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17년 누가복음 제 7 강 /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누가복음 5:1~11)2017-03-26 13:47
작성자

2017 누가복음 7강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말씀/ 누가복음 5:1-11 

요절/ 누가복음 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오늘 말씀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과 영혼의 만남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이러한 만남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때는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게네사렛 호숫가 곧 갈릴리 바다로 오셨습니다. 그곳에서 낭랑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고 무엇보다 그 시대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 때에 많은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왔는지 자칫 예수님께서 떠밀려 호숫가에 빠질 지경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살기 급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무리가 몰려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영혼을 가진 존재이므로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도 가장 필요한 것은 직장이나 안정된 미래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습니다. 현재 각 캠퍼스 별로 바이블 카페, 바이블 아카데미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린 많은 젊은이들이 동아리방과 강의실로 몰려들어 미어터질 지경이 될 것을 믿고 감사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에 한 쪽에서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물은 하얀 린넨(linen) 천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낮에 사용할 경우 물고기들이 보고 피하므로 주로 밤에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또 사용한 후 그대로 두면 썩으므로 반드시 아침에 깨끗하게 씻어주어야 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몰려드는 무리로 인해 한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 배는 시몬의 배였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그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셨습니다. 그리고 배에 앉으신 후 계속하여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을 다 마치신 후 예수님은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은 예수님의 깊은 세계로의 초청입니다. 현재 시몬은 어부로서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삶은 매일 동일한 일을 반복하는 일상의 삶이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삶 속에서 그는 고단하기도 했지만 또 작은 기쁨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끌어올린 그물 속에 고기들이 가득담겨 파닥거릴 때, 또 그 고기를 현금으로 바꾼 후 가게에 들러 아내와 아이들에게 줄 작은 선물을 살 때 그는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기를 잘 잡는 날에 해당하는 경우였습니다. 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 날은 밤새 수고하지만 알바로 고용한 어부들에게 페이 줄 돈도 부족하였습니다. 그런 날이면 지난 밤 그저 헛수고를 한 것 같아 허탈하였고 퇴근길 쓰린 빈 속을 막걸리로 달랬습니다. 그의 삶은 그날 잡은 물고기의 수에 따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시몬의 삶이 얕은 세계라고 말씀하십니다. 얕은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세계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세계 속에서 죽지 않고 살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등골이 휘도록 일합니다. 어떤 날은 직장 상사의 그야말로 나를 미치게 하는 언행으로 인해 당장 그의 면전에서 욕설을 해주고 회사를 뛰쳐나오고 싶습니다. 사업을 하는 분들은 진상 고객으로 인해 고통당합니다. 음식이 짜네 쓰네 서비스가 맘에 드네 안드네 진상을 부리다가 SNS에 올리겠다고 협박하는 손님들을 대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올라와 얼굴이 벌겋게 되고 혈압이 200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현실을 생각하고 참습니다. 이렇게 한 달 동안 온갖 수모를 견디며 열심히 수고하며 일하지만 월말에 결산을 해 보면 남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을 보면 노인은 84일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85일째 되던 날 드디어 어마어마하게 큰 청새치가 노인의 미끼를 물었습니다. 노인은 무려 3일간 사투를 벌인 끝에 드디어 청새치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항구로 나아가던 도중 상어떼가 나타났습니다. 노인은 다시 상어떼와 밤새 사투를 벌였습니다. 노인이 휘두른 나이프와 몽둥이는 모두 부러졌고 노인의 몸은 온 몸의 진이 빠져 뻣뻣해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예상은 했지만 아침이 되어 보니 청새치는 앙상한 뼈만 남아 있었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노인은 죽도록 수고하지만 남는 것이 없는 삶의 실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삶을 살고 있던 시몬을 깊은 세계로 초청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초청하시는 깊은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첫째, 깊은 세계는 믿음의 세계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참으로 깊습니다. 바둑에도 초보에 해당하는 9급이 있고 최고수인 9단이 있는 것처럼 믿음의 세계에도 초보자가 있고 고단자, 더 나아가 최고수가 있습니다. 믿음의 고수들은 하수들이 두려워 벌벌 떠는 상황 속에서도 마음의 평안함을 누립니다. 심지어 그런 상황 속에서 기쁨을 누리는 무지막지한 고수들도 있습니다. 


지난 봄 수양회 때 배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바로 그와 같은 무림의 고수입니다. 그들은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을 경우 당장 뜨거운 용광로에 던져 넣겠다고 위협하는 느부갓네살 왕을 향하여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왕보다 더 높으신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설령 용광로에 들어가 재가 되어 사라질지언정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다니엘은 그 4명의 고수들 중에서도 최고수였습니다. 그는 하루 세 번 드리는 기도를 멈추질 않을 경우 사자굴에 던져질 것을 알면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임에도 이런 고수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런 고수들은 평소에는 험블해 보이고 뭐 별 거 없어보일지 모르지만 삶의 위기 상황이 닥치면 그 고수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이처럼 고수로 성장하면 마음 속에 늘 평안함과 기쁨을 누리므로 참 자유함이 있고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이러한 믿음의 깊은 세계로 초청하십니다. 



