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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요한복음 18강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1-38)2021-07-12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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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18강


서로 사랑하라


말씀 / 요한복음 13:1-38
요절 /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16장은 예수님의 죽음을 앞 둔 유언적 메시지입니다. 13장장 본문은 세족식과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주신 내용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얼마나 중요하며 왜 우리가 이 계명에 힘써 순종해야 하는 것일까요?

유월절 전 날,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 사람들이란 예수님이 마음에 두고 열심히 키운 열두 사도들을 뜻합니다. 열두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이 체포당하실 때 도망칩니다(마 26:56, 막14:50).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께 충성하겠다고 맹세하지만 모두들 자기 살기위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게중에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뜰까지 가지만, 여자 종앞에서 자기가 살고자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사도요한이 십자가 현장에 나타나지만 오십보 백보차이입니다.


이순간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실 때 잠재적 배신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의 연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 사랑이란 어느시기에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제자를 키우고 자녀들을 키우고, 누구를 사랑하다보면 상황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합니다. 힘이 되던 제자가 가장 가슴을 아프게 하는 자로 바뀝니다. 효자가 불효자가 됩니다. 꿀떨어지던 허니가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 사랑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집어 넣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 팔 기회를 노립니다. 상황은 제자들의 배신과 예수님의 수난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저녁을 먹으시다가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 즉 세상을 떠나실 것을 아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알 때 사람들이 어떻게 할까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르고 그들에게 마지막 사랑표현을 합니다. 볼에 키스를 하거나 포옹을 하면서 이별의 시간을 갖고 마지막 유언을 남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그 마지막 사랑을 표현하고자 하십니다. 왜 예수님이 식사 도중에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나 궁금해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측면에서 발을 씻어주려면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좀 드시고 하신 게 아닐까요? 혹은 제자들은 배고픔을 못 참는 사람들이고 먹어야 세족식 교훈을 말씀하실 때 말씀이 들어오기 때문에 먼저 먹도록 하지 않으셨을까요? 요 21장에서도 먼저 먹이시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흉내만 내신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씻기위해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신 다음에 한 사람 한 사람 발을 씻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이렇게 발을 닦아 주는 것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낮은 종들이 하던 일이었습니다.


순서가 시몬 베드로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것을 거부합니다. 왜 베드로가 거부했을까요? 베드로는 발을 씻기는 것은 종과 같이 낮은 자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에서 가장 높으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지금은 잘 모르지만 나중엔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시며 계속 하려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베드로가 “절대로” 안된다고 하면서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이 말은 예수님의 한 마디에 달라집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상관이 없다는 것은 서로 관계가 없다는 말인데 원어로는 너는 내 일에 몫이 없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아마 이 말이 곧 도래할 메시아 왕국에서 어떤 지분도 없다는 말로 이해를 한 것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여, 내 발뿐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다소 징그러운 부탁을 했습니다. 그는 어떻게든지 예수님과 관계가 깊어 메시야 왕국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목욕한 사람은 거듭난 사람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가룟유다를 제외하고는 주님의 말씀으로 모두 거듭났습니다(요 15:3).


이상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발은 신체에서 가장 더러운 부분중 하나로서 허물과 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예수님이 구주로서 우리 인생들의 허물을 감당하고 죄사함을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종교는 모두 인간의 의를 쌓는 것이 구원의 포인트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이 자신의 죄를 구주앞에 내놓고 씻김을 받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감당하기 위해 오셨습니다(막 2:17). 그러므로 자신의 죄와 허물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구주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즉 자신이 죄없다 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어떤 면에서 죄인이 우대받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깊이 만나려면 반드시 자신의 죄와 허물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치며 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랍비는 자신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작은 돌들을 많이 주워오도록 했고 자신이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큰 돌멩이 1-2개를 주워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원위치를 하라고 했을 때 작은 돌을 무수히 주워온 사람은 몇 개 외에는 원위치를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크기와 횟수만 다를 뿐 죄인이라는 게 맞습니다. 


