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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0년 마태복음 34강 `화 있을진저`(마태복음 23:1-23)2020-11-08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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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34

 

 

화 있을진저

 

 

말씀 마태복음 23:1-23

요절 마태복음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5장에는 8복 말씀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7화 말씀인데 7화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 말이었지요? 어떻게 하면 복을 받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면 화를 받는 가를 아는 것도 역시 중요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화란 재앙, 저주를 뜻합니다. 우리가 본문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저주의 삶이 아니라 복된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1-12절 말씀의 대상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무리와 제자들입니다. 그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악영향을 분별하고 그들처럼 되지 않도록 권고하기 위함이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입니다. 모세의 자리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자리입니다. 율법선생의 자리요 성경선생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다른 말로 하면 영적 아비의 자리요, 영적 지도자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매우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자리입니다. 당시도 랍비는 매우 귀중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와 랍비가 함께 어려움에 처하면 먼저 랍비를 구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육적인 아버지는 육신의 생명만 주지만 영적인 아버지는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 중요한 자리를 어떻게 감당했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가르치기는 잘 했지만 자신들이 그것을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율법의 시행세칙을 만들어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전혀 행위를 안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행위의 한계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경건은 하나님께 보이기 위한 경건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행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말씀문구를 담은 경문상자를 이마나 손에 차고 다녔는데 그 경문을 묶는 띠를 넓게 만들었고 또한 언약백성을 뜻하는 옷술을 길게 달고 다녔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자신들이 정말 말씀을 사랑하는 경건한 자들임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좋아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윗 자리, 높은 자리 등 자리를 좋아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인사 받고,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처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높힘받는 데서 존재 의미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높힘받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랍비와 영적 아버지와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성경선생은 성령님이시고 진정한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시며 진정한 지도자는 그리스도 예수님뿐이고 모두는 같은 형제 자매이기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선생이나 영적 아버지나 지도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다른 곳에 보면 열심히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성경선생이 필요하고 영적 아버지, 지도자 역할을 하는 이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떤 자세로 그 직분을 감당하는 가입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성경선생, 영적 아버지, 영적 지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섬기는 종 곧 노예와 머슴의 자세로 이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자신을 먼지나 티끌같이 낮추면 더욱 좋습니다. 자신이 죄인의 괴수인데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직분을 감당하고 있을 뿐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3-29절은 본격적으로 7화를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7화를 당할 대상은 모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아닙니다. 그냥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화를 당한다고 되어 있지 않고 그 앞에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들은 왜 화를 당하고 어떤 화를 당하게 됩니까? 7개의 화를 내용에 따라 4개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천국 문을 닫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13-15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악한 영향력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천국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합니다. 또한 자신들만 지옥자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전도하고 제자양성하여 자신들보다 더 심한 지옥자식을 만들어 내니 심각합니다. 그들은 갈릴리 지방에 전도하러 갈 때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기도 했습니다. 또 바다 건너 이방인들도 전도하여 개종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악한 영향력을 끼쳤습니까?

 

첫째로, 삶의 본을 보이지 않음으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삶, 외식하는 삶을 살므로 사람들을 실망시켰습니다. 오늘날도 기독교인하면 말은 잘한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이기적이고 자기들만 아는 집단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삶을 통한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감동이 없을 때 사람들은 실망하게 되고 영적 소원을 잃게 되어 결과적으로 구원에서 멀어집니다.

