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마태복음 제 36 강
착하고 충성된 종
말씀 / 마태복음 25:1-46
요절 / 마태복음 25:21
오늘 말씀은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으로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우리로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하시고 창세로 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게 하십니다.이에 세가지 비유를 들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말세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저희가 비유를 통해 말세를 준비하는 우리의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깨어 있어야 합니다. 1절입니다. 예수님은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라고 하십니다.본문에서 그때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를 말하는 것으로 신랑은 그리스도를, 열 처녀는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그 열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었습니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였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에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습니다.왜 미련한 자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을까요?사실 당시 기름을 따로 준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기름을 사려면 멀리 가야 했고 또 그릇에 담아가는 수고를 감당해야 했습니다.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이 곧 오겠지” 나름대로 생각한것 같습니다. 또 기름이 떨어지면 “뭐 좀 빌리지”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신랑은 어떻게 왔습니까?신랑이 빨리 오면 좋은데, 신랑은 더디 왔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신랑이 신부 집으로 찾아옵니다. 이때 신부는 집안에 있고 신부의 들러리들이 등을 들고 나가 신랑을 맞이하여 혼인 잔치가 시작 되었습니다. 보통 신랑이 초저녁에 오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신랑집이 멀면 신랑이 오는 시간을 예측하기 어려웠습니다. 또 신랑 집에서도 바로 보내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밥도 한술 떠야 하고, 동네 사람들이 요구하면 신랑이 노래도 한곡 불러야 했습니다.그러다 보면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에 신부집에 올 수도 있었습니다. 이에 이들은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고 잤습니다.여기서 신랑이 지체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신자들의 기대보다 지체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열 처녀 모두가 졸며 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6절입니다. 그렇게 졸고 있는데 갑자기 소리가 들렸습니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했습니다. 7절입니다.이에 열 처녀는 벌떡 일어나 입가에 떨어진 침을 쓱 닦고 부스스해진 눈을 비벼 말똥말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른 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왜 일입니까?등에 기름이 떨어져 가므로 불이 꺼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어머, 어머 이게 왠일이니..’ 이때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얼른 등에 기름을 채워 등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는 불이 꺼져가는 것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8절입니다. 이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슬기 있는 자들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슬기야 정말 미안한데 나한테 기름 조금만 빌려주면 안 될까? 나중에 배로 갚을게 응’ 그러나 저들이 말했습니다. 대답하되 ‘미련아 우리가 쓰기에도 다 부족할까 하니 차라리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렴’ 이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은 기름을 사러 줄을 맞추어 뛰어가야만 했습니다.그런데 10절을 보십시오.그사이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그들이 사러 간 사이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굳게 닫혀 버렸습니다. 11절입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기름을 사온 미련한 다섯 처녀는 문이 닫힌 것을 보고 황급히 문을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그러자 안에서 신랑이 대답했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습니다.이를 볼 때 이들이 겉으로는 신랑을 맞이하고 기다리는 삶을 살았지만, 사실은 이들은 신랑과 어떤 관계성도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들은 똑같이 등을 준비하고 기다리며 살았지만 밤이 늦도록 기다렸지만 정작 신랑이 왔을 때 기름이 없으므로 신랑을 맞이 할 수 없었습니다. 기름이 준비되어 있지 않음으로 혼인 잔치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즉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그런즉 “깨어 있으라” 하셨습니다.이는 너희가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함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날과 때를 알지 못함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어서 기름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말세에 우리 신앙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기름을 예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등은 우리 신앙생활을 기름은 우리 신앙생활을 지속하게 해주는 원천(Souce)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을 깨어 있게 하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 혹은 성령과 믿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의 혼인 잔치를 예비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19:7, 9절은 말했습니다."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였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를 천국 혼인 잔치로 인도하십니다. 이 혼인 잔치는 하루 이틀에 끝나는 잔치가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천국 잔치요 구원의 잔치요 생명의 잔치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만남과 기쁨이 있습니다. 오직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들어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이에 우리에게는 그 신랑을 맞이할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생각보다 늦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졸고 영적인 잠을 잡니다. 