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신년 2강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말씀 예레미야 29:1-23 요절 예레미야 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희망찬 새해가 밝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희망을 덧입기 위해 북한산에 올라가 떠오르는 해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이 우울하고 낙심이 되어 산에 올라갈 힘도 없었습니다. 잠도 제대로 못자고 새해 첫 날을 맞이했습니다. 사람은 희망이 없이는 하루도 살기 힘들고 희망만 있으면 어떤 고난도 이기는 신비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우리가 사망의 골짜기 같은 상황에 있더라도 확실한 희망이 있다는 것을 배우고자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왜 우리에게 올해 희망이 있는 지 깨닫고 다시 마음이 밝아지고 해처럼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느부갓네살 왕이 바벨론으로 끌고 간 유다의 장로, 제사장, 선지자들과 백성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 침공 전후로 약 40년간 예언한 아나돗 출신 선지자입니다. 편지를 쓴 때는 여호야긴이라고 불리는 여고니야 왕과 그 어머니와 궁중내시들과 고관들과 기술자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BC 597년 이었습니다. 바벨론 2차 침공 직후입니다. 유다는 여호야긴 왕이 끌려간 후 그의 삼촌 시드기야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의 사자인 엘라사와 그마랴 편으로 이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가 어떻게 시작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예레미야는 편지의 서두에 유다가 바벨론의 침공을 당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밝힙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징계하시기위해 바벨론 침공을 허용하시고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죄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2: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는데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한 것은 어떤 도덕윤리적인 죄보다 크며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들도 마음의 첫 자리에 하나님을 두지 않는 죄, 여러 가지 우상들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은 죄가 있습니다. 또 헛된 우상에 마음쓰고 마음 팔려 2018년을 보낸 죄들이 있습니다. 하여간 그들이 바벨론에 끌려간 것은 그들의 죄에 대한 징계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자신들의 나라가 힘이 약해 이민족에게 침입을 받아 수도가 유린되고 비참하게 포로로 끌려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벨론 침공과 포로사건을 봤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에 일어난 사건들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대처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민족주의적 관점을 가진 유다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했고 바벨론에 분노하며 어떻게든지 이 상황의 반전을 꾀했습니다. 그래서 1절에 바벨론 포로 중에 ‘남아있는’ 이란 표현은 반바벨론주의자들이 폭동과 모반을 일으켜 사람들이 희생당했음을 시사합니다. 바벨론에 선민의 자존심과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는데 21절에 나오는 아합과 시드기야와 같은 인물들이었습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는 거짓 선지자 하나냐도 그런 류의 사람이었습니다. 28장을 보면 하나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며 하나님이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으셔서 빼앗긴 성전의 기구들과 여고니야 왕과 모든 포로들이 2년안에 되돌아올 것이라 했습니다. 사람들은 불명예, 낮아짐, 속박과 고난을 싫어합니다. 그런 상태가 속히 끝나기를 원하는 데 거짓 선지자들이 그런 말을 하니 그들의 메시지가 쏙쏙 들어왔을 것입니다. 빨리 포로생활을 끝내고 본토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그들의 희망이요 미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그들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는 어떤 폭탄과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까? 5-7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포로생활, 노예생활이 장기화될 것이니 그곳에 차분히 눌러 앉아 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집을 짓고 정원도 만들고 채소도 심으라 합니다. 자녀도 낳고 손주들도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번성해야 하는 이유는 때가 되면 바벨론에서 나와 새 이스라엘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번성하고 평안하게 살기위해 그들은 바벨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말을 주로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꿈을 받았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꿈은 잠재된 욕망이 표출된 것이기에 꿈을 다 믿을 수 없습니다. 아마 포로로 끌려온 유다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밤마다 본토로 돌아가는 꿈을 생생하게 꾸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거짓 선지자들의 듣기 좋은 말과 꿈을 믿는 대신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합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그들이 1-2년이 아니라 70년이 되어야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이 기간은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입니다. 아예 돌아오지 못하고 바벨론에서 죽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2세대, 3세대, 4세대들입니다. 이것은 본토로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거의 재앙수준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선한 말씀을 성취할 것이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평안이며 재앙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잘 모르면서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추측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누구보다도 하나님 자신이 잘 알고 계시니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평안이요 재앙이 아닙니다. 그 백성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이는 진실한 하나님의 고백입니다.
