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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신년 2강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골로새서 2:1-23)2021-01-03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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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신년 2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

 

 

말씀 골로새서 2:1-23

요절 골로새서 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로새 교회에는 영지주의, 율법주의, 천사숭배와 같은 이단들이 교인들을 교묘히 속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마음이 흔들리며 신앙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사실을 안 사도바울은 많은 기도 끝에 그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도록 하여 예수님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도왔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을 통해 많은 것들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능력이 많아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이 이것저것을 다 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내적 방향만큼은 분명하고 한가지여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시간 우리 삶의 분명한 방향과 목적이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 깊이 배우고 이 예수님께 깊이 뿌리내리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 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과 라오디게아 교인들, 그리고 기타 자신이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힘썼습니다. 힘썼다는 것은 전투 용어인데 구체적으로는 바울이 기도하고 서신을 쓰는 수고를 한 것을 말합니다. 왜 바울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도 이렇게 힘쓰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자신에게 말씀을 들은 에바브라를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이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의 귀한 백성들이기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마음으로 일면식도 없는 이들을 위해 힘쓰는 삶을 살았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그들을 위해 힘쓰는 것을 알게 함으로 그들이 마음에 위로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가 혹은 그들이 혼자 분투하고 있지 않음을 알고 용기를 얻기 때문입니다. 종로1부는 재작년에 모든 선교사님들께 위문품을 한 박스씩 보냈는데 선교사님들이 큰 힘을 얻었다고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금년에 한 선교사님은 본국에서 목자들이 기도로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만 해도 힘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사랑도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궁극적인 위로를 주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그리스도를 확실하고 풍성히 이해함으로 얻은 위로입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깊고 풍성히 이해하게 되면 큰 힘이 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 사람을 최고로 잘 돕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면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까?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비밀이라 했습니다. 비밀이란 단어는 골로새서에 6번 나옵니다. 우선 1:26,27절에 나왔습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4:1절에서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자부심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것은 성경의 비밀,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비밀이 바로 예수님이란 것입니다. 한 때 바이블 코드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이클 드로스닌이란 사람이 쓴 책 제목인데 히브리 성서의 행과 열을 잘 맞추어 특정한 방향으로 읽으면 미래의 예언을 알 수 있다는 것인데 점쟁이 같은 수준 낮은 주장이었습니다. 진정한 바이블 코드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성경을 푸는 열쇠는 예수님입니다. 구약성경 곳곳에 예수님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란 바이블코드로 성경을 풀면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시다 라고 한 문장으로 정리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의 신비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말구유에 낮아져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한 신비는 이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 받고 의롭다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 속에 무궁무진한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분입니다(3). 감추어져 있기에 그 가치를 잘 모릅니다. 1867년 미국의 국무장관 슈어러가 알라스카를 한화로 78억에 러시아로부터 샀는데 이때 사람들은 그런 쓸모없는 땅을 왜 샀냐고 하며 알라스카를 슈어러의 냉장고라고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알라스카엔 검은 보화라고 하는 석유와 광물이 무진장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감추어진 보화이신 예수님을 모르면 사람들은 교회에서 인간관계나 행사에 관심 갖고 사람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교회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우연챦는 기회라도 예수님이 얼마나 대단하신지 알게 되면 관심과 소원이 달라집니다. 마태복음 공부할 때 우리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농부가 어떻게 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제대로 알게 되면 그의 관심이 오직 예수님께 갑니다. 예수님을 알고 배우는데 모든 관심이 집중됩니다. 이런 대표적인 분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얻고자 모든 고상해 보이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님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매사에 예수님과 연합하고자 했고, 특히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고자 했습니다.

 

새해가 되었습니다. 새해에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살려면 우리에게 어떤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2021년 소원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원이 예수님 알기 원하네’ ‘예수님 닮기 원하네’ ‘예수님 얻기 원하네가 되게 하시고 그것이 올해를 사는 우리의 생의 원동력이 되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 안에 어떤 보화가 있다고 했습니까?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입니다. 지혜란 분별력을 말하고 지식이란 정확한 사물에 대한 정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분별력 있고 정확한 사람들이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최선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교묘한 말은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말을 듣고 속아 낭패를 봅니다. 큰 물질을 잃기도 하고 심지어 노예로 어딘가로 팔려가기도 합니다. 이단과 같은 이들에게 영적 사기를 당하는 경우는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우리가 교묘한 말을 분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정확히 풍성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이 다 담겨 있기 때문에 정확한 팩트를 분별하고 합당한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단도 다 분별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배워 분별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사랑하여 늘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특별히 그들이 질서 있게 행함을 기뻐했습니다. 질서 있게 행한다는 것은 군대가 대오를 형성하여 버티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굳건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보면 사탄이 계속하여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고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복음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거짓 성경선생, 철학자, 신비주의자들을 통해 골로새 교인들의 영적 대오를 어찌든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미 믿는 자라할지라도 공격하여 확정된 구원은 뺏지 못하더라도 인생을 낭비하고 하나님께 무익하게 하여 나중에 깊이 후회하게 만듭니다.

