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20년 마태복음 10강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마태복음 7:1-12)2020-05-03 21:49
작성자

2020년 마태복음 11강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말씀 마태복음 7:1-12
요절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산상수훈은 복된 삶에 대해 말했습니다. 본문은 행복한 삶을 살려면 사람이 관계가 좋아야 함을 가르칩니다. 그러면, 사람이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 만 가지 Tip이 제시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인간관계의 황금률 한 가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오늘 그 돈 주고도 못 살 인간관계의 황금률을 배우고 우리 모두가 관계가 좋아지는 복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관계성이 좋은 삶을 살려면,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1,2).
1,2절을 보십시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비판이란 말은 헬라어로 ‘크리노’로서 분별하다, 평가하다, 판단하다, 해석하다 라는 뜻입니다. 어떤 현상이나 사물이나 사람을 보고 그 옳고 그름을 밝히거나 지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판과 비슷한 말로 비난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좀 더 냉혹하고 악의적인 비판을 말합니다. 그에 비해 비판이란 객관적이고 선한 평가인 셈입니다. 때론 비판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비판의 좋은 기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비판을 전혀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비판의 역효과가 있음을 알고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왜 우리가 비판을 삼가야 할까요?

첫째로, 비판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판단은 대부분 섣부른 판단이 되기 쉽습니다. 사교성이 적다고 비판했지만 정직하고 과장되지 않은 학생일 수 있습니다. 소심하다고 단정짓지만 실수가 적고 정확한 학생일 수 있습니다. 말이 많다고 비판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의욕이 넘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큰 소리로 말합니다. 자칫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하지만 사실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자신의 소리를 크게 낸 사연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다 모릅니다. 누가 하는 행동과 말의 진의를 모릅니다. 그에게 깊은 속사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한 사람을 정확하게 아십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잘 모른다” 이것을 깊이 인정할 때 함부로 비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판을 줄이는 비결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기본적으로 선의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또 그를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둘째로, 비판이 가져오는 역효과 때문입니다. 비판을 선의로 해도 비판하게 되면 대부분 그 목적이 달성되지 않고 관계성만 깨지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세상에 비판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괜찮으니 어떤 이야기도 하라고 하지만 막상 비판을 받으면 속이 쓰리고 마음이 상합니다. 다른 사람은 쉽게 비판하지만 막상 자신이 비판의 대상이 되면 아주 작은 비판에도 신경이 곤두서고 마음이 괴롭습니다. 비판을 받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대개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그러는, 너는?”이란 반응입니다. 비판을 받을 때 상처를 받고 반격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자신을 깍아내리고 공격하는 것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공격이나 반격이 자동으로 나오겠죠! 그래서 “너는 어떤 데?” “너는 깨끗해?” “너는 잘해?”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렇게 비판은 비판을 불러옵니다. 비판의 악순환이 초래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비판의 역효과와 역기능을 알고 비판을 자제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최근에 한 중학생이 선생님에게 야단맞고 혼자 고민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야한소설을 읽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을 받아 생긴 일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심약한 학생이 아니었다고 그 어머니가 라디오인터뷰에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비판은 안하는 게 좋지만 하게 된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평소 사랑의 관계성이 형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대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99% 칭찬하고 1% 정도 지적할 사항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3-6절을 보면 비판대신 무엇에 힘써야 하는 가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남의 눈의 티를 뽑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눈의 들보를 빼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눈 속에 대들보가 있습니다. 대들보는 엄청나게 큰 나무 덩어리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그것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빼주려 합니다. 이 얼마나 얼토당토하지 않으며 위험한 행동입니까? 그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눈 속에서 들보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밝히 보고 다른 사람의 눈 속에서 티를 빼어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판하기에 앞서 자기성찰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또 비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자기성찰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자기 허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남의 허물에 관심을 갖는 사람입니다. 자기 허물에 깊은 관심이 있는 사람은 자기 허물만 보입니다. 남의 허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들어와도 티만큼이나 작게 보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허물은 대들보처럼, 더 나아가 태산처럼 커 보입니다. 그는 회개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허물 때문에 항상 애통해 하며 늘 눈물 흘리며 회개합니다. 그러고도 항상 자신이 회개할 게 태산같이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이 남의 허물을 다룰 자격이 있다고 보십니다. 


