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신년 제 1 강
만물의 으뜸이 되신 그리스도
말씀/ 골로새서 1장
요절/ 골로새서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골로새서의 주제는 “그리스도”입니다. 골로새서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 한 분을 새롭게 소유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 사도는 3차 전도 여행 때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2년동안 집중적으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 제자 중 한 사람이 아마도 에바브라이며 그가 아마도 자신의 고향인 골로새로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세워진 교회가 골로새 교회로 추정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바울 사도는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사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는 것은 골로새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이 문제를 언급하거나 이 문제로 인해 그들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먼저 그들이 잘하고 있는 점을 언급하고 이것을 칭찬합니다.
사람이 대뜸 만나자마자 ‘너 이거 잘못했어’ 이런 말을 들으면 지금까지 자신이 한 모든 일이 부정되고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마련입니다. 이때 마상 -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면 ‘아 그래도 내가 그런 점에서 열심히 한 것을 알고 있구나. 인정하고 있구나’ 생각이 되고 마음문이 열려 잘못한 것에 대한 지적이 상처가 아닌 관심과 사랑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우리도 바울 사도의 지혜를 배워 무슨 권면의 말을 할 때 먼저 상대방이 잘하고 있는 것을 깊이 인정해주고 칭찬해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바울 사도가 깊이 감사하는 점이 무엇입니까? 이는 골로새 성도들이 예수님을 잘 믿고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넘친다는 것이었습니다. 5절을 영어성경(NIV)을 보면 “the faith and love that spring from the hope stored up for you in heaven” 곧 “하늘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에 그 소망에서 나오는 믿음과 사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 소망 사랑 중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는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3:25-26절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는데 믿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만약 천사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 나라의 신비한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영적 소망이 넘친다 하여도 믿음이 없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고린도전서 13:13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 소망, 사랑 중 사랑이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굳게 닫힌 죄인의 마음문을 여는 신비한 열쇠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의 마음문을 열어 멀리 떠난 죄인들을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만듭니다.
그러면 소망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본문에서 바울은 소망에서 믿음과 사랑이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소망 자체는 믿음과 사랑에 비해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소망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서 한 사람의 믿음과 사랑이 무럭무럭 성장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정체 상태에 빠지거나 퇴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복음을 처음 듣던 날부터 온전히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믿음과 사랑이 날이 갈수록 성장하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큰 믿음으로 성장하였습니까? 우리의 사랑이 예수님을 처음 사랑했을 때보다 더 큰 사랑으로 성장하였습니까? 우리가 현재 자신의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8절에서 바울은 에바브라를 통해 복음을 들은 그들이 다른 지역의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의 열매를 맺으며 성장하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9-12절은 바울의 기도입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먼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기도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to fill you with the knowledge of his will through all the wisdom and understanding that the Spirit gives” 곧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이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를” 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어떤 혼돈스러운 상황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만약 그 상황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만 있다면 문제의 절반 이상은 이미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알려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중요하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본 편지도 쓰지만 그들이 이 편지를 읽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고 바울이 의도한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 바울을 통해 우리는 귀한 영적 교훈을 얻게 됩니다. 세상과 관련한 일반적인 일이야 말을 잘 하고 논리적으로 설득을 잘 하면 상대방이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은 다릅니다. 영적인 일들, 특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은 성령께서 밝히 깨닫게 해주지 않으시면 그것을 알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한 사람을 영적으로 돕고 그를 설득하기 원한다면 먼저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간절히 해야 합니다. 심지어 그를 설득하는 그 시간에도 성령께서 그의 마음문을 밝혀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다음으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골로새 성도들에게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의 표현이 굉장합니다. 그냥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한다고 하면 될 것 같은데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라고 기도합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한 사람의 마음을 밝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하나님은 한 사람이 신앙생활을 끝까지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모든 힘과 능력을 공급해주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의 일은 자기 힘과 능력으로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자기 힘과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어느 지점에 이르면 도저히 할 수 없다는 한계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그 지점이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힘 주심, 하나님의 능력 주심이 필요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가진 그 영광의 능력, 하나님이 소유하신 그 무한한 능력을 덧입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골로새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받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다시 