한때 대통령의 인기가 80%에 육박했는데 요새 대통령은 어떤 사람들에 의해 문재앙 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같은 대통령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다릅니다. 우리가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재앙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나요? 재앙이라는 것은 죄에 대한 심판으로 공동체나 개인을 멸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재앙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이 재앙이라면 우리에게 어떤 미래도 희망도 찾을 수 없습니다. 낙심하여 두려움에 빠지고 인생길에서 주저앉아 망연자실하여,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평안과 미래와 희망을 주려 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에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잘못된 태도 두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가볍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진지하게 받지 않고 자기성찰과 깊은 문제의식으로 연결시키지 않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낙심하는 것입니다. 징계 받을 때 낙심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서 소망을 거두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겪는 일은 심판이며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기에 나는 고난만 실컷 당하다가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징계를 받지 않는 이가 사생자이거나 친아들이 아닌 것이라 했습니다. 자식같이 않는 자식은 냅둬버립니다. 무엇을 해도 터치하지 않습니다. 또한 남의 자식도 그렇습니다. 남의 자식이 어떻게 살든지 내가 책임지려 하거나 마음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사랑하는 자식은 잘못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소리높여 야단도 치고 눈물을 흘리며 종아리도 때립니다. 그 이유는 참 부모로서 자신의 아이에게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짧아 현상만 보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아쉬움을 표합니다. “망했다” “끝났다” “챙피하다” 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얼마나 멀리 내다보고 우리를 인도하는 지 아십니까? ‘생각’이란 단어는 복수로 되어 있는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많고 깊은 것을 뜻합니다. 시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시편 139:17) 하나님은 정말 나의 삶이 보배처럼 빛나고 아름답게 하시려고 징계와 연단을 주십니다. 한동대 김영길 총장님은 총장 재임 시에 물질을 불법적으로 유용했다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늦은 나이에 감옥에서 칼잠을 자며 왜 이런 일이 자기 삶에 일어났는지 기도하며 생각했지만 그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어쨌든 그는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감옥에서 쉼을 누리게 되었고 오래지 않아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직원이 김 총장님이 풀려난 것을 아주 기뻐하지 않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래서 물어보니 총장님이 감옥에 계시는 동안에는 한동대를 위한 기부금이 넘치게 들어왔는데 총장님이 나오시면서 줄어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김총장님은 하나님이 자신에게는 쉼을 주시고 한동대는 많은 기도지원과 물질지원을 받아 학교를 굳게 세우려는 뜻이 있었음을 알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고난의 씨를 뿌릴 때, 거기서 작물을 거두고 그것으로 베를 짜서 옷감을 만들고 그것으로 옷을 지어입고 기뻐하는 것까지 내다보고 하십니다. 그래서 챨스 스펄젼은 말했습니다. “만약 구름이 자비의 소낙비를 내리기 위해 몰려온 것이라면 우리는 그 구름을 환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에 진정한 희망을 주기 위해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생각을 안다면 주님이 내게 주신 징계와 연단을 두 팔 벌려 환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유다백성들을 바벨론에서 연단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12,1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부르짖어 하나님을 찾고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도록 함입니다. 성경에 부르짖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사람은 언제 부르짖습니까?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악행이 저질러질 때 의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대기근이 왔을 때 사람들이 양식을 달라고 바로에게 부르짖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된 노동과 학대로 부르짖었습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군대라는 상황이 펼쳐질 때 부르짖었습니다. 물이 없을 때 백성들이 부르짖었고 모세가 백성에게 돌에 맞아 죽을 상황이 되자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대체적으로 고통이 너무 심하고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고통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것은 아픈 사람이 약국이나 병원을 찾듯이 우리 인생문제의 해결자이신 하나님을 찾도록 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짖어 찾도록 하기위해 고난의 절벽으로 내모십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정말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평안의 때에 대부분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고난의 때에 새벽을 깨워 여호와를 그리 찾던 다윗도 평안의 때가 되자 어떠했나요? 왕궁옥상에서 어디 볼거리가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여호와가 아닌 여인을 찾았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각성시키기 위해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고통과 문제를 주십니다. 그런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고통과 문제는 나를 당신에게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장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던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 22:37)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것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야 행복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많이 연단하시고 약속의 땅에 살게 하셨습니다. 많이 연단하신 이유는 좋은 환경을 사람들이 영적으로 선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시나 좋은 환경은 역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광야 때보다 더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온갖 주위나라의 눈에 보이는 수많은 우상들에 정신이 팔려 영혼이 훅 갔습니다. 