그러나 이처럼 재림이 지체되는 이유는 (벧후 3:8,9절)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요 또한 신앙의 옥석을 가리는 뜻이 있습니다. 믿음의 인내에 대한 테스트일 수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우리 신앙의 등이 꺼지지 않게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야 합니다. 살전 5:19절은 성령의 불길을 끄지 말라" Don't put out the Spirit's fire"고 하였습니다. 기름을 준비하여 환히 비추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 기도와 믿음은 우리 신앙을 타오르게 하는 좋은 기름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은 죄악된 시대에서 나를 지켜주는 기름입니다. 주님을 향한 나의 간절한 기도는 나를 이 세상에 잠들지 않고 깨어 있게 합니다. 또한 성령은 죄악된 세상에서 나를 거슬러 살게 하며 믿음은 나로 세상을 이기게 하는 힘입니다.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심령으로 간직할 때 그것이 어두운 세상에서 나를 잠들지 않고 깨어 있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을 때 그것은 나로 성령의 기름이 되어 뜨거운 신앙의 불꽃을 일으킵니다. 무엇보다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것 깨어 있는 것은 늘 그 심령에 말씀이 살아있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회개함으로 늘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 심령에 성령을 받음으로 예수님의 보혈 은혜가 넘쳐나는 것을 의미하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그 감격과 죄 사함을 붙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코 이런 믿음과 성령의 기름 말씀의 기름은 갑자기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아무리 친한 친구나 동역자라 할지라도 빌려줄 수도 꿀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빨리 안 오시니까 마음이 느슨해지고 졸립습니다. 이에 세상에 마음 주고 있다가 몸도 피곤해지고 마음도 피곤해집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욕심으로 근심 걱정으로 분별력을 잃고 영적인 눈이 감기려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십니까? “깨어 있으라” 하십니다. 그날과 때를 알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함으로 준비가 필요합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다가는 내 신앙의 불이 꺼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저희가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에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님을 향해 등을 밝히고 신랑을 맞이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합니다. 14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겼습니다. 15절을 보면 각각 그 재능대로 각각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씩을 주고 떠났습니다. 16절입니다. 이에 이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18절을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19절입니다. 그리고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결산하였습니다. 오지 않을 것 같은 주인은 불현듯 왔고 결산도 갑자기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가 와서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는 충성되이 일하여 100%의 유익을 남겼습니다. 22절에 보면 또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똑같이 하여 그도 100%의 유익을 남겼습니다.이에 주인은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21절과 23절을 입니다. 주인이 말하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시며 칭찬하였습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최고의 칭찬으로 종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더 많은 것으로 맡겨 주셨습니다.뿐만 아니라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했습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것은 그를 주인의 식구들처럼 대우하는 것이요 그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장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들을 착한 마음과 충성된 마음으로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장사해서 100%의 유익을 남긴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같은 코로나 상황에서는 망하지 않으면 용한 일입니다. 그럼 이들은 어떻게 100%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까요? 바로 주인에 대한 착하고 충성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착한 마음이란 삐뚤어지지 않는 마음, 순수한 마음, 감사하는 마음,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어떻게든 주인에게 유익을 남겨 드리려는 마음입니다. 또한 충성이란 그 마음의 중심을 다 하여 감당한다는 뜻으로 처음에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한결 같은 모습으로 일한 것을 말합니다. 그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장사가 잘될 때나 안될 때나, 변함없이 수고하고 기쁜 마음으로 이를 감당했습니다. 때로는 장사가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인의 기뻐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참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적은 일이건 맡기면 “내가 무엇이관데 나같이 미천한 자에게 이처럼 귀한 사명을 맡기십니까?” 하며 아주 적은 일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말씀도 잘보면 주인도 종의 어떤 부분을 칭찬했습니까? 그가 남긴 100% 물질이나 성과가 아니었습니다. 종들의 착한 마음과 충성심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실 본문에 나오는 주인은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온 세상의 주인인 하나님께는 물질이나 성과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시는 것은 성과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충성됐는가, 그가 얼마나 착한 마음으로 감당했는가를 보십니다.장사야 어찌 되었든 어찌하든 착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몸부림친 그것을 보십니다. 힘들고 어려운데 하나님 앞에 살고자 한 그 충성심과 진심을 보십니다. 어려운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충성을 다한 하나님을 향한 그 착한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것은 남긴 달란트나 성과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렇게 착한 마음으로 감당할 때 또 100%의 결심도 맺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24절을 보십시오. 