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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0년 요한계시록 13강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요한계시록 21-22)2020-02-17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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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3강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말씀 요한계시록 21,22장


요절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오늘은 드디어 계시록 마지막 강의입니다. 메시지에 충격적인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만유회복과 재림의 확실성을 깨닫고 준비된 성도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1:1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새 하늘과 새 땅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원히 살 곳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완전한 새 창조냐, 갱신이냐의 의견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완전한 새 창조를 선호하십니까? 옛날 세상에 대한 안 좋은 것을 하나라도 떨쳐버리고 싶은 분들은 완전한 새 창조를 선호할 것입니다. 갱신 설을 주장하는 분들은 옛 세계와 새 세계의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면 하늘이나 땅과 같은 기본적인 틀은 연속되고 그 퀼리티는 전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이든지, 갱신이든지 새로운 세계에는 구세계의 불완전함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사도 요한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습니다. 보통 신부들은 결혼식장에 최고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신랑이나 하객들이 몰라보고 “누구십니까” 묻기도 합니다. 이처럼 새 예루살렘 성은 정말 surprising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어떤 분들은 성도들이 영원히 살 거처로 보고, 어떤 분들은 그냥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다라고 봅니다. 요한복음 14:2b, 3a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16절에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이들에게 하늘에 있는 한 성을 예비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22절에는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란 말씀도 있습니다. 이상의 말씀들을 보면 주님이 예비한 거처, 준비된 한 성이 있고 그 성은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성도들의 영원한 거처로 봐도 무방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인간의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므로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을 때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 거처하더라도 불행합니다. 허무하고 두렵고 외롭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완전히 회복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눈에서 그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사람이 왜 눈물 흘립니까? 사망과 질병과 연약함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기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또한 아파서 울고 연약함 때문에 죄를 짓거나 실수를 해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울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지 않는 몸, 아프지 않는 몸, 연약하지 않는 몸을 덧입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그간 흘렸던 눈물을 닦아주심을 끝으로 더 이상 눈물 흘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울고 싶어라 같은 노래도 사라질 것입니다.

 

5절a를 보십시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나님은 세상이 완전히 새롭게 된 것을 선언하십니다. 모든 불완전한 것들은 사라지고 완전하고 영원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새 세상을 한번 그려보십시오. 이 새로운 세계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장례식장이 없습니다. 보람상조가 없습니다. 병원이 없어집니다. 신음하고 울부짖던 응급실, 수술실도 사라집니다. 당연히 의대도, 의사도 사라질 것입니다. 존경하는 이병두 목자님과 관악7부에서 통증클리닉을 운영하시는 이모세 목자님도 실업자가 되실 것입니다. 종로2부의 이아브라함 목자님은 부부가 실직할 것입니다. 관악3부는 가장 많은 실직자를 배출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 목자님들이 직장을 잃지만 이 얼마나 좋습니까?


왜 만유회복과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는 확실합니까? 6절a를 보십시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이루었다는 것은 만유의 회복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이십니다. 이것은 재림의 확실성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창세기의 하나님이면 계시록의 하나님입니다. 즉 창조의 하나님은 반드시 재림과 만유회복을 이루십니다.


7절a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누구에게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과 생명수를 주십니까? 이기는 자들입니다. 우상숭배에 대한 도전을 이김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한 사람들입니다.


대조적으로 이 모든 것을 상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 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과거 김정일은 항공기사고를 두려워하여 비행기를 타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두려워합니까? 두려움의 근원은 죽음입니다. 그리고 죽음이후에 심판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죄사함을 받았고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합니다. 우리가 창조주를 믿지 않고 빅뱅이나 아메바로부터 존재하게 되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고 악한 멘탈입니다. 또한 창조주를 믿는다면 그분이 보내신 구주를 믿지 않는 것도 교만하고 악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겸손하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할 수 있고 그 죄문제를 위해 오신 구주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와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않는 것은 어리석고 악하고 교만한 행동입니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음행하는 자들, 점술가들, 우상숭배자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믿음 없이 본성대로 산 사람들입니다.


