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사도행전 제 13 강
환난과 하나님 나라
말씀 / 사도행전 14:1-28
요절 / 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오늘 말씀은 바울 일행의 1차 선교여행 후반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 전도자의 자세, 그리고 믿음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난 두 사도는 이고니온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고니온’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동남쪽으로 160km 떨어진 해발1030미터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은 타우루스와 술탄 산맥 사이에 놓여 있는 광활한 대지를 내려다보면서 강들로부터
풍부한 물을 공급받는 매우 오래된 도시입니다. 농업과 상업이 발달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많이 와 거주하였고 유대인 회당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터키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인 코니아(konya)가 바로
이 지역입니다.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자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들이
믿었습니다. 유대인 회당이 세계 선교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율법과 전통을 지키면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를 열심히 지키고자 할수록 자신들의 연약함만을
발견했어요.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죄책감으로 괴로워했어요 그러다가 두 사도의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의로우신 예수님이 우리 죄값을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어요.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받아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내면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죄사함과 영생을 소유한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동안 내 힘으로 의롭게 될려고 애썼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되었어요. 그런데 또 다른 반응도 나타나죠. 2절입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알고
있었기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율법과 전통을 잘 지키는 자신들만이 구원받은 사람이요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사도들이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니 ‘이게 뭔소리야’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믿는 형제들을 향하여 악감정을 갖도록 합니다. 믿는 자들을 째려보고 말을 거칠게 하였어요. 바울과 성경공부한다는 이유로 지역사회에서 왕따를 시켰어요.
이때 두 사도가 어떻게 합니까? ‘분위기가 안 좋으니 입 다물고 조용히
있자’,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이렇게 했습니까? 3절을 읽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오래 있고자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고니온의 믿는 형제들이 이제 막 복음을 듣고 영접한
초신자들입니다. ‘그들을 적대적인 환경가운데 내버려 두고 떠난다면 어떻게 될까? 연약한 그들이 믿음에서 떠나지 않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리스도께 뿌리를 내리고 자립신앙을 갖기까지 최대한 버티면서 그들을 돕는 것입니다.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란 말도 있잖습니까? 복음전도자들은 박해앞에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표적과 기사를 그들의 손으로 하도록 하셔서 은혜의 말씀에 힘이 실리게 해 주시죠. 여기보면 말씀을 은혜의 말씀이라고 표현합니다. 율법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 사역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나요? 4절을 읽습니다.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뉘었습니다. 박해자의 편에 서든지, 사도 편에 서든지 해야 했습니다. 갈등이 생겼어요. 이것이 좋은 것입니까? 안 좋은 것입니까? 예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의 검으로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십니다.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마귀와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됩니다. 세상과 분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캠퍼스는 유대인 회당처럼 참으로 복음 전하기에 좋은 황금 어장입니다. 또한 가장 복음에 대해서 배타적으로 변해버린 곳이기도 합니다. 여기 2022년 설문조사 내용이 있습니다. 종교가 없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90퍼센트 이상이 향후 종교를 갖기를 원치 않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8.7%만이 종교를 갖기를 희망한다고 하였습니다. 8.7% 중에서도
기독교인이 되겠다는 비중이 1/5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이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무신론자 100명중 1.8명만이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이 역사하셔야
캠퍼스에 소망이 있습니다. 또한 소수의 믿는 역사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상은 점점 악해지고 있습니다.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부패해가고 있습니다. 캠퍼스도 마찬가지죠. 부패를 막아줄 소금 같은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영적 싸움을 싸울
그리스도의 군사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막중한 소명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캠퍼스를 포기하면 안됩니다. 꾸준히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인내하고 이 일을 계속하면 반드시 말씀이 세력을 얻어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줄로
믿습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청년들~ 소수이지만 참으로 소중합니다. 캠퍼스에서 소금의 역할, 그리스도의 군사의 역활을 여러분들이 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자!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은 그들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5)
불신자들이 연합하여 두 사도를 죽이려고 획책합니다. 이를 알게 된 두 사도는 어떻게 합니까?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갑니다. 때론
삼십육계도 좋은 방책입니다. 마냥 버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죠. 예수께서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10:23)고 하셨습니다. 피해서 간
‘루가오니아’(Lycaonia)지역은 갈라디아 남쪽에 있는 험한 산악지역입니다. 그 중 한 성인 ‘루스드라’(Lystra)와
다른 성 ‘더베’(Derbe)에 갑니다. 이곳에는 유대인들도 별로 없고 회당도 없습니다. 두 사도는 무얼
합니까? 이곳에서도 복음을 전합니다. 박해는 복음 전파를
멈추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지역으로 전파하도록 합니다.
