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성탄 제 3 강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말씀 / 누가복음 2:1-20
요절 / 누가복음 2:10,11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요새 최고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어 접종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인가요? 대학합격 소식인가요? 손흥민의 활약 소식인가요? 어떤 사람은 우울할 때마다 손흥민 활약 동영상을 본답니다. 이런 기쁜 소식들은 작은 기쁨의 소식에 불과합니다. 이시간 우리는 큰 기쁨을 주는 좋은 소식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이는 근본적이고 영원하고 중대한 기쁨이며 이 기쁨이 있으면 작은 기쁨이 비록 없어도 문제가 안 될 정도입니다. 이시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알고 그 기쁨이 충만히 임하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누가는 예수님 탄생의 역사성을 알리기 위해 당시 시대 배경을 말했습니다. 당시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를 호령하던 시대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BC 63년에 태어나 AD 14년까지 77세를 산 로마의 초대 황제입니다. 그는 BC 27년부터 총 41년간 로마를 통치했으며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였으나 로마원로원으로부터 존엄한 자라는 의미의 아우구스투스 라는 칭호를 부여받습니다. 그는 그 칭호에 걸맞게 온화하고 현명한 행정가요 정치, 군사, 제국의 통치에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었고 그로 말미암아 팍스로마나 200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그가 로마제국 전체에 호적명령을 내렸습니다.
호적은 호주(戶主)를 중심으로 그에 속하는 사람의 신분에 관한 사항을 관청에 등재하는 것입니다. 호적은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시대부터 확고하게 시행되었는데 2008년부터는 ‘가족 관계 등록부’로 부릅니다. 호적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호구조사, 인구조사 입니다. 로마는 징집이나 세금징수를 위해 로마가 다스리던 식민지에 이 호적을 시행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이 말씀은 누가 호적명령을 집행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지역은 수리아 총독의 관할하에 있었기에 그에 의해 집행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유대의 왕은 헤롯대왕이었는데 호적명령과 같은 식민지 통치에 중요한 사항은 자치정부가 하지 않고 직접 총독을 통해 챙긴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 황제의 명령을 받은 수리아 총독의 호적시행령에 따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3). 보통 인구조사는 현거주지에서 합니다. 그런데 유대나라는 족보를 따지기를 좋아하고 지파나 가문을 중시하기 때문에 아마도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요청으로 가문중심, 본적지 중심의 호적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로마 황제의 보좌로부터 시작된 호적명령은 수리아 총독과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요청을 거쳐 유대민족 민초들에게 떨어졌습니다. 그 결과 나사렛에 살던 민초였던 요셉도 짐을 꾸려 호적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요셉은 다윗의 가문이었으므로 현 거주지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지방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만삭된 약혼녀 마리아와 함께 올라갔습니다. 요새 세계는 봉쇄명령, 여행제한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데 당시 민초들은 거꾸로 강제여행명령으로 고통을 받은 셈입니다. 요셉은 가게 문을 닫고 이동거리만 짧게는 3-4일, 길게는 1주일 걸리는 거리를 이동해야 했습니다. 여인이 호적명령의 대상이었는가 논란이 있는 데, 대상이 아닌데도 데려갔다면 요셉은 마리아가 나사렛에 남아 있다가 불륜녀로 봉변을 당할까봐 보호차원에서 데리고 갔을 것입니다.
로마황제의 호적명령이 내려졌을 때 요셉과 마리아의 심경이 어떠했을 까요?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로마황제에 대해 “지가 뭔데, 선민인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반감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종교지도자들이 중간에서 호적장소를 본적지로 바꾸었다는 말을 듣고 로마황제보다 그들을 더 미웠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조용히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구약성경을 많이 읽고 영적 이해력이 높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왜 우리가 이 시점에 호적하러 베들레헴으로 가야할 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은 없을 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미가서 5:2절 말씀이 샛별처럼 떠오르지 않았을 까 생각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곳이 베들레헴이라는 사실은 조금만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가이사의 호적명령에 두신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감지하고 감격가운데 베들레헴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힘들어하면서 베들레헴으로 갔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가이사의 호적명령과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생각을 쓰셔서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나 억울한 상황만 볼 것이 아니라 역사의 배후에 살아계셔서 그 뜻을 이루시는 주권자 하나님과 그 손길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쉽게 울분을 터트리고 사람을 원망하며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 앞에 나아가 조용히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그 때 심령에 말씀의 빛이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감사와 기쁨가운데 어려움을 감당하며 주의 길을 갑니다.
