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성탄 제 2강 구원의 뿔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1:57-80 요절/ 누가복음 1: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십이삼 년 전 추석때 저는 경부고속도로에서 중앙분리대를 들이박고 전복된 봉고차 안에 있던 대 여섯명의 청년들을 구조한 적이 있습니다. 건장한 청년들이었지만 그들은 꼼작 못하고 신음소리를 내며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들을 모두 구조할 수 있었으나 운전을 하던 청년은 살릴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저에게 상당기간 정신적 트라우마가 있었습니다. 운전한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외치던 청년의 외침이 제 귓가를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저는 우리 인간의 현 주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마치 사고난 차 속에서 신음하며 고통하는 청년들과 같아서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탄절이 무슨 날입니까? 하나님께서 구원이 필요한 우리를 돌아보시고 구원의 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구원의 뿔로 오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어떤 은혜를 누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운데 구원의 기쁨과 하나님께 대한 찬송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아니라 요한이라 하라 57절을 보십시오.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들과 친족들이 이 소식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가랴 가정에 큰 궁휼을 베푸셨구만. 사가랴 가문의 영광이여~” 팔일이 되매 사람들은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이름을 짓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아이의 이름을 이웃과 친족들과 함께 짓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아이 이름을 할아버지가 짓는 관습이 있습니다. 제가 장남인데 첫 아들을 낳았을 때 저의 아버님이 제 아들의 이름을 짓고자 하셨습니다. 아마 작명소에서 돈을 주고 지어오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반석이라고 지어놓았다고 하자 크게 섭섭해 하셨습니다. 사가랴의 이웃과 친족들이 무슨 이름으로 지을 것인가 고심하고 있던 중 가장 연세 많으신 분이 이렇게 제안하였습니다. “아따~ 우리 가문중에서 그래도 사가랴 제사장만큼 훌륭한 분이 없는디~ 우리 사가랴로 짓제. 어쩐가?” 그러자 이웃집 제이콥 삼촌이 거들었습니다. “두 말하면 거시기제. 사가랴로 해부러~ 사가랴 2세~” 그러자 모두가 박수를 쳤습니다. 이제 아이의 이름은 사가랴로 정해지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때 아이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결사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절대 안된당께. 반드시 요한이라고 지어야 된당께~” 그러자 사람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아니, 친족중에 요한이라는 이름은 없는디. 뭔 소리여~.” 그런데도 엘리사벳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아이의 아버지인 사가랴에게 몸짓으로 무엇으로 이름을 지을지 물어보았습니다. 벙어리 사가랴는 서판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 이라고 적었습니다. 이는 천사가 일러준 이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랬습니다. 부모 두 사람 모두가 가문에도 없는 이름을, 그리고 똑 같이 요한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더욱 놀랍게도 벙어리였던 사가랴의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고 말을 하였습니다. 거기에다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 부부에게서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엘리사벳은 사람들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아닐 때 분명하게 “NO. 안됩니다.” 말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가랴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로 지어 자신의 명예, 가문의 영광을 취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역사를 먼저 앞세웠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전통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시고 하나님의 역사에 사용하십니다. 제2장.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으니 그 부친 사가랴가 입이 열리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였습니다. 68,69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사가랴는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뿔은 권능을 나타냅니다. 구원의 뿔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권능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고자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어떤 마음을 가졌기에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구원의 뿔로 이 땅에 보내는 걸까요? 72,73절을 읽겠습니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78절에서도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이유, 그 마음의 동기는 우리를 긍휼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전체에 나타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강조해서 거듭 말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를 긍휼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때로는 생각지 못한 끔직한 일,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감당하기 벅찬 고난과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나만 왜 이런 고통과 고난을 당하는가? 하나님은 뭐하고 계신가? 주무시는가? 자조섞인 말로 푸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주무시지 않습니다. 나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긍휼히 여기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나라가 망하고 자기 백성들이 무참히 칼에 죽임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 가운데서 긍휼의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렘애3:22,23) 여러분은 우리네 인생 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0대에게 인생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다수는 “즐거워요”. “재밌어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런데 어르신들에게 물어보면 “인생이 고난이지 뭐긴 뭐야”라고 대답합니다. 모세는 인생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하나님은 슬픔과 고난의 시간으로 인생 대부분을 보내야하는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첫사람 아담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는 내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라. 