자! 그런데 이곳에서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니까? 8-10절을 읽습니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반응이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큰둥하고, 어떤
사람은 팔장을 끼고, 어떤 사람은 인상 쓰면서 들었습니다. 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면서부터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바울이 말을 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 아멘~’ 이렇게
했습니다. 그의 마음에 말씀이 들어가고 믿음이 생긴 것을 바울이 보았어요.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알았어요. 바울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그러자 그 사람이 순종하여
일어나 걷습니다. 와~ 이방 세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사람들이 얼마나 깜놀했겠습니까? 자! 이 사역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면 치유 사역이 일어납니다. 말씀, 믿음, 그리고 치유로 이어지는 모습이 가장 건강한 사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전국 UBF 학사 수양회에서 특강을 하셨던 목회데이터 연구소
지용근 대표는 초등학생때부터 말더듬이였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드라마
‘여로’에 나오는 말더듬이 장욱제를 따라하다가 진짜로 말더듬이가 되어버렸어요. 대학을 지원할 때 그가 원하는 과가 있었지만 입학요건에 말더듬이는 지원할 수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한군데가 나왔는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님이 말더듬이도 지원할 수 있도록 조건을 열어주어 연세대 사회학과에
입학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강 신청할 때 교수님들을 찾아가 자기에게 절대로 발표를 시키지 말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선택과목도 발표가 없는 것만 골라서 했습니다. 이런 그가 연희센타 UBF 목자를 만나 요한복음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자님이
자기에게 성경을 읽으라고 하는거에요. 자기는 절대 못 읽는다고 뒤로 뺐습니다. 그러나 UBF목자는 지지 않고 끝까지 푸쉬하였어요 어쩔수 없이 창피했지만
말을 더듬거리면서 성경을 읽고, 요한복음 1장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 공부를 하였어요. 다음 번에는 요한복음 2장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예수님’ 공부하였는데, 조금 밖에 더듬거리지
않고 읽는거에요. 3장 ‘디고데모’ 공부할 때는 막힘없이 읽게 되었고, 4장 ‘사마리아 여인’을 공부할 때는 술술술 읽게 되어 자신도 감짝 놀랐습니다.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요. 가장 놀란 사람은 부모님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 그가 너무나 말을 유창하게 잘해서 사회학과 친구들이 과 대표를 하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는 평생 ‘말더듬이’로
살 운명이었는데, 말씀이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칠 때 사람들 앞에서도 떨지 않고 유창하게 말하는 유명강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목회데이터 연구소장겸 대표로써 목회 데이터를 분석하고 연구하여 한국 기독교계에 방향을
제시하는, 없어서는 안될 귀한 사명을 지금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생명의 말씀을 들을 때 운명으로 여겼던 것들이 치유되고 우리로 하여금 새 인생을 살게 합니다.
말씀 치유역사를 보고서 깜놀한 무리들이 어떻게 하고자 합니까? 11-13절을
읽습니다.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무리들이 바나바를 제우스, 바울을 헤르메스라 하며 신으로 추앙하여 제사를 드릴려고 합니다.
