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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요한복음 21강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요한복음 16:1-33)2021-08-09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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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21 강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말씀 / 요한복음 16:1-33

요절 / 요한복음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령에 대해 직접 말씀하신 내용으로 예수님의 성령론입니다. 성령에 대해 기록된 말씀들이 있지만 본문은 성령에 대해 본질적으로 가르쳐 준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왜 성령이 오시는 것이 예수님이 계실 때보다 더 유익한지, 그리고 성령이 무엇을 하시는지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아가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구원역사를 섬길 수 있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제자들이 겪을 고난을 미리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이야기한다고 하십니다. 실족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떠난 후 박해와 어려움들이 있고, 또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제자들이 힘들어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선 제자의 삶에 박해와 고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출교, 더 나아가 순교까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의 출교는 완전히 사회, 경제적으로 고립되는 것이므로 사회적 살인과 같습니다. 나아가 육체적으로 죽이는 순교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으면 고난을 받을 수 있고 사회적으로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박해자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유대인들이 제자들을 박해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이단들을 척결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모르는 영적 무지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지금까지는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가 지금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을 미리 말씀하시면 제자들이 다 도망갈까봐 숨겨오시다가 지금에서야 솔직하게 털어놓으시는 걸까요? 그것은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그들의 보혜사가 되셔서 그들을 다 보호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제 예수님이 가시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이 하나님께로 가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감지하고 그것에 대해서 자세히 물으며 죽음을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수님에게 있어서나 자신들에게 있어서나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자세히 알면 힘들어서 알면 다칠까봐 아예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뭔가 불길함을 느꼈기 때문에 마음에 근심이 가득합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자신들의 처지와 나아갈 상황들을 생각할 때 마음이 착찹하고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떠나가는 것이 왜 제자들에게 유익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이 실상을 말한다고 하시며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비유로 설명하면 엄마가 아이에게 백원짜리 동전 열 개를 거두어가면서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어른에게 있어서도 오만원권 지폐 열 다발 곧 5천만원이 있는데 그것을 가져가 버리고 한 장의 백지 수표를 주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당장 백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실은 한 장의 백지수표가 나에게 더 유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오억이라고 쓸 수도 있고 오십억이라고 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자이신 예수님과 성령을 비교할 때 성령이 훨씬 유익하므로 예수님이 떠나고 성령이 오시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여기서 성령님의 이름은 보혜사입니다. 보혜사란 보호해주고 은혜를 베풀고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삶을 살아갈 때 필요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보호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죄에서 보호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영적사기꾼인 마귀는 하루에도 수차례 우리의 생각을 속여서 우리로 바른 길을 떠나게 합니다. 주기도문에서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기도할 때 악한 자로 칭해지는 사탄의 속임수에 속지 않고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연약한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 믿음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의 기준이 주어지면 우리는 자격미달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은혜는 연약한 사람을 용납해주는 것입니다. 냉정한 기준이 아니라 사랑으로 참아주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은혜 가운데서 강하라’고 한 것처럼 이 은혜 속에서 연약한 성도들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승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인생의 광야에서 우리가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또 그 길이 어떤 길이며 그 끝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날마다 스승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보혜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역할을 그 동안 예수님이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도 보혜사인데 성령님은 더 효과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는 다른 보혜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령님이 오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신 것만큼이나 제자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면 보혜사가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세상이라는 것은 온 세상을 말합니다. 특히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책망이라는 단어는 어떤 잘못을 꾸짖어 깨닫게 하고 교정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처럼 무지한 사람들을 꾸짖어서 깨닫게 해주고 잘못된 삶을 교정하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또 감정적으로 뉘우치게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죄에 대해서 책망하는 것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라고 말씀합니다. 곧 성령의 사역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도덕 윤리적인 것보다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정말 잘못된 것임을 알게 하고 예수님을 믿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은 예수님이 사명을 마치시고 보내신 이에게로 되돌아가는 승리의 귀환을 말합니다. 인간의 의가 한계적이고 부패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의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완전하신 하나님의 의가 되신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러한 의에 대한 깨달음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사람은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될 때 사람들은 자기 의를 쌓습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에 있어서도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다른 사람에 비해 잘 한다 하더라도 자기 의가 강하게 되면 남을 판단하거나 무시하게 되고 그로 인해 교회에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기 의의 한계를 깨닫고 죄인의 괴수로 고백하며 오직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의만을 붙들려고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또 심판에 대해서는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말씀하십니다. 세상 임금은 마귀입니다. 마귀의 통치가 십자가로 박살났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마귀의 통치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습니까? 마귀가 죄를 짓게 하고 죄의식을 심어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두렵게 하고 마귀가 우리를 다스리고 괴롭게 하여 이 세상을 지옥같이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마귀의 권세를 박살냈습니다. 마귀가 살아있긴 살아있지만 근본권세가 파해졌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십자가 앞에 나가기 때문에 죄로부터 자유합니다. 