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추수감사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말씀/ 시편 65:1-13
요절/ 시편 65:11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오늘 본문의 시는 다윗이 지은 감사의 시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심령에도 다윗의 마음에 임했던 감사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시온은 하나님의 성전이 위치한 언덕입니다. 오늘날 우리 관점에서 본다면 교회 혹은 예배드리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서원을 주께 이행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생 일대에 한 번이나 두 번 있을까 말까 한 큰 서원을 말한다기보다는 일상적으로 주님께 드리는 서원을 의미합니다. 곧 일상에서 감사한 일이 있으면 주님께 그 감사의 표현으로 예물을 드리겠다는 서원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매주 드리는 감사헌금에 가깝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절기를 중심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시인은 그러한 절기가 오기 훨씬 전부터 벌써 그 절기 때 부를 찬양이 시인의 가슴 속에서 막 터져 나왔습니다. 급기가 그 찬양은 시인의 마음을 떠나 시온 성에 미리 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시인의 마음을 묵상하면서 과거 제가 군에서 복무할 때가 생각났습니다. 당시 주중에 목포에 있는 군부대에서 복무하고 주말이면 서울에 올라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군에서 나이가 두살 세살 어린 고참들에게 머리를 땅바닥에 박고 앞으로 전진, 뒤로 후진, 제자리에서 360도 돌기 등의 고된 기합을 받고 온갖 욕설을들으며 거친 훈련을 받다가 주말이 되어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오르면 벌써 제 마음이 설레이기 시작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어 찬송가를 부르면 제 마음은 천군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 때를 추억하며 그러한 설레임이 많이 사라지고 일상적으로 예배드리는 자신이 얼마나 타락했는지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각자도 본문의 시인처럼 주님께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시간을 설레이며 기다린 기억이 있을 줄로 압니다. 늘 그러한 마음을 간직하며 주님께 예배로 나아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예배드릴 때 빈손으로 오지 않고 적은 액수라도 늘 감사의 예물을 들고 나아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며 광야에서 고난받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그의 기도제목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곧 그의 생명을 살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사울이 그를 잡으러 왔을 때였습니다. 다윗이 이쪽 산에 있을 때 사울은 바로 그 옆 산에 올라갔습니다. 산 하나 차이로 다윗은 생명을 건졌습니다. 또 한 번은 다윗이 동굴에 숨어있었는데 사울이 바로 그 동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사울의 뒤를 따르는 용사들에게 잡히면 다윗의 삶은 그 자리에서 마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가만히 제 자리에 앉더니 화장실 용무를 보는 것이아닙니까! 사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는 단지 화장실 용무를 보기 위해 굴로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이와같이 다윗은 삶과 죽음이 한 발자국 차이인 광야 도피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죽음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청년들의 삶도 다윗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온갖 시험과 시련이 청년의 삶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한 시험과 시련으로 인해 죽을 것처럼 두렵습니다. 시험과 시련 자체도 문제이지만 그로 인해 내면의 두려움과 낙심, 절망이 더 큰 문제입니다. 내면의 두려움과 낙심, 절망은 마치 쓰나미처럼 청년들의 마음을 엄습합니다. 그 속에 매몰되어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때에 주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모든 두려움과 낙심, 절망으로부터 청년들을 지켜주셨습니다. 다시 일어나 나가 싸울 새 힘을 주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시인은 죄가 나를 이겼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소년 시절 다윗은 거인 골리앗과 맞서 싸울 정도로 용맹한 장수였습니다. 키가 3미터에 육박한 거인 골리앗이 그의 앞에 나올 때 마치 코끼리가 움직일 때처럼 땅이 진동했습니다. 그가 고함을 지를 때면 맹수가 포효하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년 다윗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평소 익숙한 물맷돌을 들고 달려가 그의 유일한 약점인 이마를 향해 날렸습니다. 그가 쿵 하고 쓰러지자 그의 칼집에서 칼을 빼어 단칼에 목을 쳤습니다. 이런 다윗이 죄의 유혹과 시험 앞에서는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용사들이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있을 때 그는 하루종일 낮잠을 잤습니다. 