코로나가 1년 정도 지속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지난 1년은 코로나 천하였습니다. 코로나가 로마황제처럼 세계를 다스렸고 질병관리본부는 수리아의 총독처럼 우리의 삶을 수시로 제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하나님은 놀라운 뜻을 이루시며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과 말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과 고요히 대면하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늘 마스크를 쓰고 다녀서 보통 때보다 더욱 건강하고 병에 걸리지 않는 은혜도 있었습니다. 가정에 시간을 쏟고 가정을 회복하는 좋은 기회도 되었고 지구의 대기도, 사람도 쉼을 많이 얻었습니다. 어려운 선교사님들을 돌아보며 더욱 사랑의 네크워크가 형성되었습니다. 온라인으로 더 쉽고 빠르게 교제하며 교제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우리는 직장이나 교회에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때로 불합리한 것들을 봅니다. 그들은 우리의 가이사요 수리아 총독이며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이 각각, 때로는 모든 것이 뒤섞여 우리에게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가게 하는 괴로움을 선사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우리가 잘 감당함으로 우리의 베들레헴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고 기쁘기를 기도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해산할 날이 찼습니다. 그리고 결국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7). 본문이 영화라면 카메라는 먼저 로마 황제궁과 가이사의 화려한 삶을 비추고 수리아의 총독을 거쳐 이제 작은 동네 베들레헴의 여관 마굿간의 아기를 줌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의 오심은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누가 희생과 섬김을 알아봐주면 그래도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희생과 자기 비움을 알아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가이사의 보좌는 황금보좌였으나 예수님의 보좌는 말구유였습니다. 가이사는 수많은 사람이 환호하며 숭배하였으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말 못하는 미물인 동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구유에 말없이 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찌기와 같이 낮아지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왜, 마굿간 말구유에 뉘여 계신 것입니까? 표면적으로 볼 때, 베들레헴이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 여관방을 잡을 수 없고 또 사람들의 마음이 각박해서 임산부에게 방 한 칸 내어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사실은 예수님의 자기선택이었습니다. 미시시피의 공주였던 마더배리 선교사님은 자기선택으로 더럽고 위험하고 불편한 우리나라에 성경선생이요 목자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선교사컴파운드에서 편히 사시지 않고 시내에 자취방을 얻고 그곳에 기거하시며 한국대학생들을 어머니처럼 섬기셨습니다. 이런 선교사님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4절은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한국 UBF 대표를 하셨던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마더배리의 집을 방문하고 거기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예수님을 배우고자 한국대표를 마치시고 6년간 아프리카로 선교사로 나가셨습니다. 루터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에 대해 크신 하나님이 자신을 한없이 작게 만드셨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번 주에 종로1부 선교사초청 성탄기도모임에 레바논 조스터드, 조한나 선교사님이 초청됐습니다. 조한나 선교사님은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감동적으로 간증했습니다. 동생을 통해 UBF에 왔는데 성경공부가 너무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양들을 섬기시는 목자님들의 삶은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여름수양회에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우리 죄인들을 섬기시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통해 목자님들의 섬기는 삶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게 되었고 자신도 예수님을 배우고자 목자요 선교사의 삶을 결단했고, 중동의 화약고 레바논에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우리는 보통 영광은 높은 자리,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 뭐든지 맘대로 할 수 있는 권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광은 겸손과 섬김, 낮아짐과 자기 비움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영광스러운 곳은 말구유요, 가장 영광스러우신 분은 구유에 뉘어 계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그 어린 주 예수, 눌 자리 없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 저 하늘의 별들 반짝이는데 그 어린 주 예수 꼴 위에 자네”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 우리를 높이시기 위해 자신을 한없이 낮추신 아기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배울 때 영혼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번 성탄에 어려운 선교사님들과 목자님들을 돕고자 하는 데 우리도 물질이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부요케 하기위해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을 배우며 구제헌금을 잘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20절은 첫 성탄의 놀랍고 기쁜 소식이 누구에게 전해졌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사자가 나타나 그들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원래 공식적인 통로로 한다면 성탄의 소식은 성전의 대제사장이나 종교지도자들에게 전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탄의 소식은 당시 3D업종에 종사하던 목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들은 그 밤에 집에서 편히 자지도 못하고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하고 순수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는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 전해지는 지를 잘 보여줍니다. 복음은 심령이 부요하고 자족하고 아무 문제없이 사는 이들에게 임하지 않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그들에게 임한 성탄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요절인 10,1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는 정말 사람들이 주목하고 경청해야 할 빅빅 뉴스를 알려준다고 했습니다. 그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이 소식은 민족, 국가, 지역, 인종, 계층,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수혜대상이 되는 소식입니다. 지난 번 재난구제지원금 지급 대상을 결정할 때 소득수준 몇 %를 기준으로 하느냐를 가지고 논란이 있었는데 댓글들을 보니,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해달라는 내용이 아주 많았습니다. 