이제 사도요한은 바벨론성의 멸망을 17,18장에서 자세히 묘사를 했던 것처럼 거룩한 성 예루살렘도 그러합니다(21:9-27절, 22:1-5절)


첫째,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어린 양의 신부입니다(9). 9절을 보십시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어린 양 예수님의 아내가 누구입니까? 건물이 어린 양의 아내는 아닐 것입니다. 어린 양의 아내는 교회 곧 성도들입니다. 그러니까 새 예루살렘 성은 거처로서의 측면보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신부로서 성도들이란 인적 요소가 중요합니다. 유럽에서 교회들이 텅 비어 술집이나 사원으로 팔립니다. 그러면 그 교회건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새 예루살렘성은 영광스럽고 빛나고 큽니다(11, 16, 18b). 11절을 보십시오. 그 성에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 성의 소재는 정금인데 유리처럼 맑고 자세히 말하면 벽옥과 수정같이 맑습니다. 또한 그 성은 아주 큽니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2,000 스다디온입니다. 12,000 스다디온은 2304km이니 새 예루살렘성은 총 2304km3 의 거대한 정사각형입면체입니다. 정육면체의 거대한 도시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한반도 2배의 가로세로와 높입니다. 이것을 100m3으로 구분해 보면 무려 12조개의 공간이 나옵니다. 100m3은 30층짜리 정사각형 빌딩크기입니다. 그러니 새 예루살렘 성을 거처로 볼 때도 “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는 말씀과 틀리지 않습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매우 크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벨론 성과의 비교입니다. 바벨론성은 줄곧 계시록에서 ‘큰’이란 수식어를 달고 있었습니다. 그 크다는 것이 위압감을 주고 뭔가 위대함이 있지 않는 가하는 생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실제 바벨론성은 가로세로가 120 스다디온이었으니 즉 23.04km2 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서울정도의 크기였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그것은 100배입니다. 족히 비교할 수 없는 크기입니다. 계시록 말씀은 성도들에게 커 보이지만 장차 먼지로 변할 바벨론성의 시민으로 살 것인지 초라해 보이지만 사실은 거대한 새예루살렘 성의 시민으로 살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셋째로, 새 예루살렘 성은 ‘성곽’이 강조되어 있습니다(12-14, 17-21).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은 크고 높고 기초가 분명합니다. 문은 열두 개이고 진주 문입니다. 성곽(성벽)은 144 규빗으로 12*12 곧 완전한 성벽이란 뜻이며 실제크기는 약 70미터입니다. 성벽은 성의 견고함과 안전함을 대변합니다. 바벨론 성벽은 높이나 두께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성의 성벽은 그것과 비교가 안됩니다. 이는 새 예루살렘성이야말로 영원한 안전과 안식을 제공하는 곳임을 뜻합니다. 또한 바벨론성은 성문이 100개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성은 1/10으로 12개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나 들어올 수 없습니다. 성문은 천사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 문에 열두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것은 이곳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새 이스라엘 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임을 뜻합니다. 진주문인 것은 최고의 진주로 비유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이들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성곽의 기초에 열두 사도의 이름들이 적혀 있는데 이는 천국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위에 서 있고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음을 뜻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곧 복음인데 복음은 가장 귀하고 아름답고 빛나는 보배와 같습니다.

  

