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성탄 제 2 강 임마누엘 말씀 / 마태복음 1:1-25 요절 /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연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 표면에 첫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은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 있어서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 있어서는 위대한 도약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달에 첫 발을 디딘 것보다 더 큰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이를 임마누엘이라 표현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임마누엘의 의미를 깨닫고 은혜가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로부터 시작됩니다.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 중에는 신약성경을 처음부터 큰 맘 먹고 읽어 보려다가 족보가 나오자 그냥 성경을 덮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족보의 깊은 의미와 은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족보가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해줍니까? 본문에 기록된 내용이 단순히 인간의 상상이나 허구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진실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맨 먼저 마태는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자손’ 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복음서는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고 믿고 있고 여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창22:18a)”. 아브라함의 후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만이 아니라 천하 만민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온 세상에 복을 가져다 줄 참된 복의 근원이십니다. 다음으로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어떤 약속을 했습니까? 그의 후손가운데 한 왕을 보내 주실 것인데 그 나라를 견고케 하고 영원히 그 백성을 다스릴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삼하7:13).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 이란 말을 ‘메시야’ 이 말과 동의어로 사용하였습니다. 2-6절까지의 예수님의 족보를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 명의 여인들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이스라엘 족보에는 여인들이 기록될 수 없었습니다. 여자들은 아버지나 남편의 소유와 같이 여겨졌으며 사람들의 수를 셀 때도 제외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계보에 여인들을 등장시킨 이유가 무엇일까요? 더군다나 사라나 리브가와 같이 정상적이고 현숙한 여성을 생략한 채 그렇지 못한 여인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3절의 다말은 가나안 출신 여인으로 시아버지인 유다를 속이고 그를 통해 아들을 낳았으며, 라합은 여리고 출신으로 직업은 가장 천대받던 기생이었습니다. 룻 역시 모압 여인으로 과부였으며, 6절의 밧세바는 비록 이방 출신 여인은 아니지만 헷 족속이었던 우리야와 결혼하였고 다윗과 더불어 간음죄를 저지렀던 여인입니다.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이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마태가 왜 이러는 걸까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종이나 성별이나 신분과 같은 모든 인위적인 장벽을 뛰어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 주님은 세상의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십자가로 모든 담을 허무시고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특별히 6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야의 아내’가 뭡니까? 그냥 ‘밧세바’라고 하든지, ‘다윗의 아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이 이것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까? 다윗의 간음 사건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남의 아내와 간음하고 충신 우리야를 모살하여 죽이고, 남의 아내를 빼앗은 다윗의 흑역사를 생각나게 만듭니다. 그는 간음죄, 살인교사죄, 권력남용죄, 탐심의 죄, 거짓말죄, 가정파괴죄 등 심각한 죄를 지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온 백성들이 다 일어나 촛불집회를 하며 하야를 외침으로 다윗은 왕좌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다윗이 죄로 인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을 맛보았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 32:3,4절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다윗이 눈물로 침상이 젖도록 죄를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죄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를 여전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나아가 다윗과 밧세바에게 솔로몬이라는 지혜로운 아들을 낳게 하심으로 위로하시고 그의 자손을 통해 메시야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그 보다 훨씬 더 큽니다. 롬5:20은 말합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우리가 나의 죄를 하나님 앞으로 들고 나아가 통회하고 자복하면 하나님은 넘치는 사랑과 위로로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며 나의 상처들을 싸매어 주십니다.
7절부터 11절까지의 족보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윗 왕국이 르호보암 때 남,북으로 둘로 나누어집니다. 여고야는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시드기야왕 때 결국 유다 왕국은 멸망합니다. 솔로몬이 처음에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방여인들 때문에 하나님과 말씀을 등지고 우상숭배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손들도 대동소이합니다. 여기에 아하스와 므낫세가 나오는데, 이 둘은 유다의 왕중 가장 악한 왕 1위(므낫세), 2위(아하스)로 평가받는 자들입니다. 아하스는 바알 우상을 만들고 아들을 우상의 재물로 태워 바치고 하나님의 성전의 기구들을 부수고 성전의 문을 닫았던 자입니다. 므낫세는 성전 안에 바알제단과 아세라 상을 두고 일월성신을 섬기며 자기 자녀를 불가운데 지나가게 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내가 므낫세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계 열방중에 흩으리라(렙15:4)” 이런 자들이 주님의 계보에 포함되었다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다윗 후손이 이렇게 가증한 범죄를 행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을 일시적으로 인생 채찍을 들어 징계하시지만 다윗과 맺은 ‘네 집과 네 나라가 영원히 보존되리라’ 하신 약속을 생각하심으로 다윗 왕가를 폐하지 않으셨습니다. 