골방에서 하나님과 함께 기도의 감자를 키우며 희망의 싹을 티워보십시오. 우리가 나의 골방에서 내 아버지를 만나고 내 아버지와 교제한다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사회적 격리 기간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 앞에 바쁘게 살던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사람들을 향한 문을 닫으시고 당신의 골방으로 다 강제초청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너무도 바빠서 하나님 만날 시간도 없고 늘 사람앞에서만 살기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를 일대일로 만나고 우리와 깊이 교제하기 원하시사 억지로라도 우리를 당신앞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이제 나의 골방으로 들어왔구나! 나와 깊이 교제하자” 우리가 이제 영적 진공상태, 감옥 같은 삶을 기도의 골방으로 바꾸어 행복의 감자들을 싹틔우고 키워내는 기쁨을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내 아버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서면 내 아버지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앞에 와서 자신과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코로나 기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제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무한정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과 교제도 풍성하고 즐겁지만 매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이 시국에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수도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어디나 골방입니다. 이 봄에 꽃구경도 좋지만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의 골방에서 맘껏 기도하며 행복의 꽃을 피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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