죄의 고통이 없습니다. 영생을 믿기 때문에 죽음도 부담스럽긴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심판을 받았다는 것, 우리가 근본적으로 승리했다는 것, 또 우리가 근본적으로 자유롭다는 사실을 성령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사역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해줍니다. 이러한 일들이 있으면 성령이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조롱했는데 예수님 안 믿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게 되는 것, 자기 의의 한계를 깨닫고 무릎 꿇고 십자가를 영접하는 것, 죄의식과 죽음권세로부터 지배를 받았는데 자유함과 담대함을 얻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이자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12절에서 지금 내가 이를 것이 많은데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지금 말해도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성령이 오셔서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에 지금 제자들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13절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진리의 성령이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그들을 인도하되 진리가운데로 인도하기 때문에 교사입니다. 나아가 모든 근본적인 진리와 세부적인 진리들을 깨우치면서 바른 길로 가도록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본질적인 것까지 궁금하고 알고자 하지만 모르는 그 모든 것들을 진리의 성령이 교사가 되어서 가르쳐주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복음서에서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물어보았고 예수님이 다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바로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잘 모르겠다고 말씀드리며 성령을 구할 때 성령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불 꺼진 무대에 조명을 비추면 환하게 보이듯 말씀도 잘 몰랐는데 성령이 깨우쳐주시면 놀라워하며 숨겨져 있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성령의 조명이라고 합니다. 진리는 예수님이며 또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에 대해 이해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 모두 성령의 역사입니다. 반대로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 없이 성경을 공부할 때 건조하고 힘든 성경공부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성령은 겸손하십니다. 13절에서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씀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들은 것 곧 예수님 말씀, 또한 하나님께 들은 것 곧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겸손의 영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선을 넘어 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성경에 있는 것을 가지고 그것을 잘 드러내는 일을 하십니다.

또한 성령은 장래 일을 알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장래일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성령강림, 재림, 새하늘과 새 땅을 말합니다. 성령은 ‘내가 언젠가 죽는데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지? 주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지?’ 에 대해 생각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설교할 때처럼 사람들이 책망을 받아 ‘우리가 어찌할고?’ 말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있게 합니다. 반면 눈 앞에 당장의 이익과 물질과 쾌락이 생각나고 이것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즉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증거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은 곧 예수님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의 영광이 삶에 보입니다. 예수님이 생각나고 묵상하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고 예수님을 드러내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복음역사를 주도하고 책임진다고 생각할 때 큰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말하듯이 복음역사는 성령이 주도하십니다. 성령은 자기 생각으로 꽉 차있는 사람이 깨우침을 받고 성령과 동행하는 역사를 이루게 합니다. 사도바울이 유럽을 개척할 때도 소아시아 북부를 개척하려고 했는데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고 마케도니아인의 환상을 통해서 유럽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소아시아 북부로 가는 것이 유리하고 상식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유럽으로 가도록 예수의 영이 지시할 때 대범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내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 것 자체가 성령의 역사이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성령을 우리의 교사로 잘 활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뜻을 묻고, 내 뜻을 내려놓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 성령충만의 비결입니다. 무작정 목이 터저라 기도를 하기보다 먼저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고 할 때 성령이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자기 욕심을 위해서 상대를 도구화시키고 수단화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데 성령도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 하나님의 뜻이면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자 하는 마음, 하나님의 뜻이면 내일이라도 아프리카로 가려고 하는 마음, 하나님의 뜻이면 뭐든지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우리는 현재 성령의 인도하심과 동행하심 가운데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고 세세한 것까지 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묻고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은 명백하게 존재합니다. 공기와 같이 우리가 느끼든 못 느끼든 성령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바람이 불 때는 그것을 느끼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는 강력한 바람처럼 불기도 하지만 부는 듯, 안 부드는 듯 불기도 합니다. 또 바람이 불편 바람개비가 돌고 그것을 통해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있듯이 우리 삶 속에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우리가 예민하게 느끼고 삶의 방향을 수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반면 성령에 둔감해지면 완전히 엉뚱한데로 갔다가 고생하고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방향을 잘 분별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제시하는 사람이 가정마다 그리고 교회마다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을 정도로 성령은 마치 공기처럼 우리와 인격적으로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인정하면 우리 안에서 강하게 역사하시며 영광받으시고 우리가 무시하면 없는 것처럼 계시다가 또 다시 인정하면 강력한 태풍처럼 나의 삶을 인도해가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신경써야 하는 것은 성령의 충만입니다. 불신자는 성령이 임하도록 기도해야 하지만 신자는 성령이 충만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운동선수들이 보이지 않는 데서도 자기를 관리하여 좋은 성적을 유지하듯이 성령 충만을 관리하는 것은 무시하기 쉽지만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16-19절을 보십시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에서 조금 있으면 일어날 사건에 대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보기도 하고 성령 강림으로 보기도 하는데 성령 강림으로 보면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을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성령이 하시는 모든 일이 예수님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성령 강림이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승천은 무척 아쉽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성령의 오심은 우리에게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는 일입니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바로 성령강림의 기쁨입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성령이 우리와 동행하시고 성령이 우리에게 충만한 것보다 더한 기쁨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보다 더한 기쁨이 혹시 있는 사람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먹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라거나 여행가는 것보다 더한 기쁨은 없다거나 올림픽 보는 것보다 더한 기쁨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내 안에 최고의 기쁨은 내 안에 성령이 계시고 성령의 뜻을 따라서 행하고 성령과 동행하는 기쁨입니다.