영원한 왕 예수님에게까지 그 족보가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12절부터는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때 까지의 족보입니다. 이제 나라는 망하고~ 왕위는 끊어지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고~ 젊은이들이 ‘헬조선’이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이보다 더한 ‘헬이스라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가운데도 하나님의 언약과 자비는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가운데도 하나님은 거기서 함께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스룹바벨을 통해 70년만에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토록 하셨습니다. 아무리 어둡고 모든 소망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우리 하나님은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시며 새로운 소망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다함께 16절을 읽겠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침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인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약속된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14대, 다윗에서 바벨론 포로까지 14대,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입니다. 14는 완전수 7의 두 배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예수님의 족보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가 참으로 대조가 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반복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죄가운데 거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죄인들을 품고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셨습니다. 때가 되자 약속대로 그리스도를 우리가운데 보내셨습니다. 18절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관한 내력입니다. 김게바 목자님이 성경공부할 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게바목자님이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 불교신자인 외삼촌이 게바목자님을 불러 “너, 예수가 누군지 알고 믿냐?” 물어보더랍니다. 그러자 게바목자님이 “메시야가 아닌가요?” 반문하자 외삼촌이 “사생아야~”라고 말했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내막을 모르면 사람은 오해하고 잘못 판단하게 됩니다. 가짜 뉴스가 떠돌게 됩니다. 본문은 확실한 팩트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18절을 읽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먼저 약혼을 하고 1년 후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약혼은 동거만 하지 않을 뿐이지 결혼과 동일한 효력을 가졌습니다. 1년 동안 예비 신랑 신부는 순결을 지키며 결혼 준비를 했습니다. 요셉은 아마 ‘결혼하면 큰 맘먹고 신혼여행은 발리로 가야지’ 하며 부푼 꿈에 젖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요셉에게 마리아의 잉태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의 놀람과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어요’ 이렇게 이야기 했다 한들 그가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은 이제 두 가지 방법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율법대로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공표하여 돌에 맞아 죽게 하든지, 아니면 이혼 증서를 써 주고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천사가 꿈에 나타났습니다. 20,21절 ‘다윗의 자손 요셉아’부터 강야곱 목자님이 천사의 목소리로 읽어주시겠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이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까? 성령이 역사하면 동정녀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인간의 혈통을 따라 태어난 것이 아니기에 죄가 업습니다. 우리 죄를 감당할 수 있는 대속제물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천사는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예수로 짓도록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름의 뜻처럼 예수님을 통해 그 백성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은 죄로부터 구원받아야 행복합니다. 인간이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우리 인간도 행복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이 갑자기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2,23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은 주님이 나시기 약 700여 년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한 것입니다(사7:14). 이사야가 이 말씀을 선포한 당시의 이스라엘 상황은 어떠하였습니까? 아하스왕이 남유다를 다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북이스라엘 왕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이 동맹을 맺고 유다를 공격하려 하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하스왕과 유다 백성들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거센 바람에 요동치는 수풀처럼 흔들렸습니다(사7:2). 그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아하스에게 보내어 아람 왕과 북이스라엘 왕이 진노한다고 해도 불에 다 타서 꺼져가는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침략해 오는 두 나라는 멸망할 것이며 나라를 다시는 이루지 못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어떤 징조든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는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징조를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 하심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현실에 떨며 강대국을 의지하는 그들에게 임마누엘 표적을 통해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고후5:7은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이를 ‘임마누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버림받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사람이 버림 받을 때 불안과 공포와 절망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예수님조차도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절규했겠습니까? 올 한해를 돌아보면 우리나라가 주변 강대국에 의해 버림받은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불안한 형국입니다. 