둘째, 깊은 세계는 성경의 세계입니다. 성경은 비유하자면 양파와 같습니다. 한 번 까 보면 그것이 전부인 것 같은데 거기서 또 까보면 또 새로운 것이 나옵니다. 이번에 몇몇 리더들과 창세기를 공부했는데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의미가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풍성하게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이와같은 성경의 깊은 세계로 초청하십니다. 


셋째, 깊은 세계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알면 알수록 우리를 실망시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연애하면서 이성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심한 실망감과 심지어는 사람에 대한 환멸에까지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그의 겸손과 그의 섬김과 그의 사랑에 깊은 영혼의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과거 자기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이 예수님과 비교해 볼 때 배설물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빌립보서 3:7-9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다음으로 예수님은 깊은 데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현재 시몬이 있는 곳에서 깊은 데는 거리상 결코 가까운 곳이 아닙니다. 갈릴리 호수는 갈릴리 바다라고 불릴만큼 큰 호수입니다. 이 호수에서 깊은 곳으로 가려면 상당한 시간 노를 저어가야 했습니다. 5절에서 베드로가 말한 것을 기초로 볼 때에 그는 밤새 일하였습니다. 현재 베드로는 야근을 마치고 온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피곤한 상황이었습니다. 또 지금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깊은 데로 갔다가 헛탕을 치면 와서 다시 그물을 씻어야 했습니다. 또 낮에 흰 그물로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깊은 데로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에게 깊은 데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예수님이 초청하시는 깊은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순종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치고 피곤한 상황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그냥 가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순종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깊은 데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어떤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까? 우리가 현재 내가 처한 상황에서 그 말씀을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자 결단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시몬은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나 잡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에 의지하겠다”는 표현은 NIV에는 “But because you say so”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말씀대로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선생님의 신앙과 인격을 믿어보겠다는 의미입니다. 또 KJV에는“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at thy word)”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상황이나 나의 상식, 현재 컨디션에 의지하기보다 말씀 안에 내가 모르는 깊은 진리가 담겨져 있음을 믿고 그 말씀을 의지해서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으로 와서 도와 달라 하였는데 고기가 두 배를 가득 채우고도 부족하여 배가 호수 속으로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베드로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을 통해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며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사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베드로를 특별하게 죄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당시 젊은이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까요? 


베드로는 정말 열심히,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못잡았어도 다음날 아침이 되면 그물을 깨끗하게 씻은 후 퇴근했습니다. 해가 지면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어 출근했고 해 뜨기 전에는 퇴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작은 어부의 삶이지만 자기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컨트롤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렇게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 때, 남들이 쉴 때 나는 일하고, 남들이  아파 누웠을 때 나는 일하고, 남들이 낙심하고 절망할 때 나는 변함없이 일한다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 물고기를 잡는 사건을 통해 그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물고기 전문가였기 때문에 이와같은 방식으로 물고기를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물고기를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시는 분인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해 들었던 소문, 또 예수님이 하신 말씀 등을 자신이 체험한 사건과 연결시켜 볼 때 신성을 가진 주님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이 주님을 마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멸시하고 살아온 자신의 삶이 얼마나 죄인된 삶인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바다 속에 원래 물고기가 있는거라 생각했습니다. “아 바다 속에 당연히 물고기가 있지 그럼 토끼가 있남? 별 싱거운 소리 말고 그물이나 던져” 말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실상 그 모든 물고기도 다 주님께서 그 안에 넣어두신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살아갈 삶의 모든 터전을 만들어주시고 그에게 쉬지 않고 그물을 내릴 수 있는 체력과 성실함을 주시고 더 나아가 생명 그 자체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을 무시하고 마치 모든 것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죄였습니다. 또한 그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고 자기 뜻과 자기 계획대로만 살아왔습니다. 그러한 삶은 마치 과녁을 자기 마음대로 벗어난 화살과 같이 죄인된 삶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주님께서 오셨는데 무시하고 엉덩이를 주님 면전으로 향한 채 그물이나 씻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또한 얼마나 무례하고 흉악무도한 죄인인지 깨달아졌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 앞에 엎드려 부들부들 떨며 고백하였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하나님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인생은 자기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처럼 돈도 빽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스스로를 절대적으로 책임져야 하므로 죽을 힘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졸업하기 전까지 어떤 스펙을 쌓아야겠다 계획을 세워놓고 철저하게 그 계획대로 움직이고자 합니다. 매일 매일 그 날의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움직입니다. 그 계획에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불성실한 자신을 학대하고 그 따위로 해서 뭐가 되겠어 하며 스스로에게 정신적 고문을 가합니다. 이런 청년들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느끼기 쉽지 않습니다. 내가 죄인이면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나쁜 짓 하는 저 위의 사람들은 뭐냐고 따집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재능을 주시고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마치 계시지 않는 것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삶 자체가 바로 죄입니다. 청년들이 자기 삶의 주인되시는 그 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결코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인생의 주인 되신 분, 자기에게 생명을 주셨던 주님 되신 그 분을 만나는 그 순간 놀라며 두려움 가운데 그 분 앞에 꿇어 엎드려 외치게 됩니다. “오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 분 앞에서 죄인으로서 자기 발견을 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영혼이 주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요, 가장 복된 순간입니다. 그 만남은 우리의 남은 인생을 영원히 바꾸게 될 생애 최고의 만남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 주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자기 발견이 되지 않으신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본문 말씀을 통해 2천년 전 시몬 베드로가 만났던 그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주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자기 발견을 함으로 가장 복된 인생을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0a절을 보십시오.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시몬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는 그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주셨습니다. 