네가 따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그 아내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만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따먹고 나니까 갑자기 그들의 벌거벗은 몸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였습니다. 겨우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벗은 몸을 가리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꼴 좋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그들이 부끄러워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가슴 아파하면서 동물을 죽여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셨습니다. 그들이 벌 받을 짓을 초래하고 스스로 부끄러움을 자초했음에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주를 보내주실 것을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뱀을 저주하시는 중에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3:15) 사단의 머리통을 박살낼 여자의 후손, 구주를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 긍휼과 사랑가운데 우리를 돌아보시기 위해 구원의 뿔을 보내셨습니다. 이 땅의 세월가운데서 많은 슬픔과 많은 괴로움과 많은 고통을 통과해야 하는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주시기 위해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뿔로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이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터치되길 기도합니다. 그러면 구원의 뿔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구원을 주십니까? 첫째, 원수로부터 구원하십니다. 71절을 읽겠습니다.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4절에서도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는다고 나옵니다. 이 원수가 누구입니까? 바로 인류를 타락시킨 마귀입니다. 사단이라 불리우는 마귀입니다. 이 마귀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구원의 뿔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만물을 지으시며 만유의 주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원수마귀에게서 우리를 구원코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러한 구주의 탄생, 사단의 머리통을 깨뜨려 버릴 구주의 오심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아담이 타락한 때로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습니다(72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마귀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마귀는 참으로 강합니다. 초자연적인 권능으로 행합니다. 욥기서에 보면 마귀가 욥을 시험하고 해를 가하기 위해 하늘에서 불이 임하게 하여 욥의 가축들을 불태워 죽입니다. 강한 바람을 일으켜서 집의 기둥을 무너뜨려 식사 중에 있던 욥의 아들들과 딸들을 몰살하여 죽입니다. 이 마귀는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이 마귀는 속이고 죽이는 일을 본업으로 하는 극악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요8:44에서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고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마귀의 정체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모든 살인사건의 배후에 마귀가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류의 첫 살인, 즉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사건에도 마귀가 개입된 것을 요일3:12에서 알려줍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여기서 ‘악한 자’는 마귀를 말합니다. 마귀에게 붙잡히고 마귀에게 충동질 당하여 첫 살인을 범하고 만 것입니다. 얼마 전 강서구 PC방 살인사건도 마귀가 크게 한 몫을 한 것입니다. PC방 손님으로 왔던 29세의 김성수가 PC방 알바생 스무살 청년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사건입니다. 얼굴과 목쪽에만 30군데의 칼 자국이 나 있어 담당의사조차 혀를 내두르며 가족들에게 시신을 보지 말라고 권유했을 정도로 끔직하였다고 합니다. 언론에서는 사건의 동기가 무엇인지 왜 그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행했는지 몹시도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김성수의 말로는 천원을 환불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나만 바보가 되었구나’ ‘나를 개무시하는구나’ 생각하여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그 부모는 10년간 우울증 약을 먹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이 사건의 원인에는 가정적 요인, 사회적 요인, 정서적 요인,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마귀가 그 청년의 마음을 확 붙잡아 버린 것입니다. 사로잡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끔직한 일을 자행하도록 그 영혼을 사로잡고 그를 충동질 한 것입니다. 그 어느 누가 이 청년같이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대적 마귀를 당할 수 없습니다. 오직 구주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마귀의 손에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사단의 머리통을 깨리라고 예언하신 권능의 구주 예수를 믿어야만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내가 나의 인생 길을 운전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만치에서 누군가 태워달라고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가까이 가 보니 예수님입니다. 차를 멈춥니다. 예수님을 옆자리에 태웁니다. 그리고 내 인생 내가 운전하고 갑니다. 자! 이것이 믿는 것일까요? 아직 부족합니다. 잠시 차를 세웁니다. 나는 운전석에서 조수석으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운전석에 앉도록 합니다. 운전대를 예수님께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요 믿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운전대를 구원의 뿔 예수님께 맡기는 것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질 때에라야 사람이 원수 마귀의 손으로부터 건짐을 받습니다. 마귀로 인해 발생하는 현재와 미래의 재난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두 번째로 구원의 뿔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구원을 주십니까? 77절“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류의 시조가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에게 종속되고 마귀에게 종속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키워보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커가면서 죄악된 모습이 나타나죠. 거짓말하고 속이고 잘못을 은폐하는 모습을 자녀에게서 봅니다. 