한 번 11-12절을 보십시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생각할 때 골로새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신 그 영광의 능력을 덧입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들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수퍼맨처럼 되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권능을 행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것이 필요할 때 하나님은 그런 능력도 주십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받을 때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되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가 충만하게 되리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끝까지 인내할 수 있고 그 가운데 심지어 기쁨을 얻으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가진 성도가 가장 훌륭한 성도이고 가장 성숙한 성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 힘과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난 한 달간 종로 7부에서는 선교사님들과 줌 모임을 하였습니다. 줌 모임을 통해 선교사님들의 실제적인 어려움과 기도제목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선교지에서 느끼는 여러 내적 외적 어려움, 경제적 어려움,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면서 느끼는 아픔과 외로움, 소외감, 건강문제, 자녀들이나 양들의 문제로 인해 근심하고 눌리는 마음들을 나누었습니다. 이분들을 위해 특히 실제적인 기도제목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해주어야 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선교사님들이 그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그 가운데서도 충만한 기쁨을 얻고 또 감사가 넘치도록, 하나님께서 선교사님들을 능하게 해주시도록, 능력을 부어주시도록 간절해 기도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또 동역자들과 양들을 위해, 선교사님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하고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20절은 이른바 기독론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하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지시고 우리를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곧 내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15-17절을 보십시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죄로 더럽혀진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셨습니다.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시고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의 그 권능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낮아져 구유에 태어나시며 죄인들을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섬기시며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의 그 생명을 던지는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이십니다. 고대에 ‘아리우스’라는 사람은 이 말씀에 기초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낳으신 분이며 그러므로 예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 때가 있었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열등한 분이며 피조물로서 그의 속성과 본성은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아리우스가 이런 주장을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아리우스는 자기 나름대로 영적 투쟁을 굉장히 열심히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구체적 내용은 남아있지 않지만 오늘날 버전으로 한다면 100일 동굴 기도, 매년 한 차례 이상 40일 금식기도와 같은 보통 사람이 따라하기 힘든 투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이런 영적 투쟁을 통해 자기도 예수님과 동등한 수준에 이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가진 그 신성을 자기도 소유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영적 투쟁을 열심히 하는 자기를 높이고 상대적으로 예수님은 끌어내렸습니다. 특히 골로새서의 이 본문을 자기 주장의 주요 근거로 삼았습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이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고대 아리우스의 주장과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골로새 전체 문맥을 볼 때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이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 예수님이 존재하지 않았다가 아버지에 의해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에게서 나신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에 속한 것입니다. 초대 교부들은 이를 “eternally begotten”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곧 예수님은 아들이시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 이전부터 계셨고 영원 이전부터 성부 하나님에게서 나신 자로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1장이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또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곧 예수님이십니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예수님은 단지 우리에게 죄사함과 구원을 주기 위해 일하신 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요 모든 만물을 예수님이 창조하셨고 예수님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습니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다(in him all things hold together)”는 것은 예수님이 모든 만물이 질서 정연하게 유지되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지금 현재도 붙들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만물을 붙들고 계신 그 손을 놓아버린다면 세상 만물은 그 순간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코로나 바이러스까지도 예수님의 손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을 통해 바울은 예수님이 얼마나 엄청난 분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뒤의 2장에서 자세히 나오겠지만 현재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더 풍성하고 열매맺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예수님 말고 다른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바울은 예수님이 너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 가장 위대한 분임을 증거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느 정도로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지금 현재 무엇을 생각하고 계시든지, 혹은 무엇을 상상하고 계신든지 예수님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곱하기 천배 만배 아니 무한대로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예수님은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교회는 거듭났지만 아직 온전히 성화되지 못한, 자기가 깨지고 부서지는 가운데 믿음이 현재 진행형으로 성장 중인 이들이 모여 있습니다. 