저녁이 되어 침상에서 일어난 그는 우연히 왕궁 옥상에서 한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여인을 불러 간음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여인은 아이를 잉태하였다고 알려왔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전쟁터에 있던 그녀의 남편에게 특별 휴가를 주었습니다. 그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니라 특별 휴가를 온 남편의 아이라고 주장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전쟁터에서 고생하고 있는 동료들과 상관을 생각할 때 집에서 편히 쉴 수 없다며 왕궁 옆에서 야전침대를 펴고 잤습니다. 다윗은 이런 충신을 계략을 써서 가장 위험한 전투에 보내 죽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과부가 된 여인을 자기 아내로 맞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에게 선지자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에게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고 하였습니다. 그 부자에게는 여러 양떼와 소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옆집에 양 한 마리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의 양의 빼앗아 그 양으로 손님을 섬겼습니다. 다윗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거실화임?” 이라고 말하며 그 부자가 당장 4배가 갚아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선지자는 그 부자가 바로 당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다윗은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완벽하게 은폐하여 아무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 그의 죄를 하나님께 다 알고 계시고 이제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그 죄를 적발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그는 이 죄로 인해 깊은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시편 32편을 보면 그가 죄로 인해 당한 마음의 고통과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이제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그가 입을 열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도록 도우십니다. 이때 다윗은 자기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회개를 받으시고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을 때 다윗은 죄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체험하였습니다. 죄로 인해 시름시름 죽어가던 그의 영혼이 다시 소생하게 되었습니다. 사냥꾼의 올무에 걸려 새장에 갇힘으로 고통하던 새가 다시 풀려나 창공을 비행하는 것처럼 그의 영혼이 자유와 기쁨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죄에게 완전히 져서 패배한 아픔들이 있습니다. 요즘 SNS 세계를 보면 뭔가 한 가지 약점과 단점, 죄문제가 발각된 사람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맹수처럼 달려들어 그 한 사람을 완전히 짓밟아 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공격을 당한 사람을 추후 검색해보면 지금까지 잘했던 것들에 대한 기록은 완전히 뒤로 밀려나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 한 가지 잘못한 것에 대한 온갖 조롱의 글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우리들도 그러합니다. 어느 순간 내가 죄에게 졌던 그 기록에 대한 세세한 내용이 온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우리는 완전히 매장당하게 됩니다. 백주대낮에 발가벗겨진 사람처럼, 맹수에게 뜯겨 뼈조차 남지 못한 자처럼 비참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의 그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억 창고에서 그 죄에 대한 기록을 완전히 삭제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죄사함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새록새록 다가오게 됩니다. 우리가 삶의 여러 고난이 있을지라도 죄사함의 은혜 이 한 가지만 생각해도 마음에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인은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한 여인이 한 남자를 사랑하여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남자가 인격과 신앙면에서 너무 훌륭하여 늘 배우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너무 훌륭한 나머지 어떤 선한 사업을 함으로 경제적으로 여자를 고생하도록 하였습니다. 여자는 이 남자와 살면서 고생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남편이 너무 훌륭하여 존경하고 사랑함으로 고생이 하나도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고생을 통해 더욱 남편을 깊이있게 알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 넘쳤습니다. 본문에서 시인의 마음이 바로 이 여인의 마음과 같습니다. 시인은 주님을 너무 사랑하여 주님 한 분만으로 온전히 만족하였습니다. 주님외에 다른 것이 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계시면 그곳이 곧 천국이었습니다.