그런데 반대로 항상 눈이 남의 허물에게만 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의 눈에는 남의 허물만 보이고 그의 입에도 남의 허물만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찾고 비판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살아가는 이유요, 존재의미일 정도입니다. 그에게 자기성찰은 제로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이런 사람은 절대로 남의 허물을 다루어선 안 된다 하십니다. 이런 사람이 핀셋을 잡고 남의 허물을 빼낸다고 눈을 뒤집고 티를 집어내려 한다면 그 눈을 찔러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고 가르치려면 정말로 자기성찰을 태산같이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내면과 삶의 변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자기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것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런 작업 후에 그 자신이 변화되면 변화된 모습을 보고 주위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울다가 그의 눈에서 자연스럽게 티가 빠져 나올 것입니다. 따로 다른 사람 티같은 허물을 빼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모임은 자기성찰에 힘쓰는 모임입니다. 우리가 특히 소감모임을 잘 이루어 깊이 자기를 돌아보기를 기도합니다. 남 탓하고 시스템 탓하는 세상분위기, 사회분위기를 따라 입만 열면 비판만 하지 않고 자기를 깊이 성찰하여 자신의 회개와 변화와 성장을 이루고 열매를 맺어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 주의할 점을 말씀해 주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여기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진리의 말씀과 교훈을 뜻합니다. 개나 돼지는 그것을 받을만한 내면이 안 된 사람을 뜻합니다. 진리와 교훈의 말씀을 누구에게 주고자 할 때 사람 봐가며, 상태 봐가며 해야 합니다. 좋은 것이라고 무조건 던지면 역효과만 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지하철에 가서 할아버지가 어른이 왔는 데 젊은이가 앉아 있다고 훈계를 하면 봉변당하기 쉽습니다. 엄마들이 얘들한테 좋은 소리라고 무작정 늘어놓으면 잔소리가 되고 귀만 아프게 하고 반발심만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두 가지를 배웁니다. 우선 우리 자신이 누가 나에게 교훈을 줄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 가입니다. 비판, 교훈, 쓴 소리 속에 우리에게 보배가 될 교훈들이 담겨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잘 받기만 하면 엄청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 받지 못합니다. 개돼지는 저차원적인 것을 주어야 좋아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면 좋아합니다. 피부에 와 닿는 사랑을 좋아합니다. 누가 조금이라도 쓴 소리를 하면 얼굴을 붉히고 반발하며 관계가 악화됩니다. 이런 우리의 내면은 개돼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능하면 다른 사람을 통해 주시는 진리의 교훈을 잘 받아들여 성장하고 발전하는 비판과 교훈에 수용력 있는 사람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람을 지혜롭게 돕는 것입니다. 상태를 봐가면서 돕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개돼지처럼 나올 때는 좀 피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상태가 항상 같지 않습니다. 어떨 때는 개돼지 같을 때도 있고 천사 같을 때도 있습니다. 수준이 저차원이 되어 있을 때, 감정적으로 격앙되었을 때 이럴 때는 거리를 두는 게 필요합니다. 교훈의 냉각기를 갖는 것이지요. 개돼지 같던 사람도 항상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언제 보면 또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천사처럼 바뀌어져 있습니다. 이런 때를 잘 활용하여 진리의 말씀과 교훈을 주는 것이 좋습니다. 


7-11절은 뜸금없이 기도에 대한 교훈이 나옵니다. 본문의 흐름 속에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진리를 가르치고 교훈을 주는 데 사람들의 반응이 개돼지와 같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팁을 주시는 것입니다.


좋은 의도로 교훈하고자 하는 데 개돼지처럼 반응하면 벽에 부딪친 것같이 느껴집니다. 이때  분노하고 실망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가르치기를 포기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경우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고, 찾는 것을 찾게 하시고 닫힌 문을 열어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응답이 확실함을 약속의 말씀으로 주십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8) 너무 분명하여 명제화된 진리형태로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응답에 대해 확신을 갖도록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떡과 생선은 자녀가 아버지에게 구하는 좋은 것입니다. 예컨대 어린 아들이 불량식품이 아니라 학용품을 사달라고 아버지께 말합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것을 어떻게든지 마련해 줍니다. 이 땅의 아버지들도 그런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어떻겠습니까? 자녀들이 좋은 것을 구할 때 반드시 주십니다. 


기도는 이처럼 실제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말로 교훈이 안 먹힐 때는 그 사람을 포기할 때가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그의 귀를 열어주시도록, 그의 마음을 주장해 주시도록 기도할 때입니다. 영원히 개돼지인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역사가 있기 전에 모두 그런 상태였습니다. 짐승 같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시고 우리의 귀가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어거스틴은 정욕과 마니교에 사로잡혀 살 때 개돼지와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그를 돕기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까지 따라갔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낙심한 어머니 모니카에게 밀라노 암브로시스 주교가 말했습니다. “눈물로 기도한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눈물의 기도가 헛되지 않음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이때 그녀는 다시 어거스틴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때 마침내 어거스틴이 변화되었습니다. 그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그때 개돼지와 같던 어거스틴이 성어거스틴으로 바뀌었습니다. 위대한 성경선생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바램이 이루어졌습니다.


