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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0년 마태복음 5강 `나를 따라오라`(마태복음 4:12-25)2020-03-15 14:26
작성자
2020 마태복음 5강 


나를 따라오라


말씀/ 마태복음 4:12-25
요절/ 마태복음 4:19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코로나 바이러스 가운데도 함께 하시는 주님을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오늘 말씀 통해 “나를 따라오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예수님은 요한이 갈릴리 지역 분봉왕이던 헤롯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 나오는 것처럼 요한은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를 빼앗아 결혼한 것을 옳지 않다고 책망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헤롯은 그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저자 마태는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러가셨다는 것은 원문상 안전한 곳으로 잠시 피하셨다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사실 요한을 체포한 헤롯은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이었으므로 갈릴리로 가는 것은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위험한 곳으로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과 사역이 장차 헤롯왕보다는 유대 지역의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할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존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혁명적으로 뒤엎을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유대 지역을 떠나 갈릴리로 물러가셨습니다. 갈릴리에서도 고향인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 호수 해변가에 위치한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습니다. 

당시 가버나움은 다메섹에서 지중해 바다로 이어지는 대로가 있던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세관이 있었습니다. 이곳의 인구는 1,000-2,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2,000명 정도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한적한 시골 마을인 나사렛을 떠나 교통의 요충지인 가버나움으로 오신 것은 이곳을 중심으로 갈릴리 지역의 많은 이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편 당시 갈릴리에는 가버나움보다 훨씬 큰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헬라 양식으로 새롭된 건축된 세포리스와 티베리아스가 그러한 도시들입니다. 이러한 도시에는 헬라 언어와 문화, 학문에 능숙한 이들, 또 부자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도시들 대신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이는 영혼이 맑고 순수하며 순박한 갈릴리 청년들을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어부로 일하던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는 사람낚는 어부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14-16절을 보십시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저자 마태는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신 것을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말씀은 이사야 9:1-2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본문이 기록된 이사야 시대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사야가 선지자로 막 부름받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 왕이던 베가가 아람 왕 르신과 손을 잡고 남유다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남유다 왕과 백성의 마음은 숲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도우시리라는 징조로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 하여습니다. 한편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왕과 아람 왕에 대한 징계로서 장차 앗수르 왕이 대군을 이끌고 와 그들을 공격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해 특히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는 이곳에 외국인이 거주하도록 하여 이 지역은 이방의 갈릴리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아기가 태어남으로 이 지역, 특히 갈릴리 지역과 갈릴리 호수를 따라 난 해변길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 한 아기로 인해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칠 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셨습니다. 

마태는 마리아의 태를 통해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이 바로 이 예언을 성취하신 분임을 증거합니다. 갈릴리 지역은 앗수르의 침략과 이주민 혼혈 정책으로 인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두운 곳이 되었습니다. 이곳은 유대인들이 볼 때 더 이상 이스라엘 땅이 아닌 외국 땅처럼 되었습니다. 마카비 시대 때 얼마 남지 않은 갈릴리 지역 유대인들은 이 지역의 이방화가 너무 심하여 대부분 남유다로 이주하였습니다. 이후 하스모니안 왕조가 세워지고 갈릴리 지역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이 대거 다시 갈릴리로, 특히 가버나움 부근의 남부 갈릴리로 이주하였습니다. 