올해 일본은 강제 징용판결을 문제 삼아 우리나라를 화이트 리스트 등급 A에서 B로 강등시켜 수출 규제를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사드배치를 문제 삼아 한한령을 내린지 3년이 지났는데도 풀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로 군사적 위협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동맹으로 여겼던 미국조차 주한 미국 주둔비용을 현재보다 5배도 넘는 6조원을 달라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도 의지할 수 없게 된 우리나라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더욱 고조되어 있습니다. 또한 사회는 어떻습니까? 급속하게 핵 가족화, 개인주의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올해 일인가구가 전체 가구 형태중 29.8%로 1위를 차지하였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3명중 한명이 나홀로 삽니다. 혼밥, 혼술, 혼영(혼자 영화보기), 혼행(혼자 여행하기)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한편으론 남 눈치 안 봐도 되니 좋을 수 있으나 외롭고 고독한 시대인 것은 분명합니다. 어려울 때 함께 해 줄 사람이 그립습니다. 가요 중에 이런 가사가 생각이 납니다. “빈 밤을 오가는 마음 어디로 가야만 하나~ 어둠에 갈 곳 모르고 외로워 헤메는 미로~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 줄 사람 없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우리는 누군가 나와 함께 한다면 힘이 될 것입니다. 내가 비를 맞고 있을 때 누군가 나에게 우산을 씌워준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내가 비를 맞고 있을 때 누군가 나와 같이 함께 비를 맞아준다면 더 행복하겠죠. 나와 함께 하는 그 사람이 학생들에게 있어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 교수님이라면, 직장인들에게는 내가 다니는 회사 사장님이라면 더 힘이 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창조주이시지만 피조물인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와 같이 열심히 노동을 감당하시고 주리기도 하시고 피곤하여 깊은 잠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사단마귀의 시험도 받으셨습니다. 종국에는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통속에서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의 구세주요 진정한 친구이십니다. 우리의 최고의 공감 능력자이시며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생생히 경험한 사람이 다름 아닌 마태복음을 쓴 마태입니다. 사람들은 세리인 그를 손가락질 했습니다. 매국노라고 비난했습니다. 아무도 그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깊은 한 숨과 눈물을 알아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의 죄를 사해주시고 주옥같은 천국 복음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셨고 열두 사도중 한 사람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망가진 그의 삶을 새롭게 재 창조하여 주셨습니다. 마태에게 임한 임마누엘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긍휼과 사랑의 주님이셨습니다(마12:20). 마태복음은 임마누엘로 시작하여 임마누엘로 끝납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절인 28장 20절에서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함께 하십니다. 혹시 이 가운데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서 홀로 계신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시면 주님은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사 모든 인생의 역경가운데서 피할 길을 주시고 감당할 힘을 주시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황믿음 목자님은 올해 자신과 함께 하신 임마누엘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회사에서 바로 위에 부장님이 계신데, 회사에 출근도 안하고 매일 술마시고 놀기만 한다고 합니다. 모든 일을 믿음목자에게 떠 맡기고서는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칠 년동안 이 분 밑에서 힘들게 일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였다고 합니다. 몇 분에게 상담을 받았는데, ‘들이 받아서 쳐내야 한다’, ‘정리해야 한다’, ‘본인이 나서서 하기보다는 기도하고 기다리라’ 다양한 조언을 받았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믿음목자 마음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그 백성을 지키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조언을 따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인내하며 기다리기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 주일 만에 부장님이 회사에서 정리되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부장님이 영원히 나와 함께 하며 고통속에서 살아야 할 것으로 생각을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해 주심을 인해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서마가 목자님은 이제껏 반듯한 직장에 취업해 본 적이 없이 지금까지 여러 직장을 전전하였습니다. 현재는 조폭 스타일의 회장님 수행 운전기사로 회장님의 까다로운 비위를 맞추며 때론 욕설을 들어가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동역자인 애란 사모님이 암 투병중에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마가 목자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으로 씨름할 때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 마음 평안해~”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됨을 감사 찬양하였습니다. 이번 성탄에 우리도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겨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현재와 미래에도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고 의지하기를 기도합니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 마리아를 데려 왔습니다. 그는 이제 마리아를 보호하는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축복된 결혼식도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온갖 억측과 오해, 가짜 뉴스가운데서 죄인의 모습이 되어 말없이 하나님의 아들을 낳고 키우는 일을 감당하였을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과 함께 하신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의 고통과 고독을 돌아보시고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번 성탄에 우리 구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죄사함과 영생과 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얻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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