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성탄 3강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말씀 누가복음 2:1-20 요절 누가복음 2:10,11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BC 490 년 페르시아의 10만 대군이 아테네 동북방 42 km 지점에 상륙했습니다.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한 그리스는 스파르타에 원군을 요청했으나 종교적 이유로 거절당했고 1만의 중무장보병으로 10만 페르시아 군대를 상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테네의 운명이 달려있는 전쟁에서 지휘관 밀티아디스 장군은 탁월한 전술로 페르시아 군을 궤멸시켰습니다. 이때 불안에 떨고 있는 아테네 시민을 향해 올림피아경기 선수 출신인 피디피디스가 달리고 달려 마침내 “우리는 이겼노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소식으로 불안에 떨던 아테네 백성들은 안도감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최근에 베트남 축구와 박항서 감독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흥분했는데 그 이유중 하나는 아마도 부족한 사람, 약한 나라도 성공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반면에 수능을 마치고 체험학습 여행을 떠났던 고3들의 소식은 우리를 매우 슬프게 했습니다. 이처럼 소식은 사람을 격려하기도 하고 다운시키기도 합니다. 이시간 우리는 마라톤 들판의 승전보다도 더 기쁜 소식, 박항서 감독과 베트남 축구의 승리소식보다 더 기쁜 소식, 우리의 모든 어둠을 사라지게 하는 소식에 대해서 듣고자 합니다. 이 소식을 진지하게 듣는 저와 여러분에게 큰 기쁨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때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 아구스도는 본명은 옥타비아누스로 18세에 친족인 율리우스 케사르의 양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정치력과 지혜로 2차 삼두정치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BC 30년 로마의 최고사령관, 원로원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BC 27년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 곧 ‘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받으며 로마 초대황제로 등극했습니다. 그는 로마제국을 41년간 통치하였으며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라는 모토아래 로마제국 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만들었으며 그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도 생겼습니다. 역사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 8월을 AUGUST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가 로마제국 모든 나라에 ‘호적 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호적 명령이란 일종의 인구조사로 로마제국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파악하여 인두세를 부과하고 징집에 동원하기 위해 시행되었습니다. 이 호적 명령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도 나오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호적 명령이 떨어지자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아마도 열심당원들은 로마제국의 이러한 조치에 대해서 무력저항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제국의 권력과 군대 앞에 감히 반항하지 못하고 그 호적 명령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호적 하러 움직이는 대열 속에 우리의 주인공 요셉과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윗의 집 족속이었기 때문에 다윗가문의 본적지인 베들레헴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들의 현거주지 갈릴리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144km 정도로 1주일은 걸립니다. 나라를 빼앗긴 것도 화가나는 데 모든 백성이 이동해야 하고 그동안 일도 쉬어야 합니다. 요셉은 처음에 약소국 백성으로 로마에 대한 분노와 반발심, 그리고 미운 감정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계속 그런 마음으로 베들레헴까지 갔을 까요? 당시 성경에 조금이라도 조예가 있는 사람들은 메시야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어느 시점인가에는 분명히 하나님이 미가서 5:2절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고 계심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처음에 반발심과 미움의 감정에 사로잡혔던 요셉은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명령을 보는 눈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얄미운 아구스도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저항할 수 없는 부당한 권력자나 악의 세력을 통해서도 그 뜻을 성취하십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우리의 가이사 아구스도’에 대해서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분노와 미운마음을 내려놓고 감사와 기쁨으로 섭리의 길을 힘내어 걸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크고 작은 일의 배후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고 인생사를 섭리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의 불만으로 튀어나온 입술이 들어가고 감사와 찬양의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현재의 상황을 하나님의 인도하심 편에서 볼 수 있는 영적 시각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찼습니다. 마리아는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강보는 질 낮은 천입니다. 그런 투박한 강보로 싸서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뉘었습니다. 구유에 뉘였다는 것은 외양간에서 아기를 낳았다는 것인데.. 아니 출산을 외양간에서 하고 아기를 불결한 구유에 뉘이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을 까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여관이 만원이 된 것이 예수님이 외양간에서 태어나신 표면적 이유지만 이면적 이유는 뭘까요? 오늘날 산모는 어디서나 돌봐야 할 1순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부르짖는 산모의 고통소리를 못들은 척하였습니다. “어 무슨 소리지” 하며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TV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지난 주 말씀을 전하신 이 아브라함 목자님은 고속도로에서 사고 난 승합차에서 7명의 청년들을 건져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많은 차량들은 그냥 지나쳤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괜히 돕고자 하면 손에 피를 묻히고 자기 여행 계획에 차질이 생깁니다. 그래서 모두가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UBF의 양심, 이 아브라함 목자님은 차를 멈추고 신음하는 청년들을 구조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사랑 없는 내면, 희생하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요셉과 마리아를 외양간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나마 조금은 사랑이 있는 어떤 사람이 최소한의 배려를 한 것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남이야 어떻게 살든 말든 나와 또는 우리 가정만 행복하면 된다는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을 봅니다. 