이곳은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시대 때 늘 북방의 이민족의 침입으로 고통받던 함경도 지방과 같았습니다. 또 늘 왜구로 인해 고통받던 남쪽 해안지방 및 섬들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멸시받고 고통받던 땅에 메시야가 오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33년간 계실 적에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 갈릴리에서 보내셨습니다. 특히 공생애 3년의 시간의 많은 부분을 갈릴리에서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가장 큰 어둠 가운데 있던 이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빛, 생명의 빛은 어둠과 죽음의 세력 안에 있던 이들에게 가장 먼저 임하였습니다. 제가 이전에 5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책자에서 여러 선교사님들의 life testimony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공통적인 간증은 빛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 인생에 깊은 어둠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서자로 태어나 멸시받으며 자란 아픔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술과 노름, 정욕에 빠져 가정을 버린 아버지로 인한 깊은 어둠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동생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 머나 먼 외국 땅에 간호사로 간 분도 있었고, 어떤 분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된 어머니의 눈물을 보며 자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빛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마음에 놀라운 빛이 비추어졌습니다. 그 빛은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그 빛이 비쳐졌을 때 마음의 모든 슬픔과 운명, 어둠이 물러가고 생명력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체험한 이 놀라운 은혜를 증거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 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캄캄한 어둠 가운데 빛의 힘과 능력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우리가 가장 어둠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의 빛이 우리 마음에 임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어떤 어두움이 있습니까? 여러 어둠이 있겠지만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소망이 보이지 않는 어둠 가운데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잘 보여준 것처럼, 반지하의 삶에서 상류 사회의 진출 사이에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높은 계단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저 그런 오늘 나의 삶은 이대로 죽을 때까지 죽 이어질 것만 같습니다. 사는 것이 별로 재미도 없고 기대도 되지 않습니다. 생각이 늘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우울감을 낳습니다. 우울감은 야밤에 폭식으로 이어집니다. 코미디 영상을 보며 마음껏 웃어보지만 잠시뿐 끝나고 나면 여전히 우울합니다. 이런 청년들의 마음을 밝게 비추어주실 수 있는 분이 바로 빛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실 때, 그 분의 말씀이 나의 마음을 비추어주실 때 내 삶에 희망이 보이게 됩니다. 비전이 보이게 됩니다. 주님이 주신 그 꿈과 비전을 위해 나의 모든 열정과 생명을 다바치고자 하는 동기부여가 되고 힘이 생깁니다. 삶에 활력이 생깁니다. 봄학기 마태복음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이 생명의 빛이 우리 마음에 충만하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태복음의 전체 내용을 집약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천국이 바로 가까이 임박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4복음서 중 가장 종말론적입니다. 오늘날 여러 사이비 종말론으로 인해 청년들에게 종말론 설교를 하기가 매우 힘들어졌다는 말을 듣습니다. 종말론 메시지를 반복해서 여러 번 전하면 혹시 저 사람도 사이비가 아닌가 의혹의 눈초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종말론적인 신앙은 마태복음의 주제이면서, 동시에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종말론적인 신앙이 가장 좋은 신앙이고 참된 신앙이기 때문에 마귀는 사이비 종말론을 퍼뜨려 성도들로 하여금 종말론적인 신앙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바로 가까이 왔기 때문에 지금 바로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의 의미에 대해서는 지난 말씀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회개는 세상을 향해 가 있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천국은 곧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이 세상의 왕은 돈입니다. 돈이 곧 절대 힘이고 절대 권력입니다. 이에 비해 천국의 왕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자이십니다. 돈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천국 백성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이전부터 하나님이 왕이시지만 이 하나님께서 그 왕권을 실제 행사하시는 때가 곧 가까이 임박했음을 말씀하십니다.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을 심판하시는 때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가운데 지금 이 시간 세상을 향해 가 있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를 즐거워하는 복된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던 예수님은 두 사람의 어부를 보셨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4복음서 전체를 읽어보면 예수님이 이 두 형제를 만나신 것은 이곳이 처음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을 보면 본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자 예수님께 나갔고, 이후 그의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 마태는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갈릴리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던 두 사람을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으로 부르신 내용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은 이제 본격적으로 공생애, 곧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그 사역을 함께 할 제자요, 동역자들로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하필 본래 어부였던 자들을 그러한 제자요, 동역자들로 부르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출애굽 사역의 일꾼으로 부르신 모세의 경우 본래 직업이 목자였습니다. 본래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로서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나, 동포에 대한 애정으로 살인사건을 일으킨 후 도망자가 되어 광야에서 40년간 양치는 목자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세를 부르셔서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양치던 목자였던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목자는 울타리 안에 있는 양들을 잘 돌보는 것이 할 일입니다. 이에 비해 어부는 요리조리 돌아다니는 물고기들을 그물로 낚아 한데 모으는 직업입니다. 물론 물고기 편에서 볼 때 어부의 그물에 낚이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유쾌한 일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잃게 되는 치명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유입니다. 출애굽의 모세와, 이스라엘의 다윗이 이미 우리 안에 있던 양떼를 돌보는 목자의 직분이었다면 베드로와 안드레의 직분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복음과 전혀 상관없이 요리조리 돌아다니는 이들을 말씀의 그물로 모아 천국백성으로 삼는 것입니다. 비유의 핵심은 낚아서 잡아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물로 낚아서 잡아먹는 것은 이단이 하는 일입니다. 이단은 말 그대로 비슷하게 하지만 끝이 다릅니다. 