또 죄악된 세상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저도 목자로 살면서 때마다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로 마음에 근심과 염려가 가득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이 문제로 고민하며 근심하다가 겨우 그 문제가 좀 해결되는가 싶으면 다음 날에는 또 다른 문제가 터져 마음이 근심이 가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을 통해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예수님이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이 저에게 정말 코페르니쿠스적 생각의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때마다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로 인해 근심하고 고민하고 염려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시라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생길 때 근심과 고민과 염려는 발가락이나 다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심하고 고민하고 염려하는 것은 머리가 하는 일입니다. 나는 교회의 몸인데 왜 머리가 해야 할 일을 지금 내가 하고 있는가 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즉시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 지금 이런 이런 문제들이 있습니다. 머리되신 주님께서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시고 각 사람에게 지혜가 필요하면 지혜를 주시고 어떤 상황에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주셔서 이 문제를 친히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멘”하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 마음에 하늘이 주는 평안함이 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얼마 전 일용할 양식 책자에서 어떤 목자님이 지은 시를 보니까 자신을 새끼 손가락에 비유하였습니다. 새끼 손가락은 어떤 무거운 것을 들 때 거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거운 것을 들 때 새끼 손가락이 있는 것이 그래도 없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뿐만 아니라 피아노를 칠 때 새끼 손가락은 없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몸의 지체입니다. 꼭 피아노를 치지 않더라도 새끼 손가락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청년들이 휴대폰을 볼 때에도 새끼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받칩니다. 새끼 손가락이 없다면 휴대폰을 조작하는 것이 몇 배나 더 힘들 것입니다. 또 타자를 칠 때 매우 필요합니다. 그 새끼 손가락이 다쳤다면 머리는 얼마나 신경을 쓰고 그 손가락이 치유되도록 돌보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어려움이 생긴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신경을 쓰고 돌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이십니다. 근본이란 “beginning”으로 모든 것의 시작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이는 “firstborn from among the dead”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상에서 예수님은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모든 것의 근본이 되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십니다. 이 모든 것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18절을 보십시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예수님이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신다는 표현은 NIV에서는 “so that in everything he might have the supremacy”로 표현되었습니다. 또 NASB 성경에서는 “so that He Himself will come to have first place in everything”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에는 2장에서 바울 사도가 언급할 본 골로새서의 주제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몸으로 비유한다면 가장 중요한 부분인 머리가 되십니다. 또 그가 세상만물을 창조하셨으므로 모든 것의 시작이 되십니다. 또 부활로 친다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바울은 3가지 분야를 언급했습니다. 그 세 가지 분야에서 각각 예수님은 최고가 되시고 으뜸이 되십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암시합니까? 이는 예수님이 모든 것에서,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되시고 으뜸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2장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골로새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좀 더 높은 수준의 영적 성장을 이루기 원했습니다. 좀 더 충만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신령한 지식, 영적 비밀을 아는 지식에 이르기 원했습니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기 원했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분야에서 예수님이 으뜸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영적 성장은 예수님의 겸손과 그 낮아지심과 온유와 자기 희생과 사랑을 배우는데 있습니다. 충만한 기쁨은 예수님이 주십니다. 최고의 신령한 지식과 영적 비밀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과 최고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배워 본받고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이땅에서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을 최고로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 한 목자님의 소감을 통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많은 목회자들이 지하에서 교회를 시작하여 종내에는 대형교회의 높은 보좌에 앉으려는 꿈을 가지고 있으나 진정한 목자는 구유에서 시작하여 십자가로 끝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이 저의 마음에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뭔가 직감적으로 가장 성경적이고 최고의 진리의 말로 들렸습니다. 저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정말 최고로 잘 살았다 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큰 역사를 일구고 많은 제자들을 세우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구유에 나신 예수님처럼 작고 초라해 보이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섬기는 것, 목자생활에 성공하여 보좌에 앉는 것이 아닌 주님 주신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살아가는 삶에 주님의 최고의 인정과 칭찬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배워 날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지극히 작아보이는 일에 충성을 다하는 종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9-23절에서 바울은 이 예수님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들이 만약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그들이 들은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으면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서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4-29절에서 이제 바울은 본격적으로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그가 근심하고 염려하는 주제를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4:18절을 보면 그는 현재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보통 감옥에 갇힌 사람이라면 자기 문제 생각하기에도 벅찬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 교사들로 인해 미혹되고 있는 골로새 성도들을 생각할 때 조금도 쉴 수 없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바울의 육체에 채우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이 되십니다. 이 예수님을 배우는 삶이 최고의 삶입니다. 우리가 2021년 새해에는 이 예수님을 최고로 여기고 이 예수님을 깊이 배우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