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마태복음 3강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 마태복음 3:1-17 요절/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봄학기 마태복음 말씀을 함께 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 가운데서도 마태복음 말씀을 통해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봄학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 때에”란 “하나님이 오랜 기간 준비하셨다가 이제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가 되었을 때”에라는 의미입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메시지를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3절을 보십시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의 중요한 특징은 예수님이 구약 시대 선지자들이 오래 전에 예언했던 그 예언을 성취하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무려 700여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40:3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이사야 선지자는 나라를 잃은 슬픔과 아픔 가운데서 장차 그 백성을 위로할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가 오시기 이전 광야에서 먼저 목놓아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을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등장하던 그 시절 유대인들은 750여년 전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약 600여년 전 남유다가 멸망한 이후 나라를 잃고 이후 잠시 독립 왕조를 세우기도 하였으나 힘이 약해 많은 이민족으로부터 침략과 고통을 당하다가 이제는 로마 제국에 복속되어 억압받는 큰 아픔과 시련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일단의 유대인들은 700여년 전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주셨던 예언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곧 때가 되면 메시야가 오실 것이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그 길을 예비하리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이들은 이 말씀을 붙들고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광야에서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때마다 깨끗한 물로 몸을 씻는 정결의식을 행하며 메시야가 나타날 것을 기다렸습니다. 이들은 소위 에세네파(거룩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불렸으며, 그들이 이룬 공동체는 쿰란 공동체라 불렸습니다.
당시 이런 쿰란 공동체가 생겼던 것은 이제 하나님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약속하셨던 그 메시야를 보내실 때가 무르익은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정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전한 첫 일성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마태는 “이 요한은” 이라고 강조하면서 그의 옷차림과 음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옷차림이 어떠했습니까? 그는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당시 유대인이라면 100이면 100 전부 구약 시대의 한 선지자를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그 선지자는 바로 엘리야입니다. 열왕기하 1:8을 보면 엘리야는 털이 많은 사람이요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다녔습니다.
그러면 저자 마태가 굳이 요한의 옷차림에 대해 “이 요한이”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다고 강조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시로부터 약 400여년 전 활동했던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중요한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장차 메시야가 나타나기 전 먼저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내시겠다고 예언한 내요입니다. 그 내용이 말라기 4:5-6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엘리야는 광야에서 외롭게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당시 북이스라엘 왕이었던 아합이 정략 결혼을 하여 바알 신을 섬기던 나라의 왕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악명높은 이세벨이었습니다. 이세벨이 여왕이 되자 여호와를 섬기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모두 투옥하거나 죽였습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백성들은 전부 마음을 돌이켜 바알신과 그의 부인인 아스다롯 신을 섬겼습니다. 이러한 시대 가운데 엘리야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이세벨에게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곧 제단을 두 개 마련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려주는 신이 참 신이라는 도전장이었습니다. 아합을 통해 이 말을 전해들은 이세벨은 도전장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엘리야가 말한대로 850명의 바알과 아스다롯 제사장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바알 신에게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에 엘리야가 조롱하였습니다. 바알 신이 주무시고 계신지, 해외 출장을 가셨는지 하면서 조롱하였습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바알 선지자들은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기까지 자해를 하며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후 엘리야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 번제물을 태웠습니다. 이 모습을 본 모든 백성들은 여호와가 참된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엘리야는 이 사건을 통해 백성들이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백성들이 왕궁으로 쳐들어가 악녀 이세벨을 처단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치 멋진 공연을 보고 열광하다가 공연히 끝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돌아가는 관중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 이전의 삶을 그대로 반복하였습니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이세벨은 당장 엘리야를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본 엘리야는 크게 절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차라리 죽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이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절망하지 말고 믿음의 계승자 한 사람을 키우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믿음의 계승자 엘리사 한 사람을 키운 후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본 복음서의 저자 마태는 세례 요한이 하나님이 메시야가 오기 전 보내리라 약속하셨던 그 엘리야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전했던 메시지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전했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메시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먼저 요한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였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가까이 왔으므로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어떤 나라로 여행하려면 먼저 그 나라에서 발급하는 비자를 받아야 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가까이 왔고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란 구약의 “슈브”를 번역한 헬라어로 그 뜻은 “마음을 돌이키라”는 의미입니다. 구약 시대 배경으로 “회개하라”는 의미는 당시 정치 실세인 악녀 이세벨의 눈치를 보며 바알과 아스다롯 신을 섬기던 것을 돌이켜 참 신이시요,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마음을 돌이키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헬라어로 회개하라는 “메타노에이테”로 이는 생각을 돌이키라, 생각을 바꾸라는 의미입니다. 선지자 엘리야 시대 때 사람들은 악녀 이세벨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을 떠나 마음을 돌이켜 바알과 아스다롯 신을 섬겼습니다. 이에 비해 세례 요한의 시대 때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또 백성들은 그러한 지도자들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이로 인해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시거나, 존재하시더라도 아무런 힘도 영향력도 없는 분인 것처럼 살아갔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하나님은 마치 계시지 않는 것처럼, 설령 계시더라도 흰수염 나신 할아버지처럼 세상 일에 별로 관여하지 않으시고 가만히 보고만 계시는 분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내가 경험하며 살아왔던 수십년간의 삶을 기준으로 보면 맞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셨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곧 역사 속의 하나님을 주의깊게 연구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룻기에 나오는 모압 여인 룻은 본래 몰록 신을 섬기던 여자였습니다. 