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7강 여호와 보시기에 말씀 열왕기상 14:21-16:34 요절 열왕기상 15:4,5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야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오늘 본문에는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9명의 왕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3명은 남유다 왕들이고 6명은 북이스라엘 왕들입니다. 남유다 왕과 북이스라엘 왕들의 숫자가 다른 것은 북이스라엘 왕들은 2배쯤 단명했기 때문입니다. 남북 왕조의 차이는 남북한의 차이만큼이 큽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 까요?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형통과 승리의 가장 중요한 비결을 배우고자 합니다. 이시간 우리가 “여호와 앞에 사는 것”의 중요성을 배우고 하나님 앞에 살고자 소원하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 번째로 소개된 왕은 남유다 첫 번째 왕인 르호보암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 왕이 되었으니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사십일세라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서 택하신 성읍 예루살렘에서 십칠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사람이더라. 그의 소개에서 강조된 것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성읍에서 다스린 것 곧 그의 특권과 막중한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왕은 거룩한 제사장 나라를 만들어 세계를 섬길 책임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강조된 것은 그의 어머니가 이방여인이고 특별히 암몬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1장을 보면 솔로몬이 따른 우상중에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이 있었습니다. 밀곰은 몰록과도 같은 데 인신제사를 요구하는 암몬의 신입니다. 솔로몬은 르호보암의 엄마를 위해 예루살렘 앞산에 밀곰 산당을 지어주었습니다. 열왕기서 저자는 르호보암의 어머니가 암몬 사람 나아마였음을 그의 소개와 그의 삶의 끝에 두 번이나 언급하므로 어머니의 악영향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영향은 크고 중요합니다. 모세는 어머니가 젖떼기 까지 키운 것이 그의 신앙과 정체성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참으로 정욕을 주체할 수 없어 평생 방탕하게 살 수 있었지만 어머니의 기도와 권면으로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경선생중 한 분이 되었습니다. 우리 2세들은 어머니가 믿음과 기도의 어머니인 것들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으니 르호보암 때 유다왕국은 지금까지 어떤 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노엽게 했습니다. 유다 왕국은 전국적으로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으로 채워졌습니다. 24절을 볼 때 그 땅에 남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여색이라는 것은 남자가 여자를 성적 대상으로 삼는 것이고 남색은 남자가 남자를 성적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곧 동성애자들을 말합니다(KJV). 동성애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동성애를 은밀하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나게 추구하는 이들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유다 사람들은 세계만민을 선도해야 할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앞에서 쫒아낸 국민들의 가증한 행동을 본받아 행했습니다. 25절을 보면 르호보암 재위 5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습니다. 그래서 성전과 왕궁의 모든 보물들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특별히 솔로몬 왕이 만든 왕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금 방패를 다 빼앗아 갔습니다. 그래서 그 후 르호보암은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시위대들이 그것을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역대기를 보면 애굽 왕의 침입은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르호보암의 기사에서 르호보암 보다는 유다왕국의 죄와 그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왕국의 영적 타락에 대해서 르호보암은 자유로울 까요? 아닙니다. 지도자는 공동체의 상태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도자가 공동체성원들을 탓하면 누워서 침 뱉기입니다. 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의 외적인 모습만 배워서 건축사업을 많이 하여 나라를 강하고 영광스럽게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위에 나라를 세우지 않고 우상숭배에 방치했을 때 결국 그의 나라는 초라한 놋방패의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왕은 유다의 두 번째 왕 아비얌입니다. 르호보암이 58세로 죽고 그의 아들 아비얌이 유다 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 아비얌은 ‘나의 아버지는 얌이시다’ 란 뜻인데 얌은 바다신의 이름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그는 예루살렘에서 삼년 밖에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마아가로서 아비살롬의 딸이었습니다. 그는 아사에게도 어머니로 불리는 데 아비얌의 어머니고 아사에게는 법적 어머니고 실제는 할머니인 사람입니다. 아비얌은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였고 그의 마음은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버지가 행한 못된 것을 꼭 답습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못된 것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랑 다르게 살아야 겠다 생각하고 아버지를 반면교사 삼아 바르게 성장한 이들도 있습니다. 또 아버지가 문제가 있으면 작은 아버지를 배우든지, 조상 중에 위대한 분들을 배우면 됩니다. 심지어 자기 조상 중에 그런 사람이 없으면 남의 조상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 중에 좋은 분을 배우면 됩니다. 하지만 아비얌은 아버지의 영적으로 안 좋은 것을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이런 아비얌은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들처럼 죽임을 당하고 다윗왕조는 그 대에서 단절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그에게 후손을 주시고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4,5절을 읽겠습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야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은 다윗을 생각하시고 다윗 때문에 다윗을 위하여 아비얌에게 좋은 아들을 허락하사 그를 통해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다윗 때문에 아비얌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다윗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셨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을 지극히 기쁘게 하였을 때 만민이 그의 은혜를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시고 우리 죄인들을 용서해 주십니다. 