자기의 편하고 안일한 삶을 양보할 수 없는 우리의 내면입니다. “빈방 있습니까?” 의 연극 주인공 득구는 안타까워하는 요셉과 만삭된 마리아의 고통 하는 모습을 보고 원래 대사 “빈방 없습니다!” 라는 말 대신에 “빈방 있습니다! “빈방 있어요~”라고 울부짖으며 대답하는 바람에 연극을 망쳤습니다. 그런데 그는 연극을 망쳤지만 삶의 가치는 완성시켰습니다. 그는 좀 모자란 청년이었으나 사실은 진정으로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똑똑하고 계산 잘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사는 삶이 완전한 삶일까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진정한 삶의 가치와 행복을 잃어버린 모자란 인간들은 혹 아닐까요? 우리 목자님들 중에 어떤 분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가정을 오픈하고 양들을 위해 방을 내어주었습니다. 우리의 방은 무엇입니까? 나의 즐거움과 안락을 위해 쓸 수 있는 것을 주님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쉼을 위해 쓰고 싶은 시간을 주님과 이웃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물질을 성탄구제헌금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계신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희생적인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과 지위와 권세와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크신 희생과 사랑으로 우리가 부요케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를 가난하게 함으로 다른 사람을 부요케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탄 소식이 누구에게 전해졌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 지라. 목자들은 당시 3D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사회 밑바닥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이었습니다. 구주의 탄생소식은 최고급 호텔에서 룸서비스를 받으며 편히 쉬고 있는 이들에게 임하지 않았습니다. 들판에서 추위를 이기고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던 깨어있던 목자들에게 임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어려움 가운데 살며 그 영혼이 가난하고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임합니다. 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천사는 어떻게 구주의 탄생소식을 전했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는 구주의 탄생소식을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성탄의 소식은 첫째로 온 백성에게 미치는 좋은 소식입니다. 둘째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온 백성에게 미치는 좋은 소식이 있습니까? 최저 임금보장은 저소득층에게 좋은 소식이지만 소상공인이나 중소기업인 들에게는 나쁜 소식입니다. 어떤 학생들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 “야호” 깡충깡충 뛰며 주먹을 불끈 쥐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합니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은 노력을 했음에 불구하고 쓴 눈물을 흘리면서 비통하게 고개를 떨굽니다. 누군가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당사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우울한 소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이 소식에 제외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만인에게 기쁨이 되는 소식입니다. 그것은 바로 구주가 태어 나셨다는 소식입니다. 소식도 기쁨의 정도가 다릅니다. 아주 미미한 기쁨을 주는 소식도 있습니다. 미세먼지 때문에 지하철을 하루 공짜로 타게 되었다는 소식은 미세한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명절에 고속도로 통행료를 3일 동안 면제해 준다는 것은 꽤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얼마 전부터 유행한 ‘소확행’이란 단어는 요새 사람들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사람들은 이런 기쁨을 맛보기위해 이리저리 노력을 많이 합니다. 먹는 기쁨이나 여행가는 기쁨을 추구합니다. 그런 기쁨을 사진을 찍어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려 자랑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그런데 SNS에는 항상 기쁘고 좋은 일만 올라가 현실과 괴리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청년들은 여러 유투브 영상들을 보면서 얼마간 기쁨을 누리지만 허탈하고 무기력합니다. 그러나 구주탄생의 소식은 큰 기쁨 곧 본질적이고 근원적이며 영원한 기쁨을 줍니다. 천사가 전한 소식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게 구주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구주가 태어나신 역사적인 날입니다. 다윗의 동네에 나셨다는 것은 구주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신 것을 말합니다. ‘너희를 위하여’는 구주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를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너를 위해 구주가 나셨다” 이것이 바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구주는 인간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진 존재임을 전제합니다. 그 수렁이 뭡니까? 죄와 죽음의 수렁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죄란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비방 교만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향락 우상숭배 그런 것을 말할까요? 이런 것은 죄라기보다는 죄의 현상에 불과합니다. 죄란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들은 죄의 현상들을 보입니다. 이런 인간들은 결국 죄의 삯으로 죽고 영원한 형벌에 처해집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a)”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죄와 사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인간은 어떤 표면적인 인간조건의 변화가 와도 참으로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4년 장학생이 되고, 졸업 후 좋은 직장을 얻고, 이상형의 배우자와 결혼해도 그렇습니다. 국가적으로 모든 청년의 100 % 취업, 모든 가구의 빚 탕감, 1인당 소득 10만 불, 남북한 철도개통, 그 철도로 2019 유럽수양회 참석, 남북한 통일, G2 진입, 월드컵 우승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주께서 오셔서 죄와 죽음의 문제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자유하게 하셨다는 소식만이 우리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죄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며 우리가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는 소식만이 우리에게 큰 기쁨(A great joy)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구주이십니다. 