넷째로, 새 예루살렘성에는 성전이 없습니다(22-27). 22절을 보십시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전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이 성전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만남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고 그 임재를 충만히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 성전이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성전이 필요가 없습니다. 새예루살렘성은 지성소와 형태가 같습니다. 정사각입면체였습니다. 이것은 새예루살렘성 자체가 지성소라는 것이고 어디나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충만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째로, 새 예루살렘 성에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릅니다(22:1-5). 천사는 요한에게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에서 흘러 나왔고 강이 길 가운데로 흘렀습니다. 청계천 좌우에도 길이 있습니다. 한강 좌우에도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가 있습니다. 그처럼 생명수의 강도 정금 길을 좌우에 두고 가운데에 흐릅니다. 그 강의 생명력이 얼마나 풍부한지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달마다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 잎사귀는 만국을 healing 합니다. 이상의 모습은 에덴동산의 모습이고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강의 환상과 같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드는 염려가 무엇입니까? 다시 타락하고 다시 저주를 받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입니다. 그래서 그런 고민을 읽고 성경은 ‘다시 저주가 없다’ 라고 못 박았습니다. 새 예루살렘 새 에덴의 최고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그들 가운데 있고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예수님이 청와대에 계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가끔 종로센터에 오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새벽기도 때마다 오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좋으신 가요? 살짝 부담되지요? 그 이유는 우리에게 죄와 허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우리에게 더 이상 죄와 허물이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악수도 하고 그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점은, 새 하늘, 새 땅에서 할 일입니다. 22:5절을 읽겠습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산다고 하니, 너무 지겹지 않을까 염려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금요기도회 때 문 엘리야 목자님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영원토록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왕 노릇”입니다. 종노릇은 힘들지만 왕노릇은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1:28절을 보면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존재 곧 ‘왕’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속사에서는 왕이요 제사장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죄가 없기 때문에, 왕 역할만 하면 됩니다. 새로운 세계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일을 할 때 우리는 영원한 보람과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천사는 지금까지 한 말들이 신실하고 참되다고 하였습니다. 과거에 선지자들을 통해 이루어질 일을 미리 알리시고 그것을 성취하신 하나님이 앞으로 되어질 일을 천사를 통해 미리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이 성취된 것처럼 계시록도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러니 이 예언의 말씀을 믿고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속히 이루어집니까? 이 예언의 말씀을 인봉할 여유가 없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지 간섭할 여유가 없을 정도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계시록을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그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을 확실하고 긴박감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그것을 믿고 속히 오시라고 청원했습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결론이며 성경의 결론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결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대학진학과 노는 것, 연애나 취업과 노후에 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자나 깨나 관심(촉)은 주님의 재림과 만유회복에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삶의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준비하고 대비합니다.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아무리 대비해도 죽음과 질병과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행복할 수 없으며, 시간은 금세 흘러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지나간 날을 회상하면 순식간입니다. 그러니 현명한 사람은 영원한 것을 잘 대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주님의 재림이 공수표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초기 사도들이 주님의 재림이 금방 이루어질 것처럼 말했는데 2000년이 지나도 주님이 오시지 않자 주님의 재림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 3:7,8절은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을 재림이 더딘 이유로 제시했습니다. 주님께는 시간개념이 없습니다. 또한 영생을 얻는 성도들에게도 물리적 시간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의 재림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언제 주님이 오실지 모른다는 사실은 항상 최고수준의 긴박감을 줍니다.


최근에 아카데미상을 4개나 휩쓴 한 한국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한 부잣집에 가난한 한 가족이 과외선생 1,2와 운전기사, 가정부로 위장 취업한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긴박하고 스릴있고 충격적인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주인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캠핑을 갔을 때, 그 기생충 가족이 부잣집에 모여 거품목욕을 하고 양주를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다 쓰러져 뒹굴고 있는 데 갑자기 폭우가 내립니다. 이 때, 첫 충격적인 장면은 쫓겨난 가정부가 무서운 얼굴로 초인종을 누르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주인가정이 폭우 때문에 캠프를 취소하고 집으로 오겠다는 연락이 오는 scene 입니다. 여주인은 전화로 네비를 보니 8분후면 도착할 테니 짜빠구리를 끓여놓으라고 말합니다. 이 때 그 기생충 가족은 허둥대며 모든 것을 원상복귀하려고 하지만 시간은 부족합니다. 이때 당사자들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심장이 쫄깃하고 터질 것같이 됩니다. 정말 잘 구성된 영화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은 이보다 더한 긴장감을 줍니다.


사도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을 잘 준비한 사람의 말입니다. 주님은 진실로 속히 오십니다. 다른 후회는 괜찮지만 재림후의 후회는 치명적입니다. 다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시험 준비를 다 한 사람은 “시험이여, 오라”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준비가 안된 사람은 어떻습니까? 시험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일어나 보니 꿈속에서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습니다. 시험은 1-2시간밖에 남지 않았고 분량은 100페이지도 넘어서 이해도 안 되고 외워지지도 않습니다. 주님의 재림 준비는 이런 식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까? 신부처럼 우리의 내면을 단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내면성이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요새는 해외에 있는 친구나 선교사님들과도 얼마든지 카톡하고 무료통화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시기 전에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풍성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주님과 교제한다면 다시 오실 주님은 내가 늘 만났던 친숙한 주님일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것은 첫째,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고 둘째, 불과 유황에 들어갈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주님이 남기셨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주님 맞을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다 공부했는 데, 창조만큼 재림이 확실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당당히 맞이할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