모압 사람들은 기근이나 재앙이 생기면 몰록 신이 뭔가 제물을 바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뇌물 성격으로 제물을 바쳤는데 놀랍게도 그 제물은 어린 아이를 인신제사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룻은 이런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녀가 어느 날 이스라엘에서 이민 온 사람의 집안에 며느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시댁에서 특히 시어머니 나오미를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당시 최강대국인 이집트의 바로왕을 열가지 재앙으로 치시고 자기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은 몰록 신과 달리 자비와 사랑과 긍휼과 정의로 충만한 참된 하나님이었습니다. 룻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이후 개인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남편은 죽고 남편의 형제도 죽고 남편의 아버지도 죽었습니다. 집안에 남자는 다 사라지고 여자 3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시련을 겪었다고 해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역사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동서가 시어머니를 떠나는 상황 가운데서도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았고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돌이켜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모압 여인 룻처럼 내 삶에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거나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나 때로는 기도의 응답이 거절될 때나 눈에 보이는 상황과 조건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참된 신이시요, 나의 주님이신 것을 한결같이 고백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오늘날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니까 믿는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을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넘치는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때로는 어려움과 시련을 겪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 복 자체보다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 분과 교제하는 가운데 그 분을 닮아나가는 우리가 되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결코 조건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상황이 좋으면 하나님을 잘 믿고 상황이 나빠지면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지는 신앙은 참으로 회개한 신앙이 아닙니다. 참된 회개가 있는 신앙은 어떠한 상황이든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신앙입니다. 마태복음을 죽 읽어보면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참된 신앙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으로는 고난의 길,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 외롭고 슬픈 길, 지난한 고난의 길을 가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원하셨기에 순종하여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든 그 뜻을 순종하여 섬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의 자세입니다.
저는 이번 겨울학기 마태복음을 죽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의 길, 순종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통해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하여 학생 역사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 마음에 큰 시련과 도전이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마태복음의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셨던 예수님이 내 삶의 본받아야 할 참된 모본이신 것을 새롭게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눈에 보이는 상황에 울고 웃으며 구복적인 신앙관을 가졌던 것을 회개합니다. 제가 이제는 마음을 온전히 돌이켜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과 깊은 섭리를 신뢰하며 그를 순종함으로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메시지를 전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요한에게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원래 세례란 외국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행하던 의식이었습니다. 이것은 과거 우상을 섬기며 살던 그 모든 죄를 물로 깨끗이 씻음을 상징했습니다. 또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은 우상을 섬기던 삶을 살던 옛 사람이 죽고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남을 상징했습니다. 그런데 본래 유대인들이던 그들이 세례 요한에게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강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는 단지 유대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이 아님을 의미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음을 돌이켜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단지 교회에 신실하게 다닌다고 해서 무조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은 오직 회개하는 자만이 갈 수 있습니다. 또한 현재적으로도 천국은 회개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기 원하십니까? 회개하십시오.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돌이키십시오. 눈에 보이는 상황, 조건을 떠나 한결같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며 그의 뜻을 순종하여 섬기겠다고 결단하십시오. 그 때에 놀라운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을 믿습니다.
7-12절에서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왜 예수님께 나왔을까요? 다른 복음서를 참조해 보면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조사차 나왔습니다. 세례 요한이 정말 메시아인지 조사해서 보고서를 작성하여 상부에 제출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요한의 메시지를 1차원적으로 해석하여 세례만 받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오해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잘못한 상대방에게 사과하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하니까 ‘응 미안해’ 건성으로 대답한 것과 같습니다. 건성으로 사과받은 사람이 말합니다. ‘그게 정말 진심으로 하는 사과야? 마음을 담아서 진심으로 사과해’ 이렇게 말하자 다시 건성으로 ‘응 알았던 진심으로 사과해’ 말합니다. 이러한 사과는 참된 사과라 할 수 없고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지도 않습니다. 세례도 이와 같습니다. 세상을 향했던 마음, 하나님을 믿지만 조건적이고 구복적으로 믿었던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받는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한 자는 장차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13-15절을 보십시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드디어 예수님은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말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여기에서 모든 의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비록 죄가 없으시지만 마치 죄인처럼 낮아져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원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죄인처럼 되어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실 것을 예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53장에서 예언했던 것처럼 비록 존귀한 여호와의 종이지만, 사람들 사이에 낮아진 자가 되었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죄인처럼 세례 요한에게 세례받으셨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태복음의 주제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왕이신 이 예수님이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요즘 청년들은 어려서부터 왕자님, 공주님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기를 펴고 마음껏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자기 하고 싶은 뜻을 펼치도록 그렇게 배우며 자랐습니다. 이것은 거칠고 험한 세상에서 소심하게 살지 말고, 기죽고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부모님들의 배려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신앙생활할 때에 어려움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가장 첫 스텝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죽이고 겸손히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의 가장 첫 사역이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 죄인처럼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할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꼭 빼어닮은 내 아들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우리 종로 센터 형제 자매님들, 목자님들이 봄학기 마태복음 말씀 공부를 통해 회개함으로, 또 겸손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움으로 그 마음에 천국의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봄학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