눅 11:13절을 보면 우리가 하늘 아버지께 구하면 주시는 ‘좋은 것’은 성령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구하면 반드시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개돼지 같던 사람도 바뀝니다. 진리를 깨닫고 그것의 소중히 여깁니다. 성령이 임할 때 짐승같이 살던 사람도 달라져 어거스틴처럼 위대한 성경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돕다가 한계에 처할 때, 낙심할 것이 아니라 성령을 구함으로서 어떤 말이 안통하고 교훈이 안 먹히던 사람도 변화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관계 황금률을 살펴보겠습니다. 요절말씀인 1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인간관계의 모든 비결이 이 한 말씀에 담겨져 있습니다. 3세기 로마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이 말씀을 너무나 귀하게 여겨 황금 판에 새겨 붙인데서 이 말씀을 황금률(Golden Rule)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인간관계의 비결은 내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모든 인간관계가 좋아지고 행복한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원래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의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 중 인간관계명령의 집약으로 보셨습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말을 대접으로 바꾼 것은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이 대접이기때문입니다. 대접이란 무엇입니까? 사전에는 마땅한 예로 대함, 음식을 차려 접대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물질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자기중심적입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습니다. 내가 비물질적인 면에서 이렇게 대접을 받고 싶다는 바램이 있습니다. 또한 물질적인 면에서 이렇게 대접을 받고 싶은 바램이 있습니다. 그것을 참조해서 다른 사람의 바램과 소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존중받고 싶습니다. 존경받고 싶습니다. 칭찬받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무시받길 원치 않습니다. 반갑게 사랑의 인사를 받고 싶습니다. 찡그린 얼굴을 보고싶지 않습니다. 생일날에 기프트콘이라도 받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런 것을 기다리지 말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해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대접 받고자 기다리기만 하면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판단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들고 화가 날 수 있습니다. 자괴감이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인간관계를 하는 사람의 내면세계입니다.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대접하면 그러한 내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먼저 대접하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관계는 메아리와 같습니다. 반드시 그도 나를 대접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행복한 인간관계가 형성됩니다.


히브리서 13:2를 보면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고 하면서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손님대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뜨거운 날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장막 문 앞에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들어보니 세 사람이 맞은편에 작열하는 태양아래 서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자마자 즉시 달려가 그들을 환영하며 몸을 땅에 굽혀 자신의 집에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조금’ 이라는 단어를 조금 많이 사용하며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는 손님들 편에서 무엇이 필요한 가를 생각했습니다. 즉 내가 그들이라면 이 상황에서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했습니다. 많이 걸어온 나그네들로서 발을 씻고 나무아래 쉬기를 원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발 씻을 물을 갖다 주고 나무아래 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나그네 입장에서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는 가운데 배가 고플 것이니 음식을 잘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고로 부드럽고 맛있는 빵과 송아지 고기를 해서 갖다 주었습니다. 배가 몹시 고플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음식 만드는 속도에 신경을 썼습니다. 목이 마를 것을 알고 시원한 우유와 간식으로 엉긴 젖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행에 피곤한 사람들은 몸을 움직이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식탁 옆에 모셔 서서 그들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재빨리 갖다 주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나그네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접하므로 나그네들을 흡족케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가장 잘 섬기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먼저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살고 예수님을 생명다해 섬기게 되었습니다.


Put yourself in other’s shoes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잘 섬기려면 내가 상대방이라고 생각하면서 섬기는 것이란 말입니다. 부부가 관계가 안 좋자 아내는 남편에게 광야에 가서 3년간 왜 부부관계가 나쁜 지 깊이 생각하고 오도록 했습니다. 3년이 지나고 남편은 이제는 아내를 잘 섬길 수 있을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돌아와 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세요?” “나야 나” 그러자 아내는 남편에게 3년간 더 수도하고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3년 후 “누구세요?” 했을 때 남편은 “너야, 너”라고 대답하여 합격점을 받고 다시 결혼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임을 알고, 상대방을 대접할 때 인간관계가 좋아지고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나쁜 인간관계가운데 있습니까? 누구 탓을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상대방을 나 자신처럼 배려하고 헤아리지 못한 것이 원인입니다. 객관적으로 상대방 탓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바뀌면 나로부터 인간관계의 변화가 올 수 있습니다. 관계는 금방 바뀌지 않습니다. 관계는 쌓이고 조금씩 좋아집니다. 내가 조금씩, 때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때 그 관계는 반드시 바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주신 황금률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해 나가며 관계가 달라지는 행복을 맛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