그들은 온갖 우상을 섬기며 강대국을 의지했습니다. 우상과 강대국의 특징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대와 달리 역시 좋은 환경에서 하나님을 찾는 이들은 가뭄에 콩나듯 했습니다. 400년동안 다윗와 요시아, 히스기야, 여호사밧, 아사 등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전 마당만 밟으며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고 평일에 성전을 찾는 이들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좋은 환경에서 그 백성들을 끌어내셨습니다. 그들의 옷을 벗기시고 채찍에 맞게 하셨습니다. 포로요 노예가 되게 하셨습니다. 자유도 없고 주권도 없는 곳, 눈물을 흘리며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는 곳으로 옮기셨습니다. 이런 곳에서 그들은 고통하며, 한계를 느끼며 때마다 부르짖어 하나님을 찾고 의지합니다. 눈물로 하나님을 찾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하나님을 구합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합니다. 바벨론 70년 기간은 시간만 가면 되는 그런 기간이 아닙니다. 그냥 2세대, 3세대를 육신적으로 낳고 키우는 기간이 절대 아닙니다. 그들은 거기서 새롭게 되며 2세, 3세들을 사명감을 가지고 영적으로 키워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르짖으라” “온 마음으로 구하라” 같은 말들을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정금같은 신앙으로 빚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바벨론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바벨론에 동화되지않고 자녀들을 이끌고 출바벨론하겠습니까? 그들이 이 바벨론에서 부르짖으며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할 때 바벨론 70년은 의미있는 하나님의 시간이 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간절히, 온 마음으로 구하는 자를 반드시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실 때, 우리에게 최고의 평안과 행복이 밀려 옵니다. 그들은 축복의 땅이라고 하는 본토에서는 이런 평안, 이런 행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좋은 집에서, 좋은 것을 먹고, 온갖 좋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소확행은 있었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대확행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재앙의 땅처럼 보이는 바벨론 땅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이 축복을 누립니다. 대확행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포로의 땅, 노예의 땅에서 주어집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렇다면 포로의 땅에 있다고 다 이런 기쁨을 누립니까? 아닙니다. 어디있든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어떻게 됩니까? 당면문제가 해결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쫒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셨다는 표시로서 현재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유다백성들은 머나먼 타국에 있고 세계최강의 바벨론 제국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어떤 상황에 묶여있든 문제가 안됩니다. 역사와 인생의 주관자이신 만군의 여호와께서 일하시므로 그들이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인생은 당면문제를 해결하려고 씨름하기보다는 문제해결의 열쇠를 가지신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16-20절은 바벨론 포로에 끌려가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자신들은 운 좋게 재앙을 피했다고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에게도 칼, 기근, 전염병을 보내어 그들이 몹쓸 무화과 같게 하십니다. 결국 그들도 세계 여러 나라로 흩어져 저주와 경악과 조소와 수모의 대상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은 실제로 바벨론 3차, 4차 침공으로 현실화됩니다. 회개치 않는 이들에게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나는 고난을 당하지 않는 다고 안일과 자만가운데 있으면 안 됩니다.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온 마음으로 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진실로 회개한다면 바벨론에 있는 이들이 더 안전하고 미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진정한 의미에서 평안의 땅, 재앙의 땅이 어딘지 생각해 봅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축복의 땅이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것이 없으면 재앙의 땅입니다. 잘 사는 듯 보이나 그의 영혼은 썩은 무화과 같습니다. 또 언제 내팽개 쳐질 지 모릅니다. 반면에 재앙의 땅처럼 보이는 곳이지만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그는 축복의 땅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애굽은 요셉에게 어떤 땅으로 보였을 까요? 재앙의 땅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슬픔의 땅처럼 보였으나 기쁨의 땅이었습니다. 특히 감옥은 요셉에게 최악의 장소처럼 보였으나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최고로 축복된 장소였습니다. 재앙의 땅으로 보이는 바벨론 땅에서 그런 축복을 체험한 사람들이 바로 다니엘과 그 친구, 모르드개와 에스더, 에스라, 스룹바벨, 느헤미야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별과 같이 빛나는 많은 믿음의 2세, 3세, 4세들이 재앙의 땅에서 태어난 축복의 열매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가 바벨론에 있는 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 축복의 땅이냐 재앙의 땅이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가 그렇지 않는 가가 중요합니다. 2018년 저도 재앙과 같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교만과 무정무자비를 회개하였고 겸손히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찬송드립니다. 2019년 제가 더욱 겸손히 하나님을 찾고 구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신자의 고난은 재앙처럼 보이나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과 소망의 채찍질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만난다면 어디에 있든지 평안하고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재앙의 땅처럼 보이는 곳에서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면 바로 그곳이 축복의 땅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므로 2018년이 희망찬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