이에 두 사도는 어떻게 합니까? 14절부터 18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사도들은 옷을 찢음으로써 무리들의 행위가
얼마나 불경한 일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큰 소리로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며 책망합니다. ‘우리도 너희와 똑같은
사람이야. 너희와 다를 바가 없어’하며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목적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그들은 창조주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우리가 섬겨야 할 유일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역사와 자연의 현상
속에서 일하십니다. 그분을 섬기는 일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다 헛된 일입니다. 왜 이제야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받기 이전 세대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제멋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고, 먹을거리를 주셔서, 그들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심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지금까지
삶의 현장에서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제사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헛된 신을 섬깁니다. 이병두 목자님께서 병원에서
일할 때 경험한 일을 우리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근무한 병원에 최첨단 의료장비가 들어와 모두가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장, 병원장, 의사들이
최첨단 의료 장비 앞에 돼지 머리를 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병두목자님이 ‘최고의 엘리트들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하며
극구 반대하여 겨우 취소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이처럼 어리석을까요?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모르면 헛된 신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헛된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말씀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이 복된 일을 다른 사람에게 증언하는 일 또한 얼마나 복됩니까?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전히 어떤 가운데 있습니까? 19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유대인들이 떼를 지어서 원정길에 올랐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과거의 사울처럼 대단했어요. 그들은 바울을 직접 대적하기보다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대적하게
만듭니다. 선동된 무리들이 바울을 돌로 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울을 ‘오, 신이시여~’ 하며 제사하려 했던 무리들이 이제는 선동되어서 짱돌을 들어 바울을 치고 있습니다. 무리의 변덕스러움이 놀랍습니다. 이는 어떤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호산나 다윗의 왕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여’ 외치던 무리들이 종교지도자들에게 선동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돌변한 모습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끌어냅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바울이 일어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일어나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자기를 돌로 쳤던 그 성으로 다시 들어갑니다.(20)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갑니다. 그 길은 적어도 96km를 하염없이 걸어가야 하는 산 길입니다. 바울은 돌에 맞아 성한 곳이 없는 몸으로 그 길을 어떻게 걸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갈라디아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
더베에 간 그들은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합니다. 모든 선교일정을 마친
그들은 이제 귀환만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떤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여기 지도를 보면 더베의 오른쪽에 바울의 고향, 다소가 있습니다. 고향에 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추스르고 쉬면서 재 충전하고서 안디옥 교회로 가는 것이 제일 좋은 길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1차 선교여행에서 이미 지나왔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비시디아), 이렇게 역순으로 재 방문을
합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바울은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쫓아온 유대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박해를 받고 돌에 맞아 죽을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그때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처럼 복음의 원수들이 열심인데, 이들에 의해
그동안 개척한 교회들이 공격받지는 않을까? 공들였던 복음전파의 수고가 헛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던 것입니다. 고향 생각보다 막 개척된 교회와 어린양들이
눈에 아른거렸어요.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이 행정구역상 어디에 속하나요? 갈라디아 지역입니다. 약 10년 뒤 바울이 쓴 갈라리아서를 보면 이러한 염려가 현실로
나타납니다. 제가 몇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1:6,7),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1-3)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사도 바울이 돌에 맞아 거의 반쯤 죽는 사건을 경험하면서 “우째 이런
시련을 나에게 주시나이까?” 이렇게 주님께 섭섭해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이렇게 십자가에서 모진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구나. 피를 흘리셨구나. 오 주님, 감사합니다. 내가
무엇이관데 주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하는 이 특권을 주시나이까?’ 주께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주님의 양들과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주님의 어린 양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처음 복음을 전했던
세 도시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을 다시 방문합니다. 그리고 한 일이 무엇입니까? 22절을 다함께 읽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첫째,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면하였습니다. 유대 율법주의 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요동하지 말고 은혜의 복음을 굳게 붙들도록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그 안에서 행하도록 권면하였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박해를
받습니다.(딤후3:12)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입니다.(딤후2:11,12)
지금 우크라이나는 군사들을 모으고 서방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아 러시아에 대해 총공세를 펼치고 있습니다. 소집된 군인들은 힘든 훈련을 감당해야 합니다. 전투중에 부상을 당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수 만명의 병사가 죽거나 다쳤습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습니다. 왜 그러죠? 그들은 빼앗긴 땅을 되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루스드라 출신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3,4) 우리는 마귀에게 빼앗긴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고난은 필수 불가결합니다. 고난은
오히려 훈장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또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의탁합니다. 목자 선서식을 하였다는 것이죠. 세운 목자들에게 양들을 이리로부터
보호하고 말씀을 먹이도록 위탁합니다.
이렇게 갈라디아 여러 도시들을 다시 방문한 후 이제 고향을 향합니다. 타우루스
산 위의 산길을 지나, 밤빌리아의 해안 늪지로 내려왔습니다. 이번에는
버가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거기에서 복음을 전한 후 앗달리아로 내려갑니다.(25절) 앗달리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힘입어 위탁받은 사역을 끝내고 안디옥에 이릅니다. 도착하자마자 성도들을 불러 모으고 선교보고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합니다. 이를 이루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결론입니다. 바울은 고난가운데서도 생명의 복음을 힘써 전했습니다. 자기의 생명까지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어린 양에게 생명의 말씀을 먹이는 고난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