성령의 오심으로 주어지는 두 번째 기쁨은 하나님께 직접 구하는 기쁨입니다. 24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우리가 직접 구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매우 친밀해져서 우리가 직접 아버지께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 직접 구할 수 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응답하시는 기쁨은 예수님의 죽음과 승천을 통해서 주어진 정말이지 큰 특권이고 기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전과 달리 현재 기도 생활과 응답으로 인한 충만한 기쁨을 많이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15장에서 “너희 열매가 항상 있어서” 라고 말씀하며 예수님은 기도생활의 현재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곧 우리가 현재 기도하는 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충만할 수 있고 또 항상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기도생활에 대해 돌아보고 주님께 나아가서 구하는 생활을 잘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구한다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이익입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구할 수도 있고 그것이 어려울 때는 집이나 직장에서도 가능한 방식으로 얼마든지 구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노트를 쓰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내가 필요한 것들 혹은 애매한 것들에 대해서 구하고, 또 일 년이나 십 년을 바라보며 구할 수 있습니다. 기도한 것을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체크해보고 또다시 새로운 것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하나님께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렇게 구하는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구하는 기쁨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25-28절에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하지 않고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현재가 명확하게 이야기해야 할 때이며, 앞으로 성령이 오셔서 계시가 활짝 열려 하나님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그 날에는 너희가 직접 구하며 내가 너희를 위해 구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은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직접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만큼 우리를 친밀하게 사랑하십니다. 예수님 승천 이후의 자립신앙의 핵심은 기도생활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고 또 우리의 필요를 채움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립적인 신앙생활을 원하시며 그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애매한 것이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도 시행착오나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평안하라고 말씀하시고 환란을 당하지만 담대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기 때문에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도록 권면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셔서 영생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무엇도 두려워할 것이 없고 담대한 삶을 살면 됩니다. 또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지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때가 있고 이해를 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깊이를 더해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오시고 제자들은 보이지 않는 성령을 의지하여 고군분투하며 자립적으로 기도하며 구하고 인도하심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결코 쉽지 않지만 제자들은 이를 통해 자립적인 믿음의 사람들로 성장하게 됩니다.

저는 최근 아이가 새롭게 폐관련 부작용에 대한 치료를 시작한 것으로 인해 낙심하고 마음이 아프고 또 걱정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질병을 진단 받은 지로부터 3년이 넘는 시간 이 흘렀음에도 현재적으로 또한 앞으로도 주어질 수도 있는 어려운 상황들을 참고 견뎌내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이의 치료의 방향과 아이를 위해 기도할 때 제게 적절한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상황들을 통해 주님의 도우심을 느끼게 하시고 분명한 방향을 얻게 하시고 평안과 확신을 덧입게 하셨습니다. 매일 기도하며 또 매 순간 순간 기도하며 구하는 기쁨을 얻고 어려운 상황을 이겨나가게 하심을 보게 됩니다. 성령이 도우실 때 우리 의 인생의 여정에 큰 일도 작고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태산 같이 어려운 문제도 성령이 함께 하시면 가볍고 여유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문제의 크기보다 성령충만의 정도가 더 중요합니다. 제가 성령 충만하여 자녀문제를 감당하고 한성대 영혼구원과 제자양성 역사를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의 교사이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과 그 말씀에 대해서 그리고 말씀을 따라가는 삶의 작은 부분까지 가르쳐주시고 우리의 스승이 되셔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구름기둥, 불기둥처럼 의지하는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삶 속에서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성령 충만을 허락해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