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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0년 마태복음 30강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마태복음 21:1-22)2020-10-05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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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마태복음 30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21:1-22

요절/ 마태복음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으로 하여 3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자 마태는 이 3가지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성전은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새롭게 배우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이 무엇인지 배우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님 일행이 감람산 기슭에 위치한 벳바게에 도착하였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를 따로 부르시고 맞은편 마을에 줄에 매여있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 예수님께 끌고 오라 하셨습니다. 만약 누가 어이, 여보시오. 지금 뭐하는겁니까따질 경우 주가 쓰시겠다라는 간단한 답변을 주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즉시 보내리라 하셨습니다.

 

6절을 보면 정말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현재 나귀의 주인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 나귀의 진짜 주인은 주님이시며 그 주님께서 지금 필요하시니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주님이시라는 것은 마태복음 21-28장에 계속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현재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종교 지도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성전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진짜 주인이 성전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 진짜 주인은 과연 성전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맺히고 있는지 확인하실 것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저자 마태는 이 사건이 메시야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씀은 곧 스가랴 9:9절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인용된 스가랴 말씀과 실제 스가랴 말씀에는 전체적인 내용은 동일하지만 세부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구약 스가랴에서는 왕이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인용한 내용은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신다는 내용은 생략하고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신다는 부분만 인용함으로 그가 겸손한 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또 구약 스가랴에서는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탄다고 기록되었는데 마태는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라고 부연설명을 함으로 왕이 탄 나귀가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면 저자 마태가 이와같은 스가랴 본문 인용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겸손으로 그의 나라를 건설하시는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 나라의 왕들은 스스로를 높입니다. 고대 왕들은 자신의 보좌를 높고 높은 계단 위에 만들었습니다. 왕의 보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을 통과해야 하고 마침내 보좌가 있는 광장에 이르면 저 멀리 아득한 계단 위에 왕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고관대작들이 그 앞에서 엎드려 있었고 호위 병사들이 번쩍이는 칼과 창을 들고 왕의 주변을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또 왕이 자기가 정복한 성에 들어갈 때는 어떠합니까? 요즘으로 치면 수억원을 호가하는 명품 말 위에 화려한 안장을 걸치고 금빛 찬란한 복장을 한 채 위풍당당하게 성을 입장하였습니다. 왕의 앞에는 기수가 행진하였고 왕의 후위에는 수많은 군사들이 발걸음을 맞추어 보무당당하게 행진함으로 왕의 위엄과 권위를 세웠습니다. 고대 왕들이 이와같이 한 것은 그들이 건설한 나라가 힘과 무력에 의해 건설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의 왕의 입성은 어떠합니까? 나귀, 그것도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사람을 한 번도 태워본 적이 없는 앳된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입성은 너무도 작고 초라해 보입니다. 이것은 마치 한 나라의 대통령, 혹은 다국적 대기업 회장이 중요한 행사장에 크고 멋진 검은색 승용차 대신 작은 경차를 타고 털털거리며 가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낮고 낮은 자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왕의 자녀들이 화려한 왕궁의 따스한 벽돌 난로 곁에서 비단 천에 싸여 있을 때 예수님은 짐승들의 먹이통인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왕의 입성을 하시면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장차 메시야께서 이와같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마태는 이 스가랴의 예언이 이제 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증거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처럼 작고 초라해 보이는 모습으로 왕의 입성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는 그가 건설할 나라가 힘과 무력, 혹은 재력에 의해 건설되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건설할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그가 건설할 나라는 그의 겸손으로 건설되는 나라입니다. 겸손이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세상 왕들이 자신을 높이고 힘과 무력으로 그 나라를 건설할 때 왕 되신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짐승의 구유에 태어나심으로 낮고 낮은 자들의 마음을 이해하셨습니다. 사회에서 천대받고 멸시받던 세리와 창기들을 영접하시고 섬겨주셨습니다. 병으로 고통하던 자들을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을 십자가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의 자리로까지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세상에서 작고 낮아진 모든 자들의 왕이 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 형벌을 받기에 합당할 정도로 흉악한 모든 죄인들의 왕이 되셨습니다.

 