5-7절을 보십시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시인은 그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분이신가를 고백하고 찬양합니다.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주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육체가 이 구원의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엄위하신 일이란 “awesome deeds(NIV)”로 모든 경이로운 일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힘이 얼마나 세신가 하면 산을 세우십니다. 히말라야에 있는 에베레스트산을 비롯한 그 모든 산들을 주님께서 세우셨습니다. 권능으로 띠를 띠시고 바다를 제어하십니다. 바다가 제어되지 않으면 한 순간에 서울이 물바다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손으로 바다를 제어하고 계심으로 우리가 평안한 가운데 지금 이 시간 추수감사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김정은의 마음도 제어하고 계십니다. 그가 어느 순간 제어가 안되어서 핵 스위치를 삑 누르면 한 순간에 한반도에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제어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이 이와같이 힘이 세시므로 우리는 안심하고 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땅 끝에 사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님은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 알람을 봅니다. 스마트폰으로 일기예보를 보고 미세먼지 정보, 하루 스케쥴표를 확인합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창문을 열어 아침이 되는 것을 보십시오. 저 동산 위로 태양이 떠 오르는 것을 보십시오. 아침되는 것을 기뻐하며 환영하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이 얼마나 경이롭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하루를 나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기쁘고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면 생명이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습니다. 우리 인체에는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현대과학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합니다. 시력을 잃은 사람의 경우 현대 과학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눈을 완벽하게 대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겨우 희미한 형태를 알아보는 정도에 불과하고 그것을 제조하는 데에천문학적인 비용이 듭니다. 공기를 코로 마셔서 폐를 통해 온 몸으로 공기를 전달하는 기능은 인간이 결코 만들어낼 수 없고 음식물을 소화하고 노폐물을 걸러내는 장치를 인간이 완벽하게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중국에서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작은 인공태양을 만들어냈다고 하는데 하늘에 떠 있는 저 태양을대신할 수 있는 인공태양을 만들어내고 그 운영비용을 돈으로 댄다면 정말 지구에 있는 땅을 다 팔아도 단 하루를 운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온 지구를 뒤덮고 있는 이 공기를 다 돈으로 만들어내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요? 물도 마찬가지이고 온갖 음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아침이 되게 하심으로 이 모든 것을 아무 값없이, 무료로, 은혜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별로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아침이 됨으로 즐겁고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감사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갑자기시력을 잃은 사람, 인공호흡기를 달지 않으면 호흡을 할 수 없는 사람, 신장투석을 하지 않으면 노폐물을 배출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인공호흡기를 통해서라도 호흡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사합니다. 신장투석을 통해서라도 노폐물을 배출 수 있다는 사실을 감사합니다.
또한 저녁이 됨으로 감사합니다. 저녁이 되어 평안한 안식과 쉼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또한 하나님께서 평안하게 안식할 수 있도록 하늘의 불을 꺼주시고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을 켜심으로 더욱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하심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람들은 인간이 만든 현대문명과 기계문명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감사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 하나 잃어버릴 때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시력을 잃고서야 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건강을 잃고서야 건강했던 것을 감사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상을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하나님은 또한 땅을 돌보셨습니다. 돌보셨다는 것은 원문상 방문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차가운 공기가 아직 가득한 새벽 친히 땅에 심방을 오셨습니다. 온 대지를 이슬로 촉촉히 적셔 주셨습니다. 또 비가 가장 필요한 때에 비를 내려주심으로 땅을 윤택하게 하시고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셔서 그 강물이 땅에 흘러들도록 하셨습니다. 또 농부가 씨를 뿌릴 때그 씨에서 싹이 나게 하시고 따스한 햇빛을 비추어 주심으로 그 싹이 잘 자라게 하셨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 한 해의 농사는 농부의 수고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일하심으로 그 농사가 잘 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감사를 가르치는 방법 중 식사에 대한 감사를 중요한 예로 든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한 끼 식사로 빵을 먹는다고 생각할 때, 그 빵이 나오기까지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농작물을 가꾸고 타작을 하고 밀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 반죽을 하기까지 무려 15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그런 수고 후에 식사 한 끼를 할수 있으니 감사 기도를 드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식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 더하여 본문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빵이 나오기까지 매일 새벽이슬을 맞으며 밭으로 심방오시고 하늘 수도꼭지를 여사 비를 오게 하시는 수고를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떤 분이 연구를 하였는데 식사하기 전에 두 손을 모아 감사한 마음을 갖고 식사한 사람은 맥박이 고르게 되고 위장의 활동이 좋아져 소화력이 증진되며 삶의 활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지만 식사 전에 “이따다끼마스” 하고 두 손을 모아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일본인의 경우 보기에도 좋고 그것이일본인의 인성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식사 전 기도를 다소 형식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나는 하루 세번 기도하는데 식사 전 기도라고 농담하면서 식사 전 감사기도를 다소 폄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식사 전 이 음식이 나오기까지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모든 수고를 감당한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예의이고 또 중요한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식사 전 감사기도를 진실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잘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본 구절을 볼 때 시인이 본 시를 노래했을 때가 아마도 한 해의농사가 끝나는 추수감사의 때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농사력의 기준으로 볼 때 추수감사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때입니다. 모든 농사를 다 마치고 돌아보니 시인은 주님께서 지난 한 해를 은택으로 관 씌우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난 1년간 삶의 발자취를 돌아보니 기름 방울이 떨어졌습니다. 들의 초장에도, 삶의 구석구석 주님의 은총과 은혜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작은 산들은 기쁨을 띠를 띠었고 초장은 가득한 양 떼로 마치 흰 옷을 입은 것 같았습니다. 골짜기는 곡식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11월 셋째 주에 추수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이는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에 온 것으로부터 그 기원이 시작됩니다. 1620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 날, 117일간의 험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을 때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146명 중 봄이 되기 전 44명이 영양실조와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토양이 다른 신대륙에서 자라지 못하여 첫 농사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에 모두가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때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종류의 씨앗을 가져다주었고 재배기술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을 처음으로 추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열었습니다.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하여 추수감사절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11월 셋째 주에 추수 감사절을 지키게 된 기원입니다.