반면에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에게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해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하며 그는 녹이 슬어 검게 그을린 동전 하나를 내놓았습니다. 이 사람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는 주인에 대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섯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은 한 달란트만 주었다고 불만을 품었습니다. “공평하지 않다. 나를 차별했다” 불평하고 땅에 파 뭍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의 칭찬한 것을 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자나 두 달란트 받은자나 그 남긴 열매를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칭찬도 남긴 달란트와 상관없이 똑같이 했습니다. 주인은 몇 달란트를 맡겼건 그 맡은 자의 태도와 자세를 칭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받은 것이 적다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주인을 원망했습니다. 또한 그는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굳은 사람'이란 영어 성경에 'a hard man'으로 '거칠고 사납고 혹독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종은 주인을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무자비한 'Mafia Boss'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런 주인을 위해 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에 일하고 빼앗기느니 일하지 않고 놀다가 본전이나 주면 혼나지는 않겠지 생각하며 땅에 파 묻었습니다. 이런 그에게는 주인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주인에 대한 감사나 충성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불평과 원망으로 허송새월을 보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이에 주인은 이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합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셨습니다. 악하다는 것은 그의 주인에 대한 이런 오해와 마음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게으르다는 것은 전혀 일하지 않고 인생을 낭비했다는 것입니다.다른 것이 아니라 너의 이 악한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너의 이 게으름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실그가 조금이라도 주인에게 유익을 돌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 돈을 은행에라도 맡겨 이자라도 받게 했을 것입니다.그런데 그렇게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악한 마음을 가지며 주인이 무엇을 주어도 불평과 불만입니다. 무엇을 주어도 그 의도를 의심하고 힘들어 합니다. 그는 그리고 게으름으로 허비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원의 은혜가 감사하면 절대 게으를 수가 없습니다. 열심히 손발을 놀려 무엇이라도 하게 됩니다.
이에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그는 가리고 있던 그 한 달란트마저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30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말했습니다.“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였습니다. 무익한 종이 되어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났습니다. 무익하다는 것은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고, 바깥 어두운 데서 있다는 것은 결국 천국 혼인 잔치에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끔찍한 심판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그 주인에 대한 오해와 감사함이 없는 마음이 악한 마음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받으시는 것은 많은 외적인 열매가 아닙니다. 많은 성과가 아닙니다.우리가 그분을 사랑함으로 착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 했느냐 그렇지 않았냐를 보십니다. 그 착한 마음과 진심을 받으십니다. 그 하나님을 향한 진심을 받으십니다.
평생 그 사람이 제자를 몇 명 세웠느냐? 역사의 크기가 얼마나 크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학과 공부를 하되 결과적으로 A가 몇 개냐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공부를 감당했느냐 그렇지 않으냐입니다. 내가 아직 신앙도 어리고 말씀도 잘 이해가 되지 않되지만 그래도 주일날 시간과 마음을 드려 하나님앞에 나오는 것, 하나님은 그 진심을 받으십니다. 내가 비록 제자양성은 못 했지만 다른 양들을 기쁘게 맞이하고 그들을 환영하고 영접하는 일을 하였다면 하나님은 이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뭐 큰일 못해도 동역자들과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준비했다면 그 사람도 칭찬하실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죄와 싸우며 믿음 투쟁을 하다가 혹 넘어져 하나님 앞에 나올 면목이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마음의 중심을 아시고 이렇게라도 하나님앞에 나온 그를 하나님은 칭찬하십니다. 내가 직장에 있고 아이들 때문에 가정에 있어 비록 캠퍼스에 나가기 쉽지 않지만 캠퍼스와 목자님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감당했다면 하나님은 이 사람도 칭찬 하실 것입니다.
충성이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주님의 역사를 위해서 순교를 하는 것만이 충성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21절에서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충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임 스피릿 목자님이 매주 청소하는 것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찬양팀이 매주 찬양 섬기기 위해 그것 때문에 미리 모이고 연습하고 그 수고를 사람들 잘 모릅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앰프 조절하며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목자님들의 수고는 더더군다나 모릅니다.
이러한 것이 적은 일 같아도 이는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이를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전도나 일대일도 매우 적은 일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하지만 그러나 수고한 것에 비에 열매가 너무 미비해 보일 때 참으로 힘이 듭니다. 그래서 자신도 고개 들기가 힘이 듭니다. 날마다 무너지는 자신을 보며 하나님 앞에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나의 그 진심을 보십니다. 나의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다 정말 잘하고 잘하였어!’ 저희가 어떤 적은 일이건 착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에 일에 결과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열매는 착한 마음과 충성의 열매입니다.