이 구주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바로 인생 최대의 승리자입니다!! 때문에 구주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 얼굴이 태양처럼 빛나고 그 입술에 미소가 머금어져 있습니다. 어떤 실패도 실패가 아닙니다.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그 기쁨이 너무 크기 때문에 어려움이 작게 느껴집니다. 초대교회에서 스테반 집사님은 말씀을 전하다가 청중들에게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그는 비통한 마음으로 죽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성령충만한 가운데 죽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기뻐하며 죽었습니다. 이 정도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영생의 기쁨의 크기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가 가진 영생의 기쁨에 생채기를 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구주 예수님을 허락하여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영생의 기쁨, 큰 기쁨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천사는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 곧 그리스도일 뿐 아니라 ‘주 이시다’ 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오, 주님” “ 오 주님” 이렇게 우리가 부르지요! 주님이란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시고 우리를 방치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날마다 우리 삶의 인도자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은 하루하루가 기쁨이 충만합니다. 가진 문제가 크지만 우리 주님은 문제보다 크시기에 게의치 않습니다. 비록 실패한 듯 보이나 주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광풍은 오히려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더 빨리 인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을 때 오늘의 이 시기를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될 날이 곧 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은 후에 주님과 동행하고 계시나요? 혹 외로움을 느끼십니까? 외로운 것은 혼자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러면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날마다 인도하시는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구주의 표적은 비단에 싸여 뉘어 있는 아기가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이 비단에 싸여 왕궁에 뉘어 있는 아기였다면 부유한 자, 높은 자, 귀한 자들의 친구요 구주밖에 되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질 낮은 천에 싸여 냄새나고 불편한 구유에 누이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의 친구, 힘들게 살아온 이들의 친구, 환영받지 못한 이들의 친구, 어떤 사람의 친구도 되실 수 있는 분임을 말해 줍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천하를 호령하는 권세를 가졌습니다.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은 군대의 힘으로 복종시켰습니다.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이사 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지셨으나 가이사처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힘없는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의 보좌는 구유였습니다. 참으로 초라합니다. 그런 예수님은 낮아져 12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자기를 못박는 모든 죄인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시며 섬겨주셨습니다. 아기는 힘도 없고 어떤 권세와 권위도 부릴 수 없습니다. 아기는 그저 방글방글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와서 무슨 짓을 해도 다 받아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대는 어떤 면에서 지도자 하기, 목자하기가 예전보다 어렵고 부모와 선배 노릇하기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시대를 잘못 태어나 고생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겸손과 섬김으로 진정한 권위를 가지셨던 예수님을 배우는 최고의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이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탄의 계절에 무한한 겸손과 인내로 사람들을 섬기신 아기 예수님의 통치 리더십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그동안 제가 가이사 아구스도와 같이 사람들을 다스리려 했음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제가 낮아져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듣고 섬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를 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제가 입을 열면 누가 다칩니다. 어떤 사람은 저를 보기만해도 부담을 느끼고, 저에게 무슨 말을 들으면 더 부담을 느낍니다. 이는 제게 아기의 마음이 없고 마음이 높고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히 듣고 배우고 섬기려 하기보다는 가르치고 방향을 주려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아기가 되셨습니다. 제가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의 한없는 겸손의 마음을 배워 모든 사람보다 낮아져 모든 사람에게 경청하고 모든 사람에게 배움으로 부담이 아니라 힘을 주고 쉼을 주는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수많은 천군과 천사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님의 무한한 겸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선택된 이들에게 진정한 평화가 주어졌습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진정한 평화로서 사람들 사이에도 참 평화를 줍니다. 목자들은 빨리 가서 천사들의 말의 진위를 확인하고 사람들에게 천사들에게 들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진위를 확인하고 마음에 새겨야 할 소식은 ‘과연 나를 위해 구주가 나셨는 가’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진지하게 확인하고 마음에 새기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 시간 모든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모두에게 주어지면 귀한 줄 모른다고 하는 데 우리의 기쁨이 감소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각자가 구주탄생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나에게 임하는 소식으로 영접하므로 성탄의 기쁨이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축하합시다.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나를 위해 구주가 나셨다” “메리 크리스마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