죄인으로 자기를 인정하는 것은 거듭나기 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죄악된 세상에서 죽을 때까지 더러운 발문제를 가지고 삽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이 문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때문에 사도바울같은 분도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꼭 탄식할 일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다시 우리 구주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고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소망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허물진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예수님에게서 변치않는 사랑, 존재자체에 대한 사랑, 영원한 사랑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저도 여전히 더러운 발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양들과 자녀들을 감당하면서 끝까지 인내하기 힘든 마음과 분노를 통해 자기 의가 깨지고 저 자신에 대해 깊이 실망했습니다. 자기 의가 무너진 실망과 슬픔입니다. 그러나 저의 연약함과 죄악을 깊이 인정하고 주님앞에 무릎을 꿇고 죄인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언제까지나 죄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때마다 제가 저의 허물과 연약함과 죄악을 인정하고 주님앞에 더러운 발을 내밀어 주님의 영원한 사랑을 느끼고 주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발까지 정성을 다해 씻어주신 다음에 그들을 교훈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4) 동료들끼리 낮아져 섬기는 것에 비해 주와 선생이 되어 낮아져 섬기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많이 낮아져 섬겼으니 제자들도 그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동료들끼리 조금만 낮아져 섬기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높은 사람은 섬김받아야 하고 낮은 사람은 섬겨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낮아져 섬기려 하지 않고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발냄새가 나더라도 낮아지는 것이 싫어 누구도 먼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높으신 분이지만 적극적으로 낮아져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겸손과 섬김의 도리를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교훈하셨습니다. 겸손과 섬김의 도리를 모르고 억지로 낮아져 할 수없이 섬기는 사람은 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겸손과 섬김의 도리가 진정 위대하고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알고 섬기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겸손과 섬김의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높임받고 섬김받고자 하니 어디가나 괜히 허세를 부리거나 눈치를 봅니다. 대접을 못받으면 서운해하고 사람들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니 겸손과 섬김의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저주받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과 섬김의 도리를 아는 사람은 어디가나 낮아져 적극적으로 섬기는 삶을 사니 누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 지 게의치 않으며 자유롭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삽니다. 우리가 섬김받고 높임받고자 하여 슬프고 저주스런 삶을 살지 않고 적극적으로 낮아져 섬기는 자유롭고 능동적이고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발꿈치를 든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발꿈치를 든 사람은 대적하는 사람을 뜻하고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팔 사람입니다. 이것을 이야기하신 목적은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알도록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택하고 파송하는 사도들이 비록 부족하지만 얼마나 존귀한 자들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보낸 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보내신 분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을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사도들은 예수님이 보실 때 실망스러운 대상들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그동안 자신을 따랐고, 회개하고 사명을 감당할 제자들을 귀히 여기십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족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소망들이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이들이요 가장 사랑할 대상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을 팔 자에 대해 이야기하시며 괴로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중 하나가 자신을 팔 것을 구체적으로 예고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이 서로를 보며 의심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 품에 기대어있던 제자 요한에게 머리 짓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예수님 가슴에 의지하여 그가 누구인지 주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떡 한 조각을 적셔다가 주는 자가 그다 라고 말씀하신 후에 떡 한 조각을 소스에 적셔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이로서 최소한 요한과 베드로는 누가 예수님을 팔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조각을 받고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행위와 그 눈빛에서 자신을 다 꿰뚫어 보고 계신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탄이 그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사탄은 완악하고 회개하지 않으며 반발심가운데 있는 이의 심령에 들어가 그를 자신의 종 삼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에게 마지막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 회개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는 그 말씀을 듣고 어둠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지 제자중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총무로서 명절에 쓸 물건을 사라는 것인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는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중에는 유다의 내면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즉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깊이 대화하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나갈 때 예수님은 자신이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자신을 통해 영광받으셨으니 자신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피동적인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피할 수 있음에도 적극적으로 선택하신 것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잠시 더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작은 자들’이라 부르셨습니다. 이는 그들의 연약함과 그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하십니다. 요절 말씀인 3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명을 주십니다. 