그 최종적인 목표는 돈입니다. 이단을 하나의 사업체로 생각하고 운영하는 것입니다. 이단의 괴수인 이만희도 그렇게 돈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가 본래 다른 이단에 속해 있다가 아 이렇게 이단 사업을 하는구나 깨닫고 분리 독립했다고 합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이단 신학교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이단의 가르침만 주면 오래 못간다는 것입니다. 신학교를 세우면 그곳에서 심층 세뇌를 할 수 있고 현장과 신학교 사이에 시너지 효과가 발생해 오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만희 아래에서 배운 자들이 이만희 사후 분리 독립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을 낚아서 자기 아래 두는 것은 특히 이단들이 열심히 하는 일이지만 이것은 본래 예수께서 시작하신 것이요, 천국 복음 사역의 핵심적인 방법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주로 혈통을 통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천국 백성들은 어부가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낚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곧 요리조리 활개치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말씀의 그물, 전도의 그물을 던짐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어부와 같이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를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으로 fishing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은 삶의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내 생명을 바칠 삶의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찾습니다. 그러나 세상 어디를 가도 ‘아 정말 이것이다’ 하는 울림을 주는 삶의 목적과 방향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을 “나를 따라오라”는 분명한 삶의 목적과 방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는 것은 나와 늘 함께 하는 가운데, 동고동락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보통 위대한 소설가나 문필가, 사상가들은 (요즘은 영상매체 감독까지 포함하여) 그 시대 젊은이들에게 본받고 따를 모델을 제시합니다. 요즘 수많은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소설, 혹은 영상 매체의 주인공들은 말하자면 너도 저렇게 살아라 하는 일종의 삶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 그러한 인생을 모델로 하여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델은 마치 유행을 타는 옷처럼 시대와 유행에 따라 달라집니다. 요즘은 누가 뭐라고 해도 뚜렷한 자기 주관과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청년, 역경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꿋꿋이 헤쳐 나가는 똑부러진 청년이 모델로 제시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느 정도 참고는 할 수 있으나 영원히 변치 않는 참된 삶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을 제시하지만 생명을 줄 수는 없습니다. 이에 비해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를 따라올 때 천국 백성이 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됨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대해 수많은 문필가, 사상가들이 여러 이야기를 하였으나 그것은 그때그때 그 시대에 어울리는 유행과 같은 옷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참된 삶의 자세와 방향을 제시합니다. 또한 우리가 젊었을 때 우리에게 길을 제시할 뿐 아니라 우리가 나이가 들고 이 세상을 떠나 생명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가 붙들고 따라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분명한 삶의 모델이 있습니까? 내가 항상 생각하고 배우고 따라야 할 내 삶의 목표와 방향이 있습니까? 우리는 안개가 가득한 길을 달려가는 자와 같이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밝은 빛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조명등과 같고 이정표와 같습니다. 우리가 이 청춘이 다하기까지, 이 생명을 다하기까지 내 삶의 방향타와 같고 조명등과 같은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누가는 본 사건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다 생략하고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는 간략한 내용을 기록합니다. 마태가 강조하는 것은 “곧”과 “버려두고”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들이 주저주저하거나 좀 생각할 말미를 달라고 하지 않고 그 부르심에 곧 응했음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그물을 버려두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그물은 천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용한 후 잘 씻어두지 않으면 곧 상하게 됩니다. 비싼 그물을 잘 씻은 후 이 그물을 누군가에게 맡기거나 너가 쓰라고 말한 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상식에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용했던 그물을 그대로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합당한 자세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주님께서 부르실 때 머뭇거리지 말고 즉각 따라야 합니다.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의 것에 매이거나 연연해서는 안됩니다. 창세기에서 롯의 아내는 소돔에 두고 온 여러 재물과 재산이 아까워, 또 그곳에서 재미나게 살던 삶을 떠나기가 아까워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판이 임박하고 천국이 가까이 왔을 때 이 세상의 것에 연연하고 매이는 자는 큰 화를 당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잘못된 종말론으로 인해 오해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종말론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흰 옷 입고 산에 올라가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예정된 1대1을 평소와 다름없이 해야 합니다. 직장을 다녀야 하고 평소처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다만 이 세상의 것에 매이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지금이라도 부르시면 즉각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이 가라고 하신 곳에 가야 할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주님의 부르심에 곧 응답하는 복된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1-22절에서 예수님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역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그들도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23-25절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많은 병든 자들, 귀신 들린 자들, 중풍병자들이 나음을 받았습니다. 저자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실제적으로 천국이 임했음을 증거합니다. 천국은 병자, 귀신들린 자들이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천국이 임함으로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이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치유와 회복이 일어납니다. 우리 나라에도 천국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소외되었던 천민들, 여성들에게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여러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도 천국 복음이 전파될 때 치유와 회복이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결론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를 때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혹은 누구를 따르고 있습니까? 혹 잘못된 것이면 다 내려놓고 다시 새롭게 예수님 한 분을 힘차게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