이런 면에서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까? 첫째로 다윗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습니다.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의 일외에는 평생에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삶을 살았습니다. 정직히 행한다는 것은 거짓되게 행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거짓되게 행동합니까? 그것은 사람 앞에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은 정직하게 삽니다. 그래서 서구 국가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정직을 지도자의 최고의 덕목 중 하나로 꼽습니다. 왜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을 기뻐하실까요? 그 이유는 정직이 단지 도덕적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그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가장 실망하신 것은 헷 사람 우리아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그렇게 실망하셨는지 그 포인트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무엘하 12:10a절.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는 즉” 다윗은 사람들만 속이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하나님을 투명인간 취급했습니다. 투명인간 취급하다는 것이 어떤 존재를 업신여긴다는 뜻이죠?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상 2:30b 입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나님을 경멸히 여긴 엘리 제사장과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 직을 상실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그 앞에서 산 한나와 사무엘은 높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요셉을 기뻐하셨습니까?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방 땅에서 내가 어떻게 살든 하나님이 아시겠어? 하며 아무렇게나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노예였으나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걸레질을 한번 해도 하나님 앞에서, 바닥을 쓸어도 하나님 앞에서, 심부름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 했습니다. 이런 그를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그가 비록 이방 땅에서 노예였지만 그를 놀랍게 축복하사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시고 세속사와 구속사에 그를 귀히 쓰셨습니다.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많은 것을 못해도, 똑똑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한 가지만 잘하면 됩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자신의 삶의 두 개의 모토중 첫 번째가 바로 “In the sight of God”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이었습니다. 우리가 나를 보고 계신 하나님 앞에서 마음씀씀이 하나, 눈동자 한번에도 경외심과 정직함을 가지고 행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다윗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어떤 명령에도 순종하였습니다. 골리앗에게 나아가 싸우라 하시면 모든 사람이 몸을 사리고 있더라도 앞장 서 나아갔습니다. 사울을 죽이라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종이라는 것 때문에 그를 치지 않았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을 때 감히 왕을 책망한다고 그를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많은 물질을 얻었을 때는 탐심부리지 않고 그것을 다 여호와의 곳간에 들였습니다. 또한 나이가 늙었을 때 쾌락과 안일로 인생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예배에 대한 관심을 갖고 예배의식을 정비하였습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위로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 명령에 순종하여 물위에 발을 내딛고 물위를 걷습니다(마 14:29). 베드로는 물위를 걷는 남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무엇이든지 그대로 순종하고자 했습니다. 그 명령이 자신의 일시적인 낮아짐과 고통과 위험을 가져온다고 해도 그는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며 그 모든 명령대로 산 다윗을 기뻐하사 그의 왕국을 지켜주시고 계속 후대 왕들을 세워주시고 그의 왕국을 견고하게 해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다윗도 완벽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고 모든 명령을 다 준행한 것은 아니고 헷 사람 우리야의 일이 있었기에 그의 삶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유다의 세 번째 왕인 아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아사는 고조할아버지 다윗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한 일들이 무엇입니까? 12,13절을 보십시오.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쫒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또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 남색하는 자들이 쫒아낼 때 그들이 인권을 존중해달라고 요청했을 수도 있습니다. 조상들의 우상숭배를 없애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만큼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한 태후였던 할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런 우상숭배를 할 때 대왕대비마마인 할머니와 맞서는 일은 얼마나 위험합니까? 그런데 아사는 할머니의 태후의 위를 폐하면서까지 우상척결 작업을 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수행하면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 까요? 용기였을 것입니다. 용기란 무엇입니까? 두렴 없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가장 두려울까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용기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보다 하나님의 눈을 더 무서워하고 의식하는 것입니다. 아사는 평생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한계는 무엇이었습니까? 왕국 곳곳에 삶의 구석에 터 잡고 있는 산당까지 없애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오점은 말년에 하나님보다 강대국 아람을 의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전에 드렸던 금은을 모두 아람 왕 벤하닷에게 바치며 북이스라엘을 압박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의 불신에 기초한 외교 전략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늘그막에 그에게 발병이 나게 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버리고 강대국을 찾아 마당발을 굴렸기 때문이 아닌 가 생각합니다. 이제 남유다 왕들과 같은 시기에 살았던 북이스라엘 왕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북이스라엘 2대 왕이었던 나답이 언급되는 데 그는 2년 밖에 통치하지 못했습니다. 