둘째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천국의 열쇠인 예수님을 믿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므로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천국은 어떻게 들어갑니까? 천국의 열쇠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교만과 영적 무지로 예수님을 거부하고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방해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줄 수 없는 율법을 붙들고 율법의 의를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배나 지옥자식이 되게 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예수님 만나기 전 바울입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표준과 우리가 그것을 지킬 수 없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율법의 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곧 사람이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은 신기루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결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자기 불의를 깨달을 때마다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의는 성취할 수도 없지만 성취한다면 자신이 하나님이 된 것처럼 교만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기가 높아지는 것이 생의 방향이기에 항상 긴장하고 경쟁하고 비교합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경쟁자입니다. 또한 자기 의가 있기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항상 요구하는 마음, 판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깊은 긍휼이 부족합니다. 샤르트르는 희곡 <출구 없는 방>에서 지옥이란 출구 없는 방에서 서로를 괴롭히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렇게 자기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도 괴롭고 남도 괴롭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사람은 비로소 행복하고 나비처럼 자유롭습니다. 다른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인생목적이 자기에서 하나님, 그리고 이웃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났는지 자가진단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목적이 자기를 높이는 데 있는 가, 하나님을 높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있는 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근본적으로 자기 의를 추구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지옥 문을 여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면 천국 문을 여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전도의 열정도 좋지만 먼저, 예수님을 깊이 만나 하나님의 의를 깊이 덧입어 내가 먼저 천국에 들어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자기 의/자기 불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천국입니다. 자기 의/자기 불의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천국 문을 활짝 열고 사람들을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초대하는 천국전파자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둘째 분별력 없는 가르침을 베푸는 이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16-24절에서 예수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눈 먼 인도자’ ‘어리석은 맹인’ ‘맹인된 인도자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분별력 없는 가르침을 베푸는 이들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에는 은연중 물질을 중시하는 물질주의적 가르침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지만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꼭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지만 제단의 예물로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성전과 제단이 금이나 예물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모든 맹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기에 다 중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중한디! 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가 분별력 있는 성경선생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십일조 생활을 아주 철저히 했습니다. 그들은 본 수입뿐 아니라 텃밭의 채소 같은 부수입의 십일조까지 철저히 계산하여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생활에 결여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빠뜨렸다는 것입니다. 정의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긍휼은 어려운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돕는 것입니다. 믿음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의 모든 헌신을 지켜보고 계심을 믿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는 생활도 철저히 해야 하지만 우리의 삶에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빠뜨리지 않도록 말씀하셨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맹인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도다. 하루살이나 낙타나 다 율법에 부정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부정하지 않기 위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포도주에 빠진 하루살이들을 일일이 체로 걸러내었습니다. 하루살이는 사소한 부정을 뜻하고 낙타는 큼직한 부정을 뜻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사소한 것은 엄청 신경 쓰지만 정작 크고 중요한 것은 꿀꺽 삼켜 버렸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반면교사삼아 우리도 신앙생활에 있어 작은 것은 그냥 넘어가더라도 정말 크고 중요한 것은 점검하여 꼭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가운데 있는 지, 정말 나의 생활과 행위에 긍휼이 있는 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으로 하는 지, 그냥 몸으로만 하는 지를 체크해야 하겠습니다. 한 목회자는 항상 본질을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본질묵회라고 합니다. 본질이 이깁니다. 제가 본질을 중시하는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안을 깨끗이 하지 않는 이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본문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묘사하는 단어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외식입니다. 외식은 원어로 가면을 쓰고 연극하다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하는 생활을 잔과 대접의 겉만 닦고 안은 내버려두는 것에 빗대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설거지를 하는 데 그릇의 밖만 닦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번 일하게 하는 사람이니 사모님들에게 혼나고 다시는 설거지를 안 맡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굳이 그릇의 안과 밖중에 하나를 닦아야 한다면 안을 닦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대접의 밖만 닦고 안은 더럽게 나두고 그곳에 탐욕과 방탕을 가득 쌓았습니다. 원어적으로 탐욕은 주로 물질적인 것을, 방탕은 성적인 것을 말합니다. 탐욕은 분수를 넘어 지나친 욕심을 추구하는 것이요 방탕은 무절제하게 소중한 것들을 낭비하고 삶에 질서가 없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은 겉은 멋있고 긴 옷을 입고 다녔지만 속은 설거지 안한 더러운 그릇과 같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의 내면을 설거지 안한 더러운 그릇 정도가 아니라 무엇에 심각히 비유하십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화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유대인들은 부자들의 경우 굴을 파서 시체를 넣어두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평토장한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봉분이 없기에 나그네들이 지나가다가 무덤인 줄 모르고 그곳에 앉았다가 나중에 알게 되면 7일 동안 부정한 자가 됩니다. 따라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1년에 1번 평토장한 무덤위에 하얀 횟가루로 칠을 해서 무덤임을 표시했습니다. 하얀 횟가루가 칠해진 무덤은 말짱하고 빛나고 깨끗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파들어가보면 그 밑에는 죽은 시체가 있습니다. 벌레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겉은 말짱해 보였지만 속은 불법이 가득했습니다. 불법이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인데 그들의 내면에 다른 신을 섬기기, 우상숭배하기, 하나님의 이름 망령되이 일컫기, 안식일 안 지키기, 부모 공경하지 않기, 살인, 간음, 도둑질, 속임, 탐심 등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겉은 희고 빛나는 옷을 입고 다녔지만 속은 부패하고 더럽고 황폐했습니다.