 

요절 말씀인 6,7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약속된 구원자이고 주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삶의 주가 되심을 의미합니다. 6절의 그 안에서 행하라는 말씀을 영어로 보면, “continue to live in him.” 입니다. 한마디로 계속 그리스도 주님 안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계속해서 예수님 안에 살도록 도운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뿌리내린 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만난 골로새 교인들은 나무로 하면 최고, 최상의 좋은 곳에 뿌리를 내린 경우입니다.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주님께 더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큰 뿌리가 내린 다음에 추가적으로 잔뿌리들을 내릴 때 뿌리가 강화됩니다. 뿌리를 내린 다음에 또 무엇을 해야 합니까? 뿌리작용인 삼투압을 해야 나무가 성장합니다. 생명력을 가지고 잎사귀가 푸르게 되고 때를 따라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바울은 나무가 제대로 뿌리 작용을 해서 생명력이 풍성하고 쭉쭉 자라는 것을 감사함이 넘치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예수님께 뿌리박고 예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과 연합하는 삶의 기쁨이 충만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뿌리가 되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인생을 나무에 비유하면 나무는 어딘가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얻고 만족을 얻고 성장과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뿌리를 내릴 곳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하지 못합니다. 부동초와 같이 떠도는 인생을 삽니다. 이런 그들은 생존과 약간의 여유 있는 생활을 사는 것이 삶의 가치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인생의 뿌리가 될 만한 것은 애초에 없고, 있어도 알 수 없으며, 인생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기보다는 당장에 발등의 불을 끄는 데 급급한 인생을 삽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실존주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 여긴 왜? 라는 질문을 하면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왜 사는 지도 모르고 인생의 잔재미와 물질을 추구하며 살다가 죽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의 뿌리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볼 때 우리 인생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 주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시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이 주님과 교제하며 이 주님을 배우는 것이 바로 우리인생의 뿌리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우리가 신뢰하고 뿌리내려야 분이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말구유에 태어나신 예수님의 성육신과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우리가 젊은 날 우리 삶의 뿌리로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최고의 은혜와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삶의 뿌리로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둘째로, 우리는 계속 예수님 안에서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밖에서 행하는 삶은 예수님을 만나고도 겉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4a를 보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15:4a) 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깊이 연합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양분과 수분을 공급받는 뿌리작용 곧 영적 삼투압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뿌리로 만났지만 언제부터인지 예수님을 놓쳐 버렸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을 배우는 것이 우리의 인생목적이고 가장 힘써야 할 일인데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배우는 것이 나의 인생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배우는 것이 나의 기쁨이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 없이 그저 하루하루 살고 있습니다. 인생의 잔재미가 삶의 목적 아닌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질을 더 많이 버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우리에겐 뿌리에서 깊이 올라오는 참 기쁨의 생수, 인생의 자양분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많은 것들을 얻었지만 이런 기쁨과 자양분 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사도바울은 권면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 “그 안에 뿌리를 받고 세움을 입어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우리에게 예수님과 교제하고 연합하고 예수님 배우는 기쁨이 넘칩니까? 감사함이 넘친다고 할 때 이 말이 제방 둑을 넘는 것을 말하는 데, 이렇게 주체할 수 없는 넘치는 기쁨을 누려본 적이 언제입니까? 우리가 이시간 뿌리를 예수님께 내렸음에도 뿌리 작용이 없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분명한 삶의 목적과 방향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본문에서 영지주의자들은 신비한 지식이나 황홀감을 말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인간의 의지와 율법준수를 통해 자기 의를 세우는 만족을 이야기했습니다. 천사들을 보았다고 하면서 천사들을 만나면 신비감을 맛볼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비, 진정한 만족, 진정한 황홀감은 우리가 예수님을 배울 때 얻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를 배울 때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예수님을 깊이 배우고 연합하는 샘솟는 기쁨이 없었음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그저 제가 목자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명예롭게 되는 것, 안정적으로 자녀들을 키우는 것 정도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제가 뿌리를 잃어버리고 뿌리작용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자기부인과 죽음을 배우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제가 회개하고 새롭게 빌립보서 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이 말씀을 붙들고 새롭게 예수님 배우는 삶을 확실히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제 내면에 생명과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당시 골로새 교인들의 신앙을 흔드는 것에 영지주의 철학과 유대율법주의가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어떤 신비한 영적 지식을 얻을 수 있고 그때 놀라운 신비감과 황홀함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진정한 신비와 황홀은 예수님께 있음을 가르쳤습니다(9,10) 모든 신비한 것이 예수님 안에 있으므로 예수님을 알고 배우면 그는 진정한 신비와 황홀감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11-23절은 유대율법주의와 천사숭배가 왜 잘못되었는지 말한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대항하고 불리한 증거를 하는 기소문이나 판결문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지우시고 제해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율법도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기록된 것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어떤 요구도 할 수 없고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음식규례, 절기나 안식일등도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16). 율법에 기록된 그와 같은 것들은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셨기에 그림자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17). 율법은 초등학문처럼 한 때 쓰이고 없어지는 임시적인 것이고 이제 완전하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용도 폐기되었습니다(20-23)

 

당시 사람들 가운데는 감히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한 단계 낮은 천사들을 숭배하고 천사들이 하나님을 숭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꾸며낸 겸손과 자의적 숭배로 복음진리를 배척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의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나 천사숭배자들은 정말 머리를 붙들지 않고 곁가지를 붙드는 이들이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우리가 젊은 날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입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계속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2021, 우리가 주님께 깊이 뿌리내리므로 기쁨과 생명과 영적 성장을 경험하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