그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아버지 여로보암이 간 길로 갔습니다. 그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깁브돈은 애굽과 수리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나답이 단 지파에 배정되었으나 블레셋이 소유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 깁브돈 을 공략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답이 이곳을 뺏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바아사란 자가 내부반역을 일으켰고 바아사는 나답뿐 아니라 여로보암의 전 가문을 멸하였습니다. 여로보암의 가문은 정말 선지자 아히야에게 주셨던 말씀과 같이 그대로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야심차게 북왕조를 시작했지만 위장된 자기숭배, 혼합주의의 길을 가므로 2대를 가지 못하고 가문자체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바아사는 북왕조 세 번째 왕이자, 바아사 왕조의 시조입니다. 그는 디르사에서 왕이 되어 22년간 통치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여로보암의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 예후에게 임하여 바아사를 꾸짖었습니다. 16:2a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티끌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티끌이란 보잘 것 없는 것의 대명사입니다. 우리는 티끌, 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루아침에 티끌로 되돌려 보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바아사의 가문도 여로보암의 가문처럼 만드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정확히 바아사의 아들 엘라 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엘라는 통치 2년 만에 왕궁 맡은 자 아르사의 사저에서 술을 마시다가 전차부대 절반을 통솔하는 시므리 장군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바아사 왕조는 선지자 예후의 말처럼 시므리 장군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하였습니다. 시므리 장군의 군사쿠테타는 7일 천하로 끝났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다시 블레셋 깁브돈을 공략하고 있는데 시므리의 반역소식을 듣고 군대는 군사령관인 오므리 장군을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오므리 장군은 잠시 깁브돈 공략을 접고 수도 디르사로 돌아와 성읍을 공격하였습니다. 성읍이 함락되는 것을 본 시므리는 왕궁요새에 들어가 왕궁에 불을 지르고 불 가운데에서 죽었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도무지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오므리는 북왕조 다섯 번 째 왕으로 오므리 왕가의 창시자입니다. 그의 후손은 아합 – 아하시야 – 요람으로 4대나 지속되어 북이스라엘에서는 제일 긴 왕조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므리는 세상에서는 꽤 성공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경쟁자인 디브니를 물리쳤고 사마리아 수도 천도를 이루었습니다. 사람들보기에, 세상정치사에서 그는 행운아요 성공한 군사혁명의 주도자로 자기 관리를 잘하여 모반도 받지 않고 4대나 정권을 물려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는 악을 행하는 자요, 그 전에 모든 사람보다 더 악을 행한 자에 불과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보는 가 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누구인가 가가 가장 중요한 평가이며 최종적인 나의 가치입니다. 그가 죽고 그의 아들 아합이 북이스라엘 6대 왕이요 오므리 왕조의 두 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22년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내, 딸입니다. 그동안은 어머니가 누구인가가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아합의 경우는 아내가 누구인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시돈 사람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였는데 이세벨의 아버지는 철저한 바알숭배자였고 그 딸 이세벨도 그에 못지않는 여인이었습니다. 아합은 유약하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잘 받는 사람인데 이세벨에 의해 바알숭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본문에 나온 모든 북이스라엘 왕들보다 뛰어나게 하나님을 격분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여로보암의 길을 넘어서 완전한 우상숭배의 길을 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히엘이라는 사람은 아마도 아합의 명령으로 여리고 성을 재건 하다가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대로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는 첫째 아들을 잃었을 때 재건을 멈추었어야 하는데 고집스럽게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강행하다가 둘째 아들도 잃었습니다. 여기서 500년이 지났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실현된 것을 통해서 2000년이 지난 예수님의 재림말씀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게 됩니다. 이상에서 남왕조와 북왕조는 같은 팔레스타인에 사는데 많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의 길을 걸은 북이스라엘 왕들은 왕조가 단명하였고 왕들의 재위기간도 짧습니다. 무엇보다 반역과 비극적인 죽음이 많습니다. 이것은 남쪽의 다윗왕조와 달리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시며 돌봐주시고 인도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윗왕조는 하나님이 보우하사 왕들의 안위를 지켜주시며 왕조가 단절되지 않도록 하시고 선왕들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왔습니까? 남왕조는 다윗보유국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한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을 때 그의 영향력으로 유다왕국은 약 4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그의 후손가운데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왕국은 영원한 왕국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은 당대뿐 아니라 영향력이 지대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윗과 같은 삶을 살므로 선한 영향력이 지대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본문에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말이 9번이나 나옵니다. 여호와의 시선 앞에 살 때 나도 정직하고 담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축복입니다. 거짓되게 살 때 삶이 피곤하고 혼란스럽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은 바로 성공과 형통의 비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역사와 삶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것, 이것은 결코 가볍게 볼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람들이 보든 안보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여 그 앞에서 정직하고 용기 있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