셋째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1절을 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십니다. 오셔서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십니다. 32절입니다. 그리고 목자가 양과 염소로 구분하는 것같이 모든 민족을 오른쪽과 왼쪽으로 구분하십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그때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하십니다. 왜 이들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습니까? 35절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게 갇혔을 때 와 보았기 때문입니다. 3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이 이르되 어느 때에 자신들이 그렇게 했는지 되물었습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40절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즉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을 자신에게 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이에 이렇게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긴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영원한 불에 들어가는 자들도 있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왼편에 있는 자들로써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형제의 아픔을, 지극히 자들의 아픔을 돌아보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는 얼마나 사랑이 없는 모습입니까? 그 형제의 아픔을 배고픔과 헐벗음을 외면했습니다. 그 형제가 배고파 하는데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 목마름과 매임을 돌아보지 아니했습니다. 도리어 그는 헐벗고 병들었다며 연약한 자라 판단하였습니다. “너는 왜 그 모양이냐!”며 이 아픔과 연약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무랬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런 이들은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 형제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지극히 작은자에 대한 생각이 어떠합니까? 예수님은 이 작은 자가 주린 것을 자기가 주린 것으로 보셨습니다. 이 작은 자가 목마른 것을 자기가 목마른 것으로 여기셨고 그들의 헐벗음을 자기의 헐벗음으로 보셨습니다.실재 예수님의 사역도 대부분 소자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영접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문둥병에 걸려서 냄새나는 자에게 손을 대 치료해 주셨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도 그 믿음을 축복하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에 걸려서 온 그에게도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며 그를 도우셨습니다. 거라사 광인같이 아무런 소망 없이 된 그 한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 많은 돼지를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상의 강도와 같은 자의 구원 요청에도 주님은 그를 영접하시고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이 예수님의 삶이 항상 이렇게 지극히 작은 자 소자에게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안에 지극히 작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먼저 질병과 어려움으로 고통받으시는 우리 목자님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이분들을 돌봐야 합니다.신앙이 아직 어린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주님을 만날때까지 그 믿음과 용기를 붙돋아 주어야 합니다. 또한 마음이 연약하여 죄에 넘어지며 믿음이 없이 흔들리는 우리의 형제들도 있습니다. 이들을 이해하고 이들을 돕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또한 넓게는 복음을 모르는 이 시대 양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갈 길을 모르고 방황하는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영적으로 굶주린 이들입니다. 이들은 마음 둘 곳 없어 나그네 되었고, 우울증과 죄악으로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중독이나 게임의 감옥에 갇혀 고통받고 있습니다.게으름과 열등감에 갖혀 힘들지만 자기도 나오지 못해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도움을 필요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통으로 울고 있습니다. 길이 없어 방황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작은 자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 한 사람을 섬기고 감당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작은 자 하나를 감당하는 이들을 37절에서 의인이라 부르셨습니다. 또한 46절에서 이런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저희가 말세에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캠퍼스에 내 주위의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캠퍼스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복음의 말씀으로 영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도 말씀을 감당하며 주님의 이 시대 양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다가왔습니다.하나님이 복음이 없는 이 시대 양들에 대해 가슴 아파하시며 구원하기 원하시는 깨닫게 되었습니다.하나님이 얼마나 저들을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헐벗고 굶주리며 고통받는 이들 말씀이 없어 고통받으며 울부짖는 그 영혼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최근 이들을 소 닭 보듯 하였습니다. 심정을 잃어버리고 피싱하다 받은 상처만을 붙잡고 고통스러워서 할 때도 있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학교에 가기가 힘들어지자 점점 양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에 저의 마음은 꺼져가고 있었고 세상에 잠들고 있었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에 눈이 감겨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감당하며 소자 한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제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작은 자 한 사람을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생각하시는지 다가왔습니다. 제가 목자의 심정을 회복하고 이 하나님의 마음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오시기까지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소자 한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구체적으로 내 주의의 캠퍼스의 소자 한영 혼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 형제들을 위해 캠퍼스 양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종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저희가 재림의 때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저희가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깨어 적은 일에도 충성하며 지극히 작은자 하나를 섬기는 착하고 충성된 종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섬기는 의인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