10b절을 보십시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이 주신 새로운 삶의 방향은 “사람을 취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취한다는 표현은 원문상 사람을 산 채로 잡는 어부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열심히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본래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두신 뜻은 사람들을 도와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갈릴리 바다에서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물고기를 잡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능력을 1%밖에 쓰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시몬에게는 예수님이 하신 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한 번 순종해보는 그 짧은 체험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 있는 주님되심을 알아보는 영적인 센스가 있었습니다. 또 그에게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분위기가 되도록 짧은 순간에 분위기를 확 사로잡는 그런 리더쉽이 있었습니다. 그가 물고기를 쫓아다닐 때에는 그런 은사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을 취하는 인생을 살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숨겨졌던 은사가 확 살아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주신 말씀을 의지하여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덧입을 때 그 숨겨졌던 은사와 더하여 물고기 중에서도 대어를 낚는 유능한 어부가 되게 됩니다. 


어제 우연히 조선대학교 개척 조상이신 고 김모세 목자님이 쓰신 UBF 초기 개척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 개척사를 읽으며 큰 감동을 받았는데 가장 감동적인 것은 6.25 전쟁과 군사 독재의 암울한 현실 가운데 무슨 정치 경제적 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절망에 빠진 대학생들의 마음에 말씀을 통해 믿음을 심고 소망을 심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신 김모세 목자님은 가난하여 남들보다 4년 늦게 조선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UBF 운동이 시작된 1961년 대학 신입생이 되었고 그 해 가을부터 시작된 UBF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하여 말씀을 받았고 말씀 안에 이 시대와 민족에게 희망이 있다는 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선대학교 믿음 의 조상으로서 각 단대별, 과별로 성경공부 모임을 이루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였습니다. 그는  재학시절 군대에 가면 혜택을 보아 16개월이면 군전역을 할 수 있었으나 각 단대별, 과별 성경공부 모임을 이루기 졸업할 때까지 군 복무를 미루었고 결과적으로 30개월 군복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행복하였습니다. 졸업할 무렵에는 1주일에 22개의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한 사람이 말씀으로 변화되었을 때 조선대 한 캠퍼스가 변하였습니다. 또 그 시대가 변하였고 새 역사가 창조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처럼 사람을 돕는 일이 가장 귀한 일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자기가 할 수만 있다면 사람을 돕기 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는 그런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성품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처럼 내향적이어서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불편해하고 혼자 있기 좋아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은 사람을 잡는 어부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같은 사람은 조용히 도서관에 앉아서 성경연구를 하고 사람낚는 어부는 외향적이고 사람을 좋아하는 저 분이 전담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취하리라”는 말씀은 시몬에게만 주신 특별한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8:19-20절에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하셨습니다. 제자란 예수님을 본받고 배워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작은 예수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평생 사람을 돕는 어부요, 양들의 목자요, 한 사람을 깊이 돕는 제자양성가로 사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문제는 타고난 성품이나 성격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의 핵심은 내가 이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가 하지 않는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결단할 때에 주님께서는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모세에게 아론을 붙여주신 것처럼 내향적인 성품의 사람에게는 외향적인 성품의 동역자를 붙여 주십니다. 또 늘 방방 뛰고 사람들과 대화하느라 별로 속에 든 것이 없는 동역자에게 내향적인 사람은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사람을 돕는데 요긴한 자료를 공급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방향에 순종하고자 하기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담대한 용기도 주시고 상대방의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분별력과 지혜도 주십니다. 우리에게 사람을 돕는 가장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주신 방향대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다고 결단하시길 기도합니다. 그 때 우리를 주님께서 친히 빼어난 사람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을 만난 시몬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는 힘찬 첫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주님은 새로운 삶의 방향을 주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우리가 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사람을 돕는 어부의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