좀 형편이 나은 사람들도 보탬이 되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받고 싶어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지만 그 혜택이 미미하다면 그 기쁨은 소소한 기쁨, 작은 기쁨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면서도 그 기쁨의 크기가 큰 소식이 있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 소식은 바로 구주탄생의 소식입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0) 구주탄생의 소식이 왜 그렇게 기쁜 소식입니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상태로 존재이유와 목적도 모르고 깊은 공허와 무의미가운데 살며 죄가운데 서로에게 고통을 주며 결국 죄의식 가운데 살다가 죽어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를 해결하지 않고는 인간은 무엇을 해도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변다윗 선교사님이 섬기는 카자흐탄의 부자 회장님이 계십니다. 이제 나이가 70대 후반입니다. 그분은 축구장 20개 정도의 땅을 소유하고 계신데 변다윗 선교사님에 자주 국제전화를 걸어 엉엉 우신다고 합니다. 왜 우실까요? 그에 비해 변다윗 선교사님은 배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도 카자흐에서는 나름 CEO였는데 낮아져 배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배달을 한다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감사합니다. 이미 자신은 구원을 얻고 주님과 사랑의 관계성가운데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 가가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낮아지신 예수님을 배우니 감사하여 종종 하늘을 보며 “Thank you, God”을 외치며 감격가운데 산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그에게 은혜를 베푸사 둘째 다니엘이 명문 노스이스턴에 합격하게 하시고 선교사 자녀의 어려움을 자소서에 잘 쓰므로 4년 전액장학금과 기숙사비 전액면제라는 놀라운 혜택을 덤으로 주셨습니다.
누가 세상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입고 부자가 되더라도 그가 구원을 받지 못하면 그는 실패자입니다. 그는 우주고아입니다. 죄의 거미줄에서 매여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삶을 살다 결국 죽음과 심판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깊은 절망과 두려움가운데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큰 기쁜 소식은 구주탄생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의 깨어진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러 오셨습니다.
제가 최근에 한 스님의 강의를 많이 들었는데 그 영상에 보니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이 크리스천들이라 밝히면서 그의 강의를 찬양하는 글들을 많이 올려놓았습니다.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그 스님이 인간관계의 해법 같은 것을 지혜롭게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풀어야 하는 지를 가르치지 못합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막연하게 말합니다. 자신은 죽음이후에 천국이나 극락이 있는지 모르겠고 있는 지 없는 지가 중요하지도 않다고 합니다. 착하게 살면 분명히 좋은 곳에 갈 것이고 없으면 착하게 산 것으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상관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의 강의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정확한 실존과 근본적인 구원을 말하지 못합니다. 구원문제의 핵심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이며 이 관계의 회복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확실히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구약성경의 약속대로 다윗의 동네에 태어나셨습니다. 구주의 탄생, 이것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구주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과 자신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십니다.
기쁨에는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 있습니다. 작은 기쁨이란 크게 볼 때,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기쁨입니다. 가변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나 큰 기쁨은 근본적이고 영원하고 중대한 기쁨입니다. 우리가 큰 기쁨에 매이고 작은 기쁨은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중에 남이 누리는 작은 기쁨을 누리지 못하여 마음 아픈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기쁨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크리스천으로서 가오가 흐트러지지 않고 우울해 하지 않으며 항상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그 정도로 가오가 흐트러질 정도의 작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큰 기쁨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천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일 뿐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현재 이끄시고 다스리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현재 조금 어렵더라도 나의 삶을 다스리고 베스트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생각할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천사의 메시지의 핵심은 “기뻐하라”인데 우리가 비록 작은 어려움들이 있지만 여전히 크게 기뻐하며 미소를 잃지 않은 영적 거인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아름다운 스토리를 완성하실 줄 믿습니다.
천사는 어서 가서 탄생하신 구주를 확인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주의 표적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라고 했습니다(12). 구주의 표적은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를 비우시며 권위를 부리지 않으시는 아기 예수님입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우리를 살리는 이가 진정한 구주입니다. 말구유의 아기는 십자가의 예표입니다. 말구유에 누인 아기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참 구주의 표적이며 참 목자의 표적입니다.
천사들의 성탄 메시지 후에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찬송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이 되고 땅에서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줍니다.
천사들은 찬양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고 목자들은 빨리 베들레헴 동네에 가서 성탄메시지가 사실인지 확인 했습니다. 그들은 구유에 누이신 아기를 보고 천사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듣는 사람들이 다 놀라워했고 특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고 생각했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습니다.
결론입니다. 구주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소식은 모든 사람에게 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가 작은 기쁨에 울고 웃지 않고 큰 기쁨을 주신 구주 예수님을 인해 천사들처럼 찬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