구약에서 다윗은 그를 죽이려 하는 사울왕으로 인해 아둘람 굴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다윗 주변으로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가 모여들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따뜻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품었습니다. 이와같이 다윗은 그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 낮아진 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삼상 22) 이 다윗은 메시야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처럼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을 따스한 사랑으로 품으셨습니다. 더 나아가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들이 그 사랑과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는 왕이 되셨습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의 자료에 따르면 2019년 기준으로 한국에서 파송된 선교사가 171개국 28,039명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죄인되었던 자기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그 사랑과 그 은혜에 강권되어 선교사로 나간 분들입니다. 이들 중 주님께서 힘과 무력으로 협박을 해서 선교사로 나간 분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 그 십자가 사랑, 그 낮아짐과 그 겸손에 은혜받고 감동을 받아 선교사로 나간 것입니다. 또 주일, 곧 우리 주님의 날이 되면 삶의 현장에서 일하던 수많은 크리스챤들이 생업을 멈추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옵니다. 이들 역시무력이나 협박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그 낮아지심과 십자가 사랑에 은혜받고 나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왕들이 무력으로 나라를 세웠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세계 각국에서 인재들을 불러모아 바벨론 제국의 부와 힘과 능력을 과시하며 자기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종용하였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제는 강한 무력과 폭력으로 왕의 권위를 세우고 자기 말을 듣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무력을 통한 전쟁으로 크고 강한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 왕의 명령을 아직도 기억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이 무슨 명령을 내렸는지조차 다 잊힌 바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춘 겸손으로 예수께서 건설하신 그 나라의 백성들은 지금도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겸손과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의 명령에 생명을 바쳐 순종하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짐을 대신 짊어지신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다는 점을 강조함으로 예수께서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지신 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 왕의 경우 그 반대입니다. 왕이 왕의 권위와 위엄을 세울 수 있도록 그 백성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왕이 살 화려한 궁전을 건설하기 위해 각자 생업을 중지하고 오랜 세월 노역에 동원되어 일을 해야 합니다. 왕이 신하들과 먹을 진수성찬을 준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진기하고 맛난 음식들을 진상해야 합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 백성을 섬겨주십니다. 삶의 방향을 몰라 방황할 때 길과 나침반이 되는 말씀으로 섬겨주십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여러 도우미들을 보내주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심으로 도움을 주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의 짐을 대신 져주시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어두워진 우리의 마음을 십자가 보혈의 피로 대신 져주심으로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시고 다시 깨끗한 양심과 마음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십니다.

 

찬송가 369장은 이 주님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죄짐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없는 고로 복을 받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시험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겸손하시고 나의 짐을 대신 져주시는 이 주님으로 인해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가 이 주님을 나의 왕으로 영접하고 모시며 이 주님이 주시는 도움을 받아 이 거칠고 험한 세상에서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6-11절에서 마침내 예수님은 왕의 입성을 하십니다. 무리들은 그들의 겉옷을 길에 폄으로, 또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폄으로 왕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냈습니다. 또 호산나 찬양으로 예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호산나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은 동시에 찬양의 표현도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말에서 만세라는 표현이 만년을 살라, 혹은 영원하라는 의미도 되지만 축하와 찬양의 표현이 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야라는 의미입니다. 무리들은 메시야의 입성을 온 마음을 다해 환영하고 찬양하였습니다. 이러한 찬양으로 온 예루살렘 성이 마치 지진이 난듯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무슨 일인지, 이 분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이에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였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기록된 두 번째 사건에서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 성전은 헤롯이 화려하게 건축 중이었습니다. BC 20년경에 시작되어 AD 64년에 완성되었으니 무려 8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지어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어느 정도 완공되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성전의 모양은 직사각형으로 북쪽 314미터, 남쪽 280미터, 동쪽 469미터, 서쪽 485미터로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약 20%의 면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입니다. 이 성전 중앙부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고 그 주변부는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이방인의 뜰은 성전예배에 참여하기 원하는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본래 이방인의 뜰의 용도는 성소에서 향을 피우며 예배드릴 때 이곳 이방인의 뜰에서 기도로 그 예배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의 뜰은 이방인들도 와서 기도하며 성전제사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곳 이방인의 뜰을 성전제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고 파는 시장터로 바꾸었습니다. 당시 성전에 내는 속전제물의 값은 로마 화폐나 그리스의 화폐로 내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이는 그 화폐에 신성을 모독하는 형상이나 글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이 없는 두로의 화폐로 환전을 해야 했습니다. 또 제사에 필요한 짐승이나 포도주, 기름, 곡물 등을 이곳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이곳에서 판 것으로 드린 제사는 쉽게 합격을 시켜주었는데 다른 곳에서 사온 짐승이나 기타 제사 용품은 이런 저런 트집을 잡아 불합격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비싸더라도 울며 겨자먹듯 이곳에서 제사 용품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미쉬나의 한 기록을 보면 특히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제물인 비둘기를 매우 비싸게 팔아서 한 랍비가 이것을 보고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이방인의 뜰에서 행해지는 매매를 통해 엄청난 이윤이 발생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며 이러한 이윤은 종교 지도자들의 주머니에 흘러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중에서 이와같은 매매행위가 벌어지던 이방인의 뜰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방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기도해야 할 자리가 시장터처럼 된 것을 보신 예수님은 영적인 분노로 가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환전상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혼비백산한 그들을 다 성전 밖으로 쫓아내셨습니다. 이어 이사야 56:7절과 예레미야 7:11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의 중요한 기능을 제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사만 잘 드리면 되니까 그 제사를 더욱 효과적으로 드릴 수 있도록 환전상들과 제물을 매매하는 자들을 성전 뜰에 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 하셨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제사드리는 것, 곧 기도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성전에서는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번제가 드려졌습니다.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이런 아침과 저녁 번제 시간에 맞추어 기도를 하였습니다. 다니엘도 이러한 전통을 따라 번제 시간에 맞추어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제사를 드릴 때 그 제사 자체보다 제사를 드리는 자의 마음을 먼저 보십니다. 창세기에서 가인과 아벨이 함께 제사를 드렸으나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외적인 신앙행위가 눈에 보이는 것을 드리는 것이라면 기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적인 신앙행위를 받기 이전에 먼저 나의 마음을 받기 원하십니다. 기도하면서 다른 생각, 헛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요즘은 우리의 마음이 기도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심지어 예배드리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스마트폰을 보며 딴짓을 하면서 드리는 예배는 마음을 온전히 드리는 예배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하여 드림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17절에서 예수님은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성인 남자들은 3대 절기 때 의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와야 했으나 맹인과 저는 자들은 이것이 면제되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오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맹인과 저는 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여 이곳으로 나아왔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영혼들입니까. 제사장들은 이들을 귀히 여기고 이들도 기도로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도떼기 시장처럼 되버린 성전 뜰에서 이들은 기도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고쳐주심으로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접하여 주시고 기도로 성전예배에 동참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한편 이런 예수님을 보고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린아이들이 호산나 찬양하는 것을 트집잡아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시편 8:2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성취하고 계심을 증거하였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다음날 이른 아침 간밤에 베다니에 머무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는 길이었습니다. 식사를 하지 못하신 예수님은 배가 고프셨습니다. 그런데 길가에 잎사귀가 무성한 한 무화과 나무를 보셨습니다. 당시는 유월절로 양력으로 치면 4월 경이었습니다. 무화과는 본래 5월에서 6월경에 나므로 아직은 무화과가 날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화과 나무는 잎사귀가 무성하였습니다. 본래 무화과나무는 잎을 내기 전에 먼저 열매를 맺기 때문에 잎이 무성하다는 것은 열매가 있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무화과 때는 아니지만 열매가 있을 것이 크게 기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배고프신 예수님이 무슨 열매가 있을까 하여 열심히 잎사귀 사이를 뒤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무런 열매가 없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버렸습니다.