내 자녀는 그러지 않을 줄 알았다가 놀랩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종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대로 놔두면 죄의 종, 마귀의 종으로 살다가 파멸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뿔 예수님이 오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의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의 죄가 어떤 방법을 통해 사해지는 걸까요? 6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속량을 통해 죄가 사해집니다. 속량이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조아고라’인데 아고라는 ‘장터’란 뜻이고 ‘조’는 사다는 뜻입니다. 조아고라는 ‘장터에서 사다’는 뜻입니다. 속량이란 ‘노예를 장터에서 값을 지불하여 사서 해방시켜준다’는 뜻입니다. 죄의 종 되었던 우리가 죄 사함의 구원을 받게 된 것은 거저 된 것이 아닙니다.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죄의 노예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사람이 구주 예수님을 믿으면 죄에서 해방됩니다. 자유를 얻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믿고 정욕과 음란에서 벗어납니다. 어떤 이는 술과 도박에서 해방됩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목마름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게으름과 안일에서 일어나 부지런하게 됩니다. 구주 예수님은 정욕과 교만과 안일과 허무가운데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던 저를 대학 1학년 가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죄를 십자가에서 속량하셨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였습니다. 이때 구원의 뿔 예수님은 저에게 죄 사함을 주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분명한 인생 목적을 갖게 하사 생명을 살리는 성경선생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죄사함의 은혜가 있으십니까? 이번 성탄에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해보고 감사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뿔을 일으키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74,75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제는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두려움 없이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왜 우리가 두려움 없이 섬길 수 있습니까? 구원의 권능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모든 죄를 확실하게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롬8:1)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기에, 사람보기에 아직도 허물과 약점과 죄가 있는 존재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량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또한 주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우리는 죄의식, 죄에 따른 형벌에 대한 두려움,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죽음의 모든 그림자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종신토록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앞으로의 남은 날들을 거룩함과 의로움 가운데 하나님을 섬겨야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성탄에 우리는 마음껏 기뻐해야겠습니다. 더불어 반성도 해야겠습니다. 내가 과연 올 한해 나를 위해 살았는지, 하나님을 위해 살았는지 살펴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3장. 돋는 해되신 예수님 78,79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 하시리로다 하니라” 여러분은 돋는 해를 보신 적이 있나요?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해돋이를 보기 위해 해변으로, 산 정상으로 몰려갑니다. 돋는 해를 바라볼 때 그 느낌이 어땠나요? 벅찬 감동과 희망이 느껴지지 않던가요? 해가 돋기 전, 세상은 캄캄하고 냉기가 가득합니다. 한 치 앞도 분간하지 못하고 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돋는 해가 임하면 어떻습니까? 모든 어둠이 물러가고 온 세상이 밟게 됩니다. 사물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국민대 사모님들과 함께 ‘국가부도의 날’ 영화를 보았습니다. 1997년 한국의 IMF사태를 다룬 영화입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고 불리우는 OECD에 29번째로 가입한 직후 외환보유액이 바닥나 39억 달러 밖에 남지 않는 초유의 사태가 나서 국가 부도직전에 몰립니다. 이때 정부는 급하게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게 되죠. 그리고 우리 경제와 사회에 혹독한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30개의 대기업 중 17개가 망했습니다. 미도파, 한보, 삼미, 청구, 해태, 기아, 대우 등 굵직한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한 달 만에 3만 3천개의 중소기업이 도산하였습니다. 이때까지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했던 직장인들은 명예퇴직을 해야 했습니다. 실업자는 작년대비 3배가 증가한 150만 명이 되었고 금리는 30퍼센트까지 치솟았습니다. 언론에서는 부채를 갚지 못해 자살한 사람들의 슬픈 사연들이 연일 보도되었습니다. 우리 UBF 목자님들에게도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이 임하였습니다. 명퇴 당한 분, 실직하신 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이 나라를 위해, 목자님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금모으기운동에도 동참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우리 목자님들에게 돋는 해로 임하사 희망과 평강을 주시고 새로운 길을 여셨습니다. IMF때 많은 UBF목자님들이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누가 있죠? 브라질 깡피나스 파울로 김 선교사님, 00의 박제임스 선교사님등이 있습니다. 최희철 목자님은 새롭게 토양환경 분야로 진출하여 현재의 기업을 일구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진정한 돋는 해가 되어 주셨습니다. 현재도 많은 분들이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와 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함께 영화를 본 어떤 사모님은 현재의 형편이 IMF때와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한 인물들의 고뇌가 공감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공감이 되었습니다. 현재 상황도 녹록치 않습니다. 학생들은 취업하기 힘들고, 직장인은 언제 명퇴를 당할지 모르고, 자영업자가 되어도 무한경쟁에서 도태될까 염려하며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평강이 필요합니다.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필요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돋는 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불안 속에 살아가는 자에게 평강과 확신에 찬 삶을 살도록 미래의 보증이 되어 주십니다. 결론입니다. 복된 성탄절을 맞이하여 구원의 뿔이요 돋는 해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이 예수님을 우리 마음의 첫 자리에 모시어 드리길 기도합니다.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