생각해보면 청교도들은 모든 것이 안정되고 풍요로운 가운데 감사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동료들이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어가던 중에 첫 열매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또 대다수의 원주민 인디언들이 적대적인 가운데 그들에게 호의적인 인디언들을 보내주시고 도움을 받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감사함을 잊지 않기 위해 매년 이 때 추수감사 절기를 갖고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볼 때 여러가지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있었기에 그러한 어려움을 다 이기고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때로는 주일 말씀을 통해, 때로는 양식 말씀을 통해, 때로는 동역자가 한 말을 통해 나의 마음에 말씀의 기름이 떨어지게 하시고 은혜의 강물이 흐르게 하셨습니다. 나는 모르고 지나갔지만 주님께서 그 날개그늘로 나를 비밀한 가운데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스마트폰을 쳐다보며 길을 가는데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교통사고로부터 지켜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또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내 몸에 매우 위험한 세균이 침입한 적도 있었 주님께서 도우심으로 나의 건강을 지켜 주셨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행복은 감사와 비례합니다. 감사한만큼 행복합니다. 사람들은 통장에 들어있는 잔고만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머리 속에 들어있는 지식의 크기만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인간조건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행복은 감사한 마음과 비례합니다.
감사는 저절로 생기는 감정이 아닙니다. 감사는 배우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감사를 어려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아주 어려서부터 감사훈련을 시켰습니다. 식사 전에 반드시 감사기도를 하도록 하였고 절기 때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떡을 떼도록 훈련하였습니다. 감사를 가장 잘배울 수 있는 길은 감사를 잘 하는 사람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훌륭한 감사의 사람은 요셉입니다. 그는 삶을 조각조각으로 보지 않고 전체로 보았습니다. 그의 삶의 조각조각은 고난과 오해와 감옥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체로 보았을 때 하나님이 주신 꿈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그랬을 때 순간순간 미워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니엘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포로로 잡혀간 고난의 때에 무엇을 구하기 전에 먼저 감사하였습니다. 심지어 감사하면 목숨을 잃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감사하였습니다. 그는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게 여겼습니다. 그는참으로 위대한 감사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의 마음에는 행복이 가득했음이 틀림없습니다. 또한 우리 예수님도 위대한 감사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떡을 떼시기 전 늘 감사기도하셨습니다. 또 고라신과 벳세다의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을 때, 곧 전도에 실패하셨을 때에도 소수의 어린아이같은 사람들이복음을 영접한 것을 인해 감사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훌륭한 감사의 본을 보여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 병마 앞에서도 감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삶의 지극히 작고 사소한 부분에서 깊은 감사를 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분들을 보며 배울 때 우리도 위대한 감사의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감사를 배워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비유하자면 악기를 뛰어나게 다루는 사람과 같습니다. 최고의 피아니스트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피아노 한 대만 있으면 모든 청중을 감동시키는 음악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감사를 잘 배워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마음의 악기를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과 같습니다. 그에게 있어 어려운 상황은 연주하기 어려운 악보와 같습니다.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악보가 어렵다고 연주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보가 어려울수록 특별한 울림이 있습니다. 이와같이 뛰어난 감사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어려운 상황 가운데 더욱 특별한 울림을 주는 감사의 연주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감사는 하늘 보좌 곁에 서 있는 천군천사들의 마음에도,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마음에도 깊은 울림과 감동을 줍니다. 또한 감사하는 본인 자신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감사를 잘 배워 하늘 보좌에 울림을 주는 위대한 감사의 사람들이 다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