 

넷째 끝내 회개치 않는 이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많은 문제를 가졌지만 회개하면 됩니다. AD 70년까지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회개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뱀들,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뱀과 독사는 물러서지 않고 독을 품고 다가옵니다. 뱀과 독사는 마귀를 상징합니다. 마귀는 알면서도 끝내 회개하지 않습니다. 마귀들처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끝내 회개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계속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십니다. 신약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에게 파송된 자들을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따라 다니며 박해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끝내 마귀 짓을 하므로 받을 심판이 무엇입니까?

 

35,3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그들은 결국 끝까지 회개치 않고 그들의 조상이 행했던 악한 짓의 부족한 분량을 채울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AD 70년의 참혹한 심판을 받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뿐 아니라 그들의 악한 영향력을 받은 예루살렘 백성들까지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를 볼 때 좋은 목자를 만나지 못한 것은 백성의 불행이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모세의 자리 곧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는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도 천국에 들어가게 하니 이보다 중요한 이슈에 관련된 사람이 얼마나 중대합니까? 이 중요한 자리를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어 받았고 우리가 이어받았습니다. 두렵고 떨립니다. 이 직분은 복의 근원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저주의 책임을 질 수도 있는 자리입니다.

이에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것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자기 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우리 중심에 모실 때 우리는 천국을 누립니다. 자기 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의만 살아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우리가 쥐꼬리만 한 자기 의를 내려놓고 우주보다 큰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님을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변화된 사도바울처럼 예수님을 깊이 만나므로 먼저, 천국을 누리고 그 천국을 전파하는 천국의 전파자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위선적인 삶을 살지 않고 내적으로 충실한 삶을 어찌하든 살아야 하겠습니다. 껍데기 인생은 자신도 비참하고 아무런 영향력도 열매도 없습니다. 우리의 경건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빙산의 구각의 경건이 따로 있어야 합니다. 코로나 기간 우리는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사는 빙산구각의 영성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주일에만 반짝하는 영성이 아니라 평일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과 동행하는 평일영성을 키우고 있습니다. 평일에는 허덕이다 주일에 가난한 심정으로 오는 것도 좋지만 평일에 단련된 영성이 주일에 빛을 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일에는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고 섬기는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경건의 모양만 있고 내면세계는 회칠한 무덤처럼 되면 우리가 섬기는 공동체, 가정, 사회와 국가는 죽은 사회,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썰렁하고 죽은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감을 가지고 경건의 능력을 기르는 종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경건은 희생처럼 보이나 사실은 내생뿐 아니라 금생에도 유익합니다. 그 삶에 능력이 있습니다. 경건을 연습하는 것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를 위해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투쟁을 했다고 말했습니다(고전 9:27). 물오리가 물밑에서 수없이 갈퀴질을 하고, 자전거가 달리기 위해 쉬지 않고 페달을 돌리듯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영적투쟁이 우리 삶속에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이시간 우리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반면교사삼아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향기 나는 목자, 진실한 목자들, 경건의 능력이 있는 성경선생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