계명은 제자의 삶의 방향이 되는 주님의 엄중하고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주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제자 동료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구약성경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레위기 19:18절을 보면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구약교회내 백성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새계명은 신약교회구성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계명입니다. 그런데 새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 의미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이유와 동력이 전혀 새롭기 때문입니다. 옛 계명은 사랑의 이유가 율법입니다. 곧 자기, 곧 자기 의지와 힘입니다. 그런데 새 계명은 사랑의 이유와 동력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에 있습니다. 즉 내 힘과 의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배우고, 그것에 힘입어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기독교의 핵심진리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사랑을 모르면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을 모르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제자가 아닙니다. 사랑을 모르면 나의 신앙은 헛되고 인생도 헛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찌하든지 참 사랑을 배우고 사랑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계만방에 나아가 생전 처음보는 이방인들을 만나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제자공동체내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가까운 동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때 가장 가까운 동료란 서로 눈빛만 봐도 통하며, 마음이 맞아 한번 앉아 이야기했다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대화하게 되는 그런 동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동료입니까? 서로 경쟁하는 동료, 서로 높아지고자 키재기 하는 동료, 서로 꼴도 보기 싫고 판단이 되는 동료입니다. 즉 고약한 발냄새를 피워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동료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주님과의 관계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신경을 썼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과의 더 깊은 관계를 위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달라고 했고 요한은 징그럽게도 주님 품에 안겨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자 상호간에는 서로에 대한 관심이 없고 관계를 발전시키고자하는 어떤 노력도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이것도 자기애의 다른 표현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들이 장차 양들을 많이 친다고 합시다. 선교를 나간다고 합시다. 그런데 가까이 있는 동료를 사랑하지 못하고 해외선교를 나가면 주님이 그것을 기뻐하실까요? 그것은 위선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서로 사랑의 검증을 통과해야 그 사랑의 진실성이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면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양들을 사랑하는 것은 기대감도 있고 쉽고 속이 편한 반면 동료를 사랑하는 것은 부담스럽고 유익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므로 서로 사랑하려면 서로 사랑의 가치를 알아야 하고 또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양을 치는 것보다 더한 기쁨과 기대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서로사랑이 양을 치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까? 더 힘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양을 치면 내 영광이라도 드러납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는 것은 내가 사랑할수록 동료가 더 잘되니 내가 더 괴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사랑의 본질인 이타성과 희생에 가깝고 그러기에 더욱 가치가 있고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내적인 사랑의 열매를 맺으므로 귀한 것입니다. 서로사랑은 주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사랑을 위해 애쓸 때 주님께서 기적을 나타나 보일 수 있습니다. 갈 5:22절에서 사랑이 성령의 열매의 첫 번째인 것을 보면 이 열매를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며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사 그 일이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서로 사랑의 열매를 맺고자 할 때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기적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서로 사랑은 성령의 역사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서로사랑의 열매를 맺고자 할 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손과 발에 못을 박는 사이코패스같은 로마군병들을 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때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이 내 이기적이고 좁은 내면에 흘러 들어옵니다. 그때 물레방아에 물이 쌓이면 그 무게로 거대한 물레방아가 돌아가듯 주님의 크신 사랑이 내 이기심과 미움을 주저앉히고 이타적 사랑이라는 사랑의 물레방아가 돌아가게 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 마침내 내 안에 성령의 열매인 사랑이 열매맺게 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허물을 위해서 비난하지 않고 말없이 기도를 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없이 발을 닦아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기도해주셨습니다. 둘째로, 뭔가를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원수같은 자들을 위해서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전래동화에서 서로 사랑하는 형제는 밤에 보이지 않을 때 들판에 나가 자신의 곡식단을 서로의 곡식더미에 몰래 갖다 줍니다. 우리의 사랑은 보이지 않는 데서 진정성의 빛을 발합니다. 겉으로는 별문제 없는 척 하지만 뒤에서는 판단하고 비방하는 관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동료들의 허물과 연약함을 감당하며 보이지 않는 가운데 위하여 축복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서로가 잘되도록 기도의 볏단, 은밀한 섬김의 볏단 하나를 주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35) 우리가 비범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때 자신이 우선 감동을 받고, 서로서로가 놀라며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후배와 양들도 감동을 받습니다. 그럴 때 우리 공동체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우리 공동체로 사람들을 초대하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공동체가 서로 사랑을 통해 수준높은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선교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목숨을 바쳐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이런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그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십니다.


결론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유언적 명령으로 서로 사랑하도록 계명을 주셨습니다. 비범한 사랑을 함으로 감동적인 제자공동체를 만들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든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동료의 허물을 위해 진정성있게 기도해주고 또한 사랑을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의 볏단 하나 나르기 운동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