 

얼핏 이 사건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자신이 가진 능력을 다소 남용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광야에서 마귀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에도 결코 자신이 가진 능력을 남용하지 않으셨던 예수님께 왜 이렇게 하셨을까 궁금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세 번째 사건에 해당하는 이 일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구약에서 무화과 나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상징합니다. 미가서 7:1절을 보면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성전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와 같았습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화려해 보였습니다. 매년 3대 절기가 되면 수십만명의 유대인들이 전국 각지에서, 심지어 해외에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까지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수십만마리의 유월절 양들이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유대인들이 두로의 화폐로 환전하여 낸 성전세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화려한 그들의 신앙생활 안에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 열매는 구체적으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요, 기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이제 주님께서 구약의 성전 대신 새 성전을 일으키시고 새 성전을 중심으로 열매맺는 백성을 모으시겠다는 중대한 선언이었습니다.

 

20-2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제자들은 무화과나무가 즉각 마른 것에 크게 놀라 예수님께 그 연유를 여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해도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무화과 나무가 마른 연유에 대해 물었습니다. 아직 철도 아닌데 무화과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저주를 받은 연유가 무엇인지,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여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하는 대신 믿음에 대해 가르치시고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좀 이상하신 것 같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도 그렇고 제자들의 질문에 동문서답같은 답변을 하신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역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성전과 그 성전에서 눈에 보이는 제사드리는 것을 중심으로 하던 신앙 공동체가 이제는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과 보이지 않는 성전을 중심으로 예배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세워질 것을 예고하고 계십니다. 본문의 열 두 제자들은 그 새 공동체의 주역들입니다. 이러한 새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믿음입니다. 옛 공동체가 제사드리는 공동체였다면 새 공동체는 믿음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과거 어떤 사람이 유대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던 표지는 그가 3대 절기 때 생계를 중단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타 여러 중요한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리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이지 않는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생활하는 새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표지는 그가 믿음의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 기도로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습니다. 산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을 상징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기도로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냅니다. 이는 믿음의 사람은 무엇이든 불가능한 것이 없고 자기가 뜻하는 일마다 다 성공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떤 일이든지 만약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내 힘과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들이 있는 줄로 압니다. 또 큰 산처럼 나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삶의 어려움과 장애물, 고난이 있을 줄로 압니다. 이것은 내가 진정 믿음의 사람인가 확인해줄 수 있는 시금석과 같습니다. 우리의 왕되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나가면, 기도로 나가면 결코 망하지 않고 승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왕되신 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태산과 같은 삶의 장애물과 역경들을 다 들어 바다에 던져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각자